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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19화 (21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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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나타난 것은 일단의 사람들이었다.

번쩍거리는 미스릴 갑주를 입은 장신의 사내. 새하얀 판금 갑주를 입은 여기사, 붉은 로브를 쓴 마법사, 후드를 뒤집어쓴 가녀린 체구의 누군가와 드레스를 입은 여인까지.

장례식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당장에 전쟁터에 나가야 될 것만 같은 사람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영주의 약혼자, 기사단의 단장, 고문 마법사. 나머지 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조문객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뻔뻔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염치없는 자들을 보는 얼굴에 가까웠다.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데비안이 앞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왜··· 왜! 이제서야 나타나신 겁니까!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지금에야···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지금에야··· 대체 왜에에에!”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매장되고 있던 관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철퍽. 데비안이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 붉어진 눈가, 씩씩거리는 숨결을 토해내며 벨로크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벨로크의 양팔을 힘주어 잡았다.

“분명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초월적인 무력이 있었다면··· 아가씨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그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물론 세간의 평처럼 그리 좋은 분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잔혹했으며 때로는 뱀처럼 교활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당신을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청년기사가 절규했다.

“그럴 때에 당신은 뭐 하고 있었습니까! 세상을 구한답시고 쓰러져서 잠만 잤잖아! 제 주변 사람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세상을 구한단 말이야아아아!”

벨로크가 맡은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 화린으로부터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다. 하지만 데비안은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베로니카가 죽었다. 그것도 이리도 비참하게. 그는 지금 그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였다.

벨로크는 처음과 같았다. 변명도, 사과의 말도 없었다. 데비안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결국 한참 동안 벨로크의 가슴을 툭툭 치던 그는 제풀에 지쳐 끝내 땅으로 쓰러졌다.

“···”

그의 옆에 있던 화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만지작거렸다.

“늦어서 미안하오.”

벨로크는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두 사람을 지나쳤다. 운구되고 있던 관을 향해서였다.

“부디.”

장례식을 주관하던 노사제는 벨로크를 막지 않았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손짓해 바닥에 천을 깔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게 했다. 약혼자로서 배우자가 가는 마지막 길을 확인하라는 배려인 듯싶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한 벨로크는 관을 열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눈을 감은 베로니카가 그곳에 있었다. 피부는 살구빛이었고 입술은 새빨겠다. 신체 역시 온전한 상태로 제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누워있었다.

마치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잠에 빠져든 것만 같았다.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터운 화장 아래 가려진 창백한 피부. 포션으로도 재생이 안 돼 바느질 한 신체 일부. 미세하게 올라오는 시취. 멈춰버린 심장과 밀랍처럼 굳어버린 신체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녀는 죽은 것이다.

혹여 비라도 맞을까 벨로크는 제 몸으로 관을 가린 채,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들도 떠올렸다.

자신이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연회장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 후로 이루어진 다분히 정략적인 혼담. 악마의 아래에 깔려있던 모습.

다시 로벤으로 되돌아오고, 여인이라기보다는 한 명의 전사처럼 보였던 그녀. 요정왕국으로 떠나기 전. 함께 보냈던 뜨거운 밤. 희미하게 풍겨오던 물망초 꽃의 향기.

‘이것이 두 번째인가.’

“후우.”

벨로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주변 사람이 떠나가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었다. 그는 다시금 죽음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단 것 또한 상기했다.

혹시 신성이라면, 세상의 법칙과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힘이라면 죽은 자를 소생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벨로크는 내면의 힘을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듯 공허하기만 했다. 그 빌어먹을 가짜신 을 죽이는데 모든 것을 소진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벨로크가 다급히 허리춤을 뒤졌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유리병 한 개였다. 덩굴 문양이 음각되어 있고, 안에는 보라색 액체가 가득 들어있는 어딘가 마녀의 스프 같은 느낌을 주는 꺼림칙한 물약.

죽은 사람도 살려준다는 비약. 엘릭서. 그는 포션의 병을 퉁 따고는 베로니카의 입을 벌렸다. 이윽고 조심스레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창백했던 피부의 혈색이 돌아왔다. 손상되고 찢어졌던 신체의 상처 또한 스르르 아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한 영약이라고는 하나. 멈춰버린 심장이 다시금 뛰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탱. 유리병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벨로크는 베로니카의 얼굴을 조심스레 만졌다.

“널 이대로 보내줘야 하는 건가?”

그가 차오르는 슬픔을 참고 있을 때.

“계약자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노르드가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자 카라와 아델 이자벨 또한 관을 둘러싼 채 가까이 와 있었다. 의아한 것은 그녀들의 눈동자 속에는 절망과 체념만이 아니라. 희망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카라가 관 주변으로 역장을 두르며 말했다.

“말 할 기회를 놓쳤었는데. 회색 도시에서 있었던 일. 기억해? 우리 전부 놈한테 당했었던 그때 말이야.”

잊을 리가 없지. 이곳에서는 며칠이 지났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불과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라가 말을 이었다. 꽤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때. 우리는 죽었던 게 맞아. 이자벨과 노르드는 아니었지만 나와 아델은 확실히 죽었었지. 하지만··· 부활했어.”

“부활이라고?”

“굳이 우리끼리 설명할 필요 없겠지. 나오너라.”

벨로크가 이에 대해 물으려고 할 때. 노르드가 말했다. 그 순간. 우중충했던 하늘이 걷히며 태양이 더없이 빛났다. 이윽고 그 태양이 순식간에 져버리더니 이번에는 달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 달에서 퍼져나간 어둠에 의해 주변 모든 것들의 색깔이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에 뒤덮힌 것이다.

이곳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벨로크와 노르드. 그리고 그가 그것을 인지한 순간. 주변으로 강력한 기운 세 개가 느껴졌다.

