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20화 (220/222)

220

선택(完)

아드리아 왕국의 수도 아스크라. 한때는 그 누구보다도 정의로웠으며 누구보다도 인자했던 지배자. 사자왕 에드워드가 거주하던 번성했던 도시. 하지만 왕의 타락과 함께 들이닥친 폭풍으로 인해 도시는 현재 불안과 혼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진정한 왕을 옹립하자!

-더러운 늙은이를 몰아내라!

바깥에서는 탐욕에 눈이 먼 귀족들의 군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안쪽에서는 아사자들, 질병에 걸려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두터운 성벽 아래에 있는 거리에는 시체들이 가득했으니까. 뿐만 아니라 광장에는 억울하게 목 매달린 망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시민들은 도망치거나 침묵했고, 귀족들은 아첨을 일삼았다. 한때 지상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의 하나는 현재 고통과 비명만이 가득한 인세의 지옥이 되어있었다.

그런 도시의 중심. 드높은 왕성 안에 있는 왕좌 위에는 삐쩍 골은 노인이 한 명 앉아있었다. 주변을 밝히는 불 또한 양초 몇 개가 전부였기에 그는 마치 어둠 속에 파묻힌 괴인 같았다.

“놈이··· 놈이 온다. 놈이···”

노인의 모습은 처참했다. 눈은 초점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으며, 이빨도 몇 개 빠져있었다. 게다가 몸에 두른 비단옷과 왕관은 그에게 너무도 커서,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듯 보였다.

그.

한때는 북부 관문의 수호자로 이름 날리며, 하이랜드에서 내려오던 야만인들을 도살하던 위대한 군주. 여명 기사단의 단장이자 척박한 대지의 변경백. 이제는 주인 잃은 왕관을 탈취하고 새로운 지배자로 자신을 옹립하려 하는 자. 게오르그 공작이 쉴 틈 없이 입을 놀렸다.

“놈을··· 놈을 죽여야 한다. 놈이 내 침실로 숨어들기 전에... 내 목에 단검을 꽂기 전에 어서···”

“폐하. 지금은 그자에 대해서 신경 쓸 때가 아니옵니다.

기사단의 부관. 가란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게오르그는 광인처럼 중얼거리다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그 무슨 말이지?”

“부디 상황을 직시하십시오. 시민들의 원망은 나날이 커져만 가고 있고, 애써 흩트려 놓았던 남부와 서부 북부의 군벌들이 다시 결집하고 있사옵니다. 대책을 마련해야 하옵니다.”

“그깟 놈들이 모인다 한들. 별문제는 되지 않는다. 짐에게는 아직 드높은 성벽이 있고, 중앙 수비군과 귀족들이 있으며 교회가 있지 않나.”

가란은 고개를 저었다.

“전란이 너무 길었사옵니다. 게다가 손속이 너무 과하셨사옵니다. 귀족, 교회 심지어 한낱 경비들조차 딴마음을 품고 있사옵니다.”

게오르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의 얼굴 한쪽에는 미쳐 지우지 못한 화상자국이 남아있었다.

“배신자들이로군. 놈들의 명단을 가지고 오라. 전부 다 목을 매달아야겠다.”

“폐하! 그렇다면 상황은 더욱더 악화 될 것이옵니다. 제 말은 놈을 암살하기 위해 병력과 심력을 쓰시는 것보다 주변을 더 둘러보시라는···”

“가라아아아안! 지금 네놈이 짐의 목숨을 종잇장으로 보는 것이냐?”

왕좌를 쿵 친 게오르그가 갑작스레 소리 질렀다. 가란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그렇다면 대체 왜! 짐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놈은 언제든 짐의 처소에 잠입할 수 있다! 놈은 언제든 짐을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놈은 그놈이란 말이야!”

“그러니 더더욱 주변 군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놈을 견제해야 하지 않겠···”

“시끄럽다! 네놈은 어서 그 녀석의 목을 벨 수 있는 전사들을 짐 앞에 대령하라! 황금이든 보석이든 여자든! 무엇이든지 준다고 전해!”

냉철했으나 현명했던 눈동자는 어둠에 가려졌으며, 왕좌는 그의 육체를 진득하게 붙들어 쇠약하게 만들었다. 비단 벨로크에 대한 공포심뿐만이 아닌, 정통성 없는 왕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게오르그를 극한까지 내몰았다.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주군은 이 자리에 없다. 가란은 한참이나 고개 숙인 채,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대전을 빠져나갔다.

