9화 먹거리 찾기(2)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할 때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부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재산을 늘리고, 노비를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해 양인과 결혼시키지 않소. 그러고도 사대부들이 물욕을 탐하지 않는 선비라 할 수 있소.”
“전······.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이균의 치기 어린 말에 이준경과 율곡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대부들의 배만 부르면, 왕과 백성은 굶주려도 상관없다는 것이오?”
“전하 그것이 아니옵고······.사대부는 나라의 근간이온데.”
이균이 조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대부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자, 율곡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찌 한 줌도 안 되는 사대부들이 나라의 근간이라는 것이요. 이 나라가 한 줌도 안 되는 사대부들의 나라요? 백성의 나라요?”
“전하!”
율곡은 당혹스러웠다.
과연 저 어린 왕이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지 그는 두렵기까지 했다.
어린 하성군이 보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준경도 어린 왕의 당돌함에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이 알던 하성군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가 알던 하성군은 비록 정식으로 세자로 책봉되지 않아 궁중의 법도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나 매사의 조심스럽고 자기 뜻을 밖에 내비치지 않는 겸손한 인물이었다.
그런 겸손하고 유순한 하성군이었는데, 그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카리스마를 뿜으며 척신을 단숨에 제거해 수렴청정을 거두고 조정을 장악했고, 이제 자기 뜻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그대들 말대로 농업은 이 나라의 근본이요. 하지만 조선의 국토는 대부분이 산지여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투성이요. 농사만 지어서는 백성이 배부르게 살 수 없다는 것이요. 백성이 가난하니 조세를 걷을 수 없고, 조세를 풍족하게 걷지 못하니 나라도 가난하여, 제대로 된 병장기 하나 구입하지 못하여 조선을 지킬 수 있는 병졸조차 제대로 양성하지 못하고 있지 않소. 이것이 어찌 제대로 된 나라라 할 수 있소.”
“전하! 농업과 사대부는 나라의 근간이옵니다. 이들을 버리시면, 조선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이준경은 걱정이 앞섰다.
이균의 말이 꼭 사대부를 버린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근간인 사대부를 등한시한다면 이제 갓 보위에 오른 이균의 왕권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내 어찌 사대부를 버린다 했소. 내 뜻을 곡해하지 마시오. 조선은 이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야 할 것이오. 무역을 장려하겠다는 내 뜻은 확고하오. 무역을 통해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 것이오.”
‘어찌 왕께서 천한 장사치가 되겠다는 것인가?’
율곡은 어린 왕이 스스로 천한 장사치가 되겠다고 하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준경의 시름도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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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을 상징하는 커다란 깃발과 함께 중무장한 선상군병 등 갑사들의 호위를 받는 어가가 도성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가고 있다.
어림잡아도 시위 군관과 의장의 일천여 명이 넘어 보였고, 수백 명의 악대가 장엄한 음악을 연주했으며, 수백기의 깃발이 펄럭이며 대신들과 왕족을 태운 말과 가마가 줄지어 가고 있었다.
어가를 수행하는 나인들과 궁인들을 합치면 수행 인원은 1만이 넘어 보였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균은 왕실 도자기를 만드는 관요가 있는 경기도 광주로 향했다.
엄중하고 화려한 어가행렬은 이균이 기획한 것이었다.
선왕이 후사가 없어 팔자에 없는 왕이 된 이균이 이제 왕권을 위협하는 척신을 제거하고 홀로 섰다는 것을 만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였다.
수많은 백성과 선비들은 새롭게 보위에 오른 어린 왕 이균을 지켜보기 위해 어가행렬이 지나는 길을 가득 메웠다.
왕권을 위협하는 척신을 단숨에 제거하고 수렴청정을 거부한 당돌한 왕 이균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도성에 전파되어 백성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림들은 새로운 왕 이균에 큰 기대감을 품었다.
하성군이 그들이 꿈꾸는 성리학의 나라를 완성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했기에 젊은 사림들은 어가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이균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이균이 꿈꾸는 세상은 사림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것과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이균의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이균에 열광하고 있었다.
일자무식의 백성들도 새롭게 왕이 된 이균이 어머니의 치맛품에 쌓여 윤원영 일행의 폭정을 지켜만 본 나약한 왕 명종과 달리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조정은 태평성대라 외치고 있었으나, 실상 명종시대 백성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가의 폭정으로 인한 공의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폭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도적이 되기 일 수였고 그 유명한 의적 임꺽정도 명종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백성들은 폭정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어가 행렬을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이균은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뭉클함에 울컥했다.
이윽고 장엄하고 화려한 어가행렬은 관요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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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조선에서 도자기를 가장 잘 만드는 자인가?”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조선의 지존 앞에 선 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몸을 덜덜 떨며 바닥에 바짝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거라!”
“전······.전······.하!”
이균이 고개를 들라 하자 그는 몸을 부들부들 털며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도포와 갑주로 무장한 수많은 갑사와 대신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기에 그는 더욱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두려워 말거라! 그대가 조선 최고의 도공인가?”
“전······.하! 송구하옵니다.”
이균은 조선 최고의 도공을 광주 관요에 데려오라고 어명을 내렸고, 어명에 따라 가히 조선 최고의 도공이라 평가받고 있는 이준기가 오게 되었다.
