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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18화 (21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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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투

“후우, 후우. 후우···”

화린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디디고 있는 첨탑의 천장 아래로 악마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려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여전히 탑을 기어오르며, 동족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이빨을 들이대고 있었다. 하늘 위에는 녀석들의 우두머리가 허공에 누운 채,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기이한 힘을 쓰는 인간아. 그 안에 있는 녀석들이 그리도 소중하더냐? 제 목숨마저 내던질 만큼.”

그녀. 거짓의 대악마로 불리다가 종래에는 공포를 집어삼키고, 새로운 이름과 위명을 가지게 된 존재가 입을 열었다. 화린은 움찔 몸을 떨었다. 저 목소리에는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내부를 요동치게 만들어 집중력을 흩트려 놓았으니까.

크아아아악!

거기다가 아래편에서 덤벼드는 악귀까지. 화린은 다시금 기운을 끌어모으며 팔을 내질렀다. 뻗어나간 나찰의 손바닥이 녀석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 순간.

“아가씨이이이이!”

첨탑 안에서 울려 퍼지는 한 사내의 절규에 화린이 흠칫했다. 지금의 암울한 상황을 비추어 생각해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하지만 곧 눈앞에서 쏟아지는 악의의 폭풍이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악마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칼날들. 초승달 모양의 부메랑 수 천 개가 자신의 목을 노리며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합장을 한 그녀가 다급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뒤편에 서려 있던 환영. 흉흉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석상의 팔이 좌르륵 펼쳐졌다.

“흡.”

그녀의 의지에 따라 석상의 팔 수십 개가 앞으로 뻗어나갔다. 곧 미친 듯이 몰아치는 주먹의 파도가 마력탄들을 격추시켰다. 공기가 쿠르르 울리고, 첨탑이 비명을 질렀다. 동방의 비전과 지하의 마력이 격돌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보름달 아래에서 부채처럼 퍼져나가는 빛무리들. 그것들 하나하나가 사람 정도는 가볍게 찢어버릴 수준의 폭행이라 할지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주문도 성력도 아닌 제 삼 세계의 힘. 마력도 부숴버리는 실체를 가진 환영. 정말이지 놀랍군. 이런 인간이 아직도 왕국 내에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존재는 여전히 허공을 부유하는 상태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퍽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에게는 아직도 수천의 군세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저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었고, 펄떡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인간은 강하다. 하지만 동시에 연약하다. 언제고 지친다. 혹은 아주 작은 틈 하나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교활한 악마는 금방 그 빈틈을 찾아냈다. 녀석이 끈적하게 속삭였다.

“저기 네 친구 말이야. 이대로 둬도 괜찮겠어?”

화린은 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비전을 운용하는 것, 떨어지는 저 마력의 폭우를 막아내는 것도 벅찼다. 그녀가 뚫리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는 거다. 벨로크와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겠지. 게다가 사특한 꾀임은 악마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화린은 억지로 마음을 다 잡으려고 했다.

“배가 갈라져 내장을 쏟아내고, 팔다리는 뜯어먹혀 그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단다. 남은 친구들 역시 곧 그렇게 되겠지.”

안대 너머로 사특한 붉은빛이 떠올랐다. 이와 눈을 마주한 화린은 곧 베로니카의 끔찍한 죽음, 그녀를 끌어안은 채, 울부짖는 데비안. 깨어진 방진 사이로 몰아치는 악마들의 파도를 볼 수 있었다.

“큽.”

화린의 집중력이 깨졌다. 곧 그것은 나찰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녀는 순식간에 초승달 모양의 마력탄에 온몸이 난자되었다.

키아아악!

설상가상 그 틈새를 노리고 악귀들이 손을 뻗어왔다.

“끄으읍.”

화린은 헐떡이던 호흡을 조절하며 돌아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움직였다. 너덜너덜해진 팔의 움직임에 따라 나찰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첨탑을 기어오르던 악귀병들이 우르르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대악마의 오른팔이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며 쏘아져 왔다. 몸통보다도 더 크고, 표면에는 가시와 인간들의 얼굴들이 수 없이 틀어박혀 이빨을 딱딱거리고 있었다.

“꺽.”

화린은 그 살덩이에 파묻혀 첨탑 안으로 처박혔다. 다행히 재빨리 또 다른 비전. 금강불괴를 운용했기에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격은 타격이었다. 지금도 육체는 피 흘리며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내공은 떨어져만 갔으니까.

“끄으으···”

멍하다. 어지럽다. 그저 쓰러져서 한숨 자고 싶었다. 약해진 마음과 후두둑 떨어지는 벽돌 너머로 본 것은 다 죽어가는 두 친위기사. 베로니카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마치 악귀 같은 얼굴로 악귀들을 도살하는 데비안, 카라가 설치한 보호막 위로 몸을 날리는 괴물들이었다.

“아, 아아···”

정말 그 녀석의 말 대로였다. 그 잠깐 사이에 이런 일이··· 내가,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큰 타격을 받은 정신과는 별개로 화린의 단련된 육신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주먹을 뻗어 이리처럼 달려드는 임프의 머리를 박살 내고, 다시금 파동을 쏘아내 그 뒤편에 있던 악귀병들을 짓뭉갰다.

떨어지는 불의 채찍을 간발을 차로 피해내고, 흑철로 만들어진 부츠를 뻗어 악마의 턱을 후려치기도 했다. 스르릉. 뻗어나간 숨겨진 암기가 놈의 뇌를 휘젓고, 다시 지옥으로 되돌려 보냈다. 하지만 놈들을 아무리 학살해도 죽어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체력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허억, 허억. 허억···”

악귀들이 이제 씨가 마른 것일까? 첨탑 안에는 더 이상 전장의 소음이 아닌,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 사내의 절규 또한 섞여들었다.