“쯧. 저런 놈도 부관이라니··· 다른 녀석을 써야 하나.”

한때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기사를 박대한 게오르그는 슬쩍 허리를 숙였다. 왕좌 옆으로 굴러다니는 독주 한 병이 그의 손에 잡혔다. 그는 잔도 없이 독주를 들이켰다. 술을 입에 대는 이 순간만큼은 머리를 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대전에 켜져 있던 촛불들이 꺼져나갔다.

“뭐야?”

게오르그는 붉어진 얼굴로 거기 누구 없느냐! 소리쳤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분명 친위기사들과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녀석에게 복수하고 싶나?]

귓가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게오르그는 술이 확 깼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는 어둠을 꿰뚫어 볼 수도 없었으며, 영혼을 살필 수 있는 눈도 없었다.

“누, 누구냐. 대체 누구···”

[그 기사 놈에게 복수하고 싶냐고 물었다.]

“기사? 벨로크? 벨로크 하이네를 말하는 건가? 그, 그 씹어먹을 새끼에게···”

얼마나 흥분했는지 게오르그는 턱을 부르르 떨다가 술병을 떨궜다. 이윽고 왕좌에서도 굴러떨어졌다.

[이거 생각보다 더 엉망인 놈이군. 아니,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나?]

쓰러진 게오르그의 망막 위로 누군가의 흐릿한 모습이 비춰졌다. 눈동자에 검은 불꽃을 이글거리는 사내였다. 그는 게오르그에게 손을 뻗었다. 망가진 왕은 그 사악한 의지를 거부할 수 없었다.

“억, 억어억!”

뿌드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노인네의 육신이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요사스러운 빛 역시 번쩍거렸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더이상 게오르그라는 인물은 없었다.

빛도 빨아들이는 시커먼 흑갑주에 얼굴조차 다 가리는 투구를 둘러쓴 흑기사가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와이자로 갈라진 투구 속에서 두 개의 광망이 번뜩였다.

“폐하. 하이넥 대주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문을 연 친위기사가 흠칫했다. 옥좌 위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흑기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 네놈은 누구···”

그가 검집에 손을 올리기도 전. 격통이 느껴졌다.

“컥.”

울컥 피를 토한 그가 시선을 내렸다. 구불거리는 칼날에 보라색 몸체. 살아있는 듯 눈동자를 번뜩거리는 칼 하나가 자신의 배를 꿰뚫고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흑기사의 갑옷에 새겨져 있던 다섯 개의 문양들이 탁하게 빛났다.

타락, 분노, 광기, 거짓, 공포.

대악마들의 표식은 어둠의 마력을 여과 없이 퍼트렸다. 하튼이라는 기사의 피부는 급속도로 썩어들어갔다. 이윽고 시커먼 빛이 폭발했다.

[일어나라. 나의 종복이여.]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하튼의 모습은 조금 전과 달랐다. 새하얀 갑주는 꺼멓게 물들어 있었고, 눈동자에서는 차가운 한기를 흩뿌렸다. 투구 속에 있던 살점 썩어들어가 백골들 드러내고 있었다.

키아아아악!

소리친 그가 대전을 박차고 나갔다.

“주, 죽음의 기사! 광명··· 컥.”

문을 열고 튀어나온 언데드를 본 하이넥이 다급히 기도문을 외웠다. 하지만 흑기사의 마검이 그를 꿰뚫는 것이 더 빨랐다. 곧 교회의 영광과 일신의 보양을 위해 다분히 세속적인 행동을 취하던, 타락 사제라고 손가락질받던 하이넥은 정말로 타락한 악의 종자가 되었다. 그들은 곧 역병처럼 퍼져나갔고, 왕성의 모두를 망자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수도 아스크라의 수 만 명 시민들. 수천의 수도 방위군들. 중앙 귀족들 역시 산자의 살점을 탐하기만 하는 맹목적인 악귀가 되었다. 이제 도시는 혼란과 불안이 감도는 곳이 아닌, 마귀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키아아아악!

그르렁 거리는 숨소리. 번뜩거리는 파도처럼 물결치는 붉은 광망들. 흑기사는 그런 악귀들을 내려다보며 참으로 인간적인 말을 내뱉었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나는... 나는 돌아갈 것이다. 부모님.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 곳으로.]

그, 이제는 다섯 대악마의 마력을 하나로 합친, 또 다른 어둠의 사도. 마왕이 되어버린 추락한 신은 마검을 왕좌에 꽂았다. 이윽고 특정한 높낮이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도시를 중심으로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또한 대기가 쿠르르 떨리며 얼굴 위로 와닿는 바람들이 강해졌다.