벨로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을 둘러싼 채, 환하게 빛나고 있는 물체들이 보였다. 각각 태양, 달, 뭉쳐놓은 어둠을 작게 축소시켜 놓은 것이었다. 곧 그것들은 꾸물거리며 형태를 바꾸더니 세 개의 인영이 되었다.

카라의 것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진한 마치 불처럼 타오르는 머리칼의 여인, 시리도록 차가운 은발의 요정, 마지막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검은 수염의 거인까지.

벨로크는 저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타락용을 죽이고, 차원의 틈새를 방랑할 때. 노르드를 처음 만났을 때. 마지막으로 혼돈의 존재를 죽이고 신목의 기억을 훑었을 때. 그는 저들의 은밀한 비화를 엿볼 수 있었다.

각각 태양과 달,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들. 이방인 신과 힘을 합쳐 고대신들을 무찌르고 그 업을 빼앗았던 존재들. 천상신들.

“헬레나, 셀레네, 샤트라.”

“벨로크. 위대한 전사. 이 세상의 구원자여.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갑-”

태양신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벨로크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힘을 잃었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전사였다. 여신의 얼굴이 펑 터져나갔다. 하지만 곧 그것은 샛노란 빛줄기가 되어 흩날리더니. 다시 모여들어 미려한 얼굴을 재생시켰다.

벨로크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뭔 낯짝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따지고 보면 이 사태의 모든 원흉은 저 놈들이었다. 녀석들이 먼저 제 동료를 배신했기에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 아닌가? 물론 자신이 알지 못한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 그 당시로서는 그 방법만이 최선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건 벨로크가 알 바 아니었다.

놈들은 제 의무를 져버렸으며, 그로 인해 일어난 재앙을 막지 못했다. 그저 무력하게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뒷처리를 한 것이 자신이고 말이다.

헬레나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분노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닥쳐.”

벨로크의 주먹이 오색찬란한 빛을 흩뿌렸다. 뒤편에 있던 거인이 그의 손을 턱 잡았다. 대기가 부르르 떨리며 두 사람은 힘겨루기를 했다. 거인은 벨로크의 손을 뿌리치며 혀를 찼다.

“망나니 같은 놈. 우린 너를 존중하고 있다. 너도 그에 합당한 예를 표하라.”

물론 벨로크는 다시 달려들었고, 거인은 상체를 가린 채, 이를 막아내다가 곧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크으. 이-놈이!”

샤트라의 동공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가 권능을 뿜어내려 하자 헬레나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만. 애초에 그에게,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당연해요.”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나타난 것 아닌가? 게다가 순리마저 거슬렀-큭.”

죽음의 신은 고개가 이리저리 꺾이며 신음을 토했고, 태양신은 그를 말렸다. 달의 여신이라는 요정은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 벨로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판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도저히 전지전능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들은 날 때부터 완벽했던게 아닌, 태어나기를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 왕관을 뒤집어썼기에 이럴지도 모른다.

인간 출신의 신. 그만큼 모순적인 존재들. 아니 어쩌면 이들은 신이 아니라. 그냥 특별한 능력을 지닌 생명체들일지도 모르지.

뻗어가던 벨로크의 주먹이 멈췄다. 노르드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얼핏 그녀의 가녀린 팔 주위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것은 금세 사라졌다. 노르드가 말했다.

“화는 좀 풀렸느냐?”

“아니.”

“물론 그렇겠지. 저 멍청이들이 지은 죄. 그로 인해 돌아간 수레바퀴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었으니. 하지만 넌 저들의 말을 들어야 할 게다.”

“넌 아무렇지도 않냐?”

오히려 노르드의 덤덤한 말투에 벨로크는 제 분노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저들은 노르드의 원수다. 그런데 얘는 왜 이럴···

벨로크는 노르드를 살피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이미 이글거리는 분노가 한 가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려는 듯 보였다. 힘줄 돋은 채 팔짱 낀 양팔과 쉴 틈 없이 바닥을 두드리고 있는 발이 그것을 증명했다. 무엇을 위해?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저 세 녀석들과 계약을 했단다.”

“계약?”

“일차적으로 너와 네 애인들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질기디질긴 악연의 끈을 모조리 끊어내기 위해.”

“악연이라고? 설마···?”

흠칫한 벨로크가 입을 열려던 순간. 그를 보며 미소 짓고 있던 요정. 셀레네가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구원자여.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기 누워있는 당신의 애인을 살려드리지요. 그 아이들을 살려냈던 것처럼요.”

“···!”

“부탁합니다. 샤트라.”

셀네네가 손짓하자 거인은 혀를 찼다. 하지만 곧 그는 양손으로 허공을 찢는 행동을 취해 보이더니.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끄집어낸 작은 빛 하나를 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두근. 귓가로 심장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에 있는 관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으며, 벨로크 자신의 가슴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흥분에 찬 것도 잠시. 벨로크의 머릿속이 맹렬히 돌아갔다.

조각난 아델과 불타죽은 카라. 격전이 끝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되돌아온 그녀들.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리던 이자벨. 분명 격류에 휩쓸렸건만 역시나 탑 위에 누워있던 자신. 누군가의 조력. 죽음을 상징하는 거인신.

“그렇게 된 거였나.”

그의 생각이 맞다는 듯 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이방인을 물리친 순간. 우리들을 속박하고 있던 금제가 깨졌습니다. 이건 그에 대한 보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들은 당신과 당신 친구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벨로크는 요정의 저 예쁘장한 입술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상식을 초월하는 감각도, 이에서 비롯된 예지에 가까운 육감도 없었지만, 어째선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맞다는 듯. 세 명의 신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놈은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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