최고의 도공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에 있어 도공은 비천한 신분이었다.
그런 비천한 신분을 왕이 직접 찾고 있다고 하니 이준기는 자신이 큰 죄를 지어 불려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우선 앞섰다.
한 번도 비천한 신분의 도공을 왕이 직접 찾은 적이 없었다.
“도자기를 얼마나 만들었느냐?”
“30여 년 되옵나이다.”
“고향이 어디인고?”
“충남 공주 이옵나이다!”
“공주라 좋은 곳이구나. 자식이 있는가?”
“저······. 딸 다섯에 금년에 태어난 아들 녀석이 하나 있사옵니다.”
“하하하!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아들을 보았구나. 그래 사내아이 이름이 무엇이냐?”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50대 초반이 되어서야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들은 이균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삼평이라 하옵니다!”
“삼평? 그럼 사내아이 이름이 이삼평이란 말이냐?”
“저······.그렇사온데.”
소년왕 이균이 노인의 아들 이름을 듣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짓자 이준기는 당황하며 다시 머리를 바닥에 납작 조아렸다.
‘이삼평이라. 공주 출신. 그렇다면. 이자가 일본 도자기의 신이라고 추앙받는 이삼평의 애비라는 것인가?’
이삼평!
제법 역사공부를 잘했던 이균도 이삼평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충청도 공주 출신의 도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사가번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의해 납치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후, 일본에 귀화하여 심수관 가문과 함께 일본 도자기의 기반을 만든 인물로 일본에서는 심수관 가문과 함께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이삼평은 일본 이즈미야마에서 처음 고령토를 발견하여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고온에서 고령토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로 당시로서는 중국, 조선 등 일부 국가에서만 실현할 수 있는 고도의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이삼평이 고품질의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이후, 일본 아리타는 도자기의 성지가 되었고, 명․청 교체기에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지 못한 것을 틈타 일본 아리타 지역 도자기는 유럽에 수출되어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그로 인해 일본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득했다.
조선이 도공을 천한 직업으로 홀대하고 있는 사이, 왜놈들은 도자기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 도공을 납치해 고품질의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이후 일본 특유의 섬세하고 화려한 채색기술을 더 해 일본만의 독특한 도자기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를 유럽 전역에 수출해 엄청난 부를 창출시켰다.
일본의 도자기 수출로 인한 자본축적은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 되었다.
임진왜란의 또 다른 명칭이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가 이삼평의 애비라니 놀랍구나.
일본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삼평 일가를 이균이 만난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흐음. 그렇구나! 그래. 조선의 도자기 실력이 명나라에 비해서 어떠한 수준이더냐?”
이균은 시치미를 떼고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전······.전하! 명나라가 만드는 도자기는 대부분 청화백자이온데, 우리 조선도 능히 명나라를 능가하는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이준기는 전 세계에 도자기를 수출하는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비견해 조선의 도자기도 뒤질 것이 없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전하!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회회청이 필요한데, 조선에서는 회회청이 나지 않아 이를 명나라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워낙 가격이 비싸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회회청!
청화백자의 푸른색 빛깔을 내는 청색안료로 코발트를 말한다.
유럽이 열광하는 도자기는 모두 푸른빛을 내는 코발트를 안료로 쓰는 청화백자였다.
따라서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청화백자를 만들어야 했는데, 불행히도 조선은 코발트가 나지 않고 있었다.
‘코발트가 없다!’
도공 이준기의 말을 듣고 이준기는 고민에 빠졌다.
도자기의 구체적인 재료를 알지 못한 이균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청화백자를 많이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그······.그렇사옵니다. 회회청만 있으면 명나라의 경덕진에서 만들어지는 청화백자와 뒤질 것이 없는 청화백자를 만들 수 있사옵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되며 청자의 시대가 끝나고 백자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코발트를 안료로 삼은 청화백자를 만들어 냈고, 코발트를 안료로 동양적인 회화를 도자기에 수놓아 고급스러운 중국 청화백자는 유럽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팔며 나갔다.
이러한 시대의 기류에 편승에 조선도 고급진 명나라의 청화백자를 원했고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의 사절단을 통해 청화백자를 대부분 공급받았는데, 워낙 귀한 청화백자는 왕실이나 고관대작의 사치품으로 일반 백성은 구경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중국 청화백자의 수요는 왕실을 넘어 돈을 꽤 만지는 사대부들도 신분 과시용으로 원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절단만으로 청화백자를 구할 수 없자 국법이 밀무역을 엄격히 금하고 있음에도 밀무역을 통해 청화백자의 수요를 충당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도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청화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송나라 청자를 능가하는 고려청자를 만든 손재주 하나만은 타고난 민족의 나라가 아니던가!
조선 도공들은 뛰어난 손재주로 청화백자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명나라 경덕진에서 만들어내는 중국 황실의 청화백자와 버금가는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특히 청화로 수놓은 회화 실력은 명나라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명나라를 통해 들여오는 코발트 가격이 워낙 비싸 많은 청화백자를 만들 수 없었고, 청화백자는 여전히 왕실과 사대부의 사치품에 불과했다.
‘생산가가 그렇게 높으면 중국 청화백자와 경쟁이 되지 못하는데······.’
이균은 얼굴은 곧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