“저, 저건 대체···”

막 성벽을 뛰어넘기 위해 사다리를 대던 병사 하나가 기겁했다. 그가 본 것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주변에서 즐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군대가 당황하든 말든, 부유섬은 사시사철 만년설이 쌓여있는 북쪽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땅으로 향했다. 마치 그곳이라면 이 모든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듯이. 그를 기다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

이 세상의 끝이 도래하였다.

우리의 말을 받들라. 맹세의 검을 뽑고 얼어붙은 땅으로 집결하라. 추락한 천사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그대들에게 미래는 없음이라.

어느 날 신의 목소리가 지상에 닿았다. 한날한시. 모든 지성 종족들의 귓가로 말이다. 땅에 사는 것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침묵하고 있던 천상이 다시금 그 빛을 되찾았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판도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서로 자기들끼리 반목하던 군주들, 제 뱃속을 채우기 위해 세속적인 것만을 탐하던 교회들, 어딘가의 왕, 숲에 사는 요정, 대장간의 난쟁이, 깊은 바위 골짜기에 사는 거인과 용, 길거리의 부랑자까지.

그들 모두가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성전의 시작이었다. 신이 실존하는 세상. 수만 년 동안 쌓여온 신앙의 힘이라는 것은 실로 굉장했다.

“보다 더 나은 죽음을! 우리들에게 레테를 강을 건널 수 있는 용기를! 올-비 샤트라!”

“올-비 샤트라!”

시커먼 피부에 터번을 둘러쓴 아리안인들이 휘어진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들의 앞에는 이번에 새롭게 왕위에 올랐다는 젊은 왕자, 각 지역의 대군주 등. 힘깨나 쓴다는 놈들 모두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중에는 벨로크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하수도에서 마녀와 데몬이 암약하고 있던 도시의 주인. 그에게 수많은 금은보화를 줬던 남자. 알타니스의 영주.

“오.”

그는 마치 지인이 출세해서 기쁘다는 듯. 벨로크를 보며 씨익 눈인사를 해왔다. 그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가 주었던 금은보화가 어디로 갔는지나 궁금했던 벨로크는 고개를 돌렸다.

“위대한 광명자의 뜻을 받들어 우리는 기꺼이 이 거룩한 성전에 참여하리라!”

그곳에는 십자가 박힌 깃발을 드높게 치켜든 백의 군대가 있었다. 사라진 대의회 대신 성자라고 추앙받던 가우덴시아가 열성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옆에는 아델이 서 있었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자. 지상에 헌신한 그 분 분신이자 대리인. 성녀.

“흠, 흠흠.”

아델은 자신이 이 군대의 지휘관이라는 게 부끄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설마하니 그 분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이봐요. 지금 내 말 듣고 있어요?”

벨로크는 자신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누군가를 다시 바라봤다. 휘황찬란한 요정식 갑주에 지팡이를 든 뾰족귀 하나가 보였다. 몰아치는 폭풍 부족의 장로 에밀. 이제는 요정 왕국의 왕이 된 여인.

거참,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옷이 날개로군.

그녀 또한 인간들과 전쟁을 하기 위해 모아둔 군자금으로 치장한 황금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에밀의 옆에 있던 친위대장은 대열을 맞추라며 고레고레 소리 질렀다.

“그만큼 급박하단 거겠지.”

“약혼자여. 출진 준비가 끝났다.”

그가 에밀과 대화를 나누던 그때. 누군가가 말 머리를 돌려 다가왔다. 투구 속에서 반짝이는 푸른 머리칼. 남부군의 총사령관이자 이제는 북부, 동부, 서부의 군벌들의 우두머리. 대군주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목에 유리병 하나를 걸고 있었는데. 벨로크가 그녀에게 먹였던 엘릭서를 목걸이로 만든 것이었다. 데비안은 그녀의 옆에 딱 붙어 방패처럼 그녀를 수호하고 있었다.

“알겠소.”

벨로크는 죽음에서 돌아온 제 연인을 바라보다가 뒤를 바라봤다. 그의 뒤편에도 역시 군대가 있었다. 각자의 명분과 일신상의 출세를 위해 싸우던 이기적인 칼잡이들. 하지만 이제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 칼끝을 돌린 자들. 아드리아 왕국군.

내가 이런 감투를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역시 사람 일이란 건 모른다니까.

벨로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크게 소리쳤다.

“전-군 출-진 하라!”

쿵-쿵-쿵

그의 목소리 만큼이나 거대한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아드리아 왕국군이 움직이자 미리 신호 받은 아리안과 신성왕국, 요정들의 군대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단의 여기저기에는 도끼를 어깨에 걸친 난쟁이들이 땅딸막한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그들은 헉헉 숨을 내쉬기는 했어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뒤편에서는 거대한 통나무를 가볍게 잡은 채, 콧김을 뿜어내는 거인들 역시 쿵쿵 걸음을 옮겼다. 뿐만 아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번뜩이는 파충류의 눈과 피막 날개.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의 포식자. 용들이었다. 제일 선두에 있는 초록색 비늘을 가진 용의 위에는 요정 세 명이 앉아있었다.

엘가르와 두 수호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서는 로브 쓴 자들이 부유주문을 외우며 따라붙고 있었는데. 선두는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이렇듯 종족도 특징도 다양하지만 명분만은 똑같은 세 군단은 그렇게 한참을 나아갔다. 이윽고 말에서 내려 대설산에 발걸음을 내딛었는데. 선객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는 기이한 문신, 목에 걸린 뼈 목걸이. 맨몸에 짐승 가죽을 걸친 일단의 야만인 무리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Frater. 왔는가?”

얼마 남지 않은 북부 야만인들의 우두머리. 리쿠가 입을 열었다. 옆에는 대주술사가 된 아피아가 슬쩍 묵례를 해 보였다. 리쿠는 벨로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제 부족원들을 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

마침내 악에 물든 고향을 되찾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지리에 익숙한 야만인들은 곧 손에 들린 전투 도끼를 꾹 쥔 채, 네 군단의 선봉에 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십만은 가뿐히 넘는 대군세가 눈 덮인 땅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 목적은 분명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파괴행위에 있었지만, 어찌 됐든 압도적인 광경인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만으로도 안개가 낄 지경이었으니까. 그 순간. 대기가 쿠르르 울리며 눈 쌓인 가지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산을 오르는 군단의 맞은편. 대설산의 끄트머리에서는 새카만 파도가 몰아닥치고 있었다.

키아아아악!

타락한 신의 사악한 주문에 의해 뒤틀린 존재들. 한때는 왕국의 신민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저주받은 부랑자가 되어버린 괴물들. 그 잠깐 사이에 역병처럼 불어난 악귀들의 해일이 산자들의 살점과 피를 탐하기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

군단의 선봉장이자 지휘관들은 요란하게 소리치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르릉. 그저 등에 매어둔 칼 한자루를 꺼내 들었을 뿐이다.

“형씨. 그걸로 저 녀석들을 다 베어 죽일 수 있겠어? 그 전에 부러질 거 같은데.”

그의 옆에서 머스킷을 들어 올리던 바트릭이 핀잔을 주었다. 그는 결국 보물을 찾지 못하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결국 한 몫 단단히 잡기 위해 이번 전쟁에 참여했다. 끝까지 그다운 모습이었다.

벨로크는 다시 돌아온 제 분신. 바트릭이 수리해준 대검을 들어 보이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깃털처럼 가볍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묵직했다. 힘을 잃은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아직 이 땅에서 쌓아온 수많은 경험들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최강의 기사였다. 또한···

“부러지면 뭐, 옆 사람한테 맡기면 그만이지.”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투쾅. 바트릭은 머스킷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며 수염을 매만졌다.

“흐흐. 뭐야? 언제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했으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소.”

피식 웃은 벨로크가 대검을 휘둘렀다. 빛이 번뜩이고 망자들 수십이 일시에 조각났다. 곧 그를 시작으로 네 군단은 자신들의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거대한 악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무식한 대검을 든 검은 머리칼의 전사. 그와 똑같은 머리색의 불꽃의 성기사, 용을 부리며 주문을 외우는 붉은 머리의 마법사, 사악한 마력을 폭풍처럼 쏟아내며 악마들을 도살하는 악마. 깃발을 높이 치켜올리며 전장을 지휘하는 지배자. 동방의 신비로운 비전을 여과 없이 뿜어내며 맨손으로 악귀들의 골통을 깨부수는 무투가가 있었다

“사악한 마귀를 몰아내자-아!”

“물러서지 마-!”

“Occidere!”

그 밖에도 그가 지금껏 이 땅에서 쌓아온 인연들. 그를 위해서 기꺼이 칼을 뽑아들 수 있는 친구들. 혹은 제 나름의 목적을 위해 들러붙은 얄팍한 인연들까지. 벨로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힘들다면 주변 사람에게 맡겨둔 채, 잠깐 물러나도 된다. 아니면 친구들과 어깨를 맞댄 채, 함께 싸워나가면 그만이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이 세상을 수없이 방랑하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방랑자가 내린 깨달음.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에게는 퍽 낯설었던 생각들. 더 이상 고향 잃은 이방인이 아닌, 이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내린 자신만의 결말.

그들 모두가 이 세상의 운명이 걸고 싸워나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가 흘렀다. 설산이 붉게 물들고, 그 시체를 도저히 다 묻을 수 없을 만큼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국 인류는 승리했고, 마왕은 패퇴했다.

#

모든 것이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 성채 안. 주변이 크리스탈처럼 반짝거리는 대전 안에서 기사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뿜어낸 입김이 스르르 형태를 뒤바꾸다가 이내 그 형체마저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내렸다. 조각난 왕좌 위에는 반토막 난 대검이 한 자루 박혀있었다. 그 옆에는 흑기사가 무릎 꿇은 채, 울컥 피를 토하고 있었다.

“결국 부숴 먹었군.”

손을 툭툭 턴 벨로크는 흑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래에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옥의 불꽃처럼 보이던 광망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창백한 표정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는, 다 죽어가는 청년 한 명이 왕좌에 몸을 기댄 채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크흐흐. 이제는 상대할 가치도 없단 건가?”

벨로크는 동향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진작에 네 머리를 박살 냈을 거다. 난 옛날부터 그랬거든.”

뭐가 웃긴 지 이방인 신은 컥컥거리며 웃었다. 그럴수록 그의 낯빛은 창백해졌다. 시야는 흐린지 눈 역시 심연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묻은 검은피를 닦지도 못한 채, 말했다.

“네놈 나름의··· 배려라는 거냐? 너의 모든 것을 뺏으려고 했던, 너를 이 끔찍한 세상으로 불러온 나를 지금 용서하는 건가?”

“그런 거창한 말은 집어치우지. 그렇다기에는 네가 지금껏 저질러온 개짓거리들은 도가 지나쳤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질문 말고, 좀 더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때? 너는 이제 곧··· 벨로크는 그렇게 말하려다 그냥 뚜벅뚜벅 걸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윽고 허리춤의 병 하나를 꺼내 그의 입에 물렸다. 차가운 독주였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이것이 승자의 여유에서 오는 오만함인지. 아니면 망자의 넋두리를 들어줘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에서 온 폐해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툭. 데구르르. 벨로크가 흑기사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하던 그 순간. 술병이 바닥을 구르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추락한 신. 아니,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한 청년은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숨이 끊긴 것이다. 덕분에 그는 벨로크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이 세상이 내 생각보다는 더 살만해서 그런 건지.”

자신과 같은 세상을 공유했던 동향인. 하지만 같은 미래는 그리지 못했던 존재가 사라졌다. 벨로크는 한동안 놈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황혼에 접어든 태양빛은 반파된 얼음궁전을 따사로이, 또한 찬란하게 비추며, 이를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전의 테라스에 앉은 채, 석양을 바라보던 동료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 모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또한 제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꾸해주며 그들의 옆으로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나란히 어깨를 맞댔다. 아래에서는 냉기가 올라오고, 맞닿은 것은 갑옷이었다. 온기라고는 위에서 떨어지는 미약한 빛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따스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벨로크. 나의 계약자야. 이로써 너와 나를 사로잡고 있던 그 모든 악연들이 끝났구나. 참으로 고생 많았도다. 나는 네가 해낼 줄 믿고 있었단다.]

그런 벨로크의 귓가로 노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한테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네가 약조했던 일을 충실하게 해냈으니 나 역시도 너와의 약조를 지켜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볼 것이 있다.]

“뭔데?”

벨로크는 이자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나한테는 아직 한 줌의 신성이 남아있다. 충분치는 않아. 그렇기에 넌 선택을 해야 한다.]

그녀의 몸에서는 피비린내와 악취 대신 꽃향기만이 가득했다. 옆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거세게 잡았다. 목덜미에서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째선지 잠이 쏟아졌다. 그 사이로 노르드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첫 번째는 네가 그토록 그리워 마지않던 고향으로의 귀환이고, 두 번째는 타락한 네 애인의 몸뚱이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다. 자. 어떤 것을 선택할테냐?]

뭐야.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잖아. 왜 무게 잡고 난리야?

“나는···”

피식 웃은 벨로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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