“아가씨이이이···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이렇게 비참하게···”

데비안은 더 이상 얼음장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를 주군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옛날에 야단맞던 것처럼 꿋꿋하게 아가씨라고 목놓아 울부짖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답이 없었다. 그저 온몸이 뜯어먹힌 채, 평온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또한 가슴이 울렁거렸다. 화린이 입을 열려던 그 순간.

“거기에 있었구나? 그분의 제물.”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달린 슬라임에게 전투망치를 휘두르던 마일즈. 뒤통수에 인간의 얼굴이 달린 장수풍뎅이에게 마지막 남은 단검을 쏘아낸 카멜까지. 친위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기겁했다.

수십 미터 넘어가는 덩치의 나체와 눈을 가린 안대. 밖으로 돌출된 심장과 뇌를 가진 기괴한 행색의 여인을 본다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일 터였다. 흉물은 젖가슴을 찰랑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알맞게 잘 익었군. 원래라면 좀 더 가지고 놀며 너희들에게 절망을 선사해주고 싶다만···”

대악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도 자신의 머릿속으로 범접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빨리! 육체를 손에 넣어라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 목숨을 위해서. 다른 권좌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녀가 팔을 뻗었다.

촤르르륵. 그러자 예의 그 비대해진 팔이 촉수처럼 흐늘거렸다. 으르르. 어둠 속에 숨어있던 악귀들 또한 밖으로 튀어나왔다.

녀석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숨을 죽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치 몰이사냥을 하는 짐승이 한꺼번에 달려들 듯 말이다.

“자, 그럼. 이만 끝내지. 순리대로 이 거짓된 세상은 불타오를 것이고, 그분의 발아래에 모든 것이 재정립되리라. 그리고 난 저 하늘의 찬란한 별로서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겠지.”

악마의 팔이 쏘아져 왔다. 주변에서는 마력탄 역시 날아왔고,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던 악귀들 역시 거리낌 없이 제 몸을 날렸다. 날아드는 손톱, 혓바닥, 팔에 달린 가시. 이빨을 쩝쩝거리는 희생자들의 절규. 그 모든 악의의 파도가 화린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 순간. 화린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투신나찰을 운용하며 그것들을 튕겨내지도 않았고, 몸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제 몸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그냥 멍해진 눈동자로 자신을 찢어발기려는 송곳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화린이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내린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뇌의 사고가 행동을 정지하고, 어떤 무의식의 영역으로 그녀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화린이 그렇게 된 이유는 다양했다.

규격 외의 전사. 벨로크와 이어진 한 달간의 대련. 요 몇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 수련으로 뼈대를 세우고, 실전으로 살을 덧댄. 그녀가 쌓아 올린 경지. 마지막으로··· 악마에게 뜯어먹히는 순간까지도 벨로크를 감싸며 미소 지은 베로니카의 모습.

화린 정도 되는 고수라면 수없이 많은 시간의 수련보다 한 번의 깨달음이 더 중요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희생적인 정신은 화린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고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처럼. 하지만 아래에는 맹렬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

극한까지 당겨진 감각들과 깨달음에 화린을 제외한 주변의 시간들이 느려졌다.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보이는 세상.

그 작은 세상 속에서 화린은 자세를 잡았다.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오른발은 뒤로 왼발은 앞으로. 단단히 몸의 중심을 잡았다. 동시에 주먹진 오른손은 허리에 붙이고, 왼손은 앞으로 내밀었다.

“후우우.”

느려진 세상 속에서도 느리게 움직일 정도로. 화린은 마치 거북이가 기어가듯 주먹을 뻗었다. 수천, 수 만 번을 넘어. 수십 만 번을 휘둘러온 자신의 무기.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흐르고, 그 위에 딱지가 굳고 굳은살이 배긴 것만 수천 번인 나의 증명.

무도.

지금까지의 자신을 만들어준, 그리고 자신이 쌓아 올린 하나의 세상. 마침내 화린의 주먹이 끝까지 뻗어나갔을 때. 가슴속의 무언가가 뻥 터져나갔다. 울컥. 화린은 코와 입으로 피를 토했다. 하지만 내부는 더없이 상쾌했다.

“이게··· 무슨?”

한 순간에 자신의 팔이 사라지자 거짓과 공포의 악마가 당황했다. 하지만 곧 놈은 갈라진 팔의 단면에서 방금전과 같은 살덩이 수십 개를 뿜어냈다. 돋아난 얼굴들에서는 마련탄들이 폭우처럼 뿜어져 나왔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고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화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후우우.”

그저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또 주먹을 뻗었다. 그 모든 자세가 초 단위가 되지 않았다. 악마의 눈으로도 보기 힘든 속도로 주먹이 뻗어나갔다. 살랑. 폐허가 된 성 너머로 어울리지 않게 바람이 불었다. 곧 그것은 악마의 모든 공격을 무로 만들어버렸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악마는 안대 뒤에 숨겨둔 눈동자를 파르르 떨다가. 다급히 네 쌍의 검은 날개를 펼쳤다. 그녀는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이기도 했다. 도망칠 속셈이었다. 화린은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악마를 주시했다.

“이제 더는 안 돼.”

화린을 중심으로 샛노란 광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일순 모든 악귀들의 눈이 멀었다. 오직 대악마만이 그 파괴적인 힘의 파동을 오롯이 직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칠 미래도.

“───────!”

절규하는 악마를 향해 무도가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곧 그녀를 중심으로 터져나간 빛의 파동이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댕-댕-댕

루텐버그에서는 때아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 관리되어 있던 도로는 엉망이었고, 곳곳에는 타락한 자들의 시체들이 넘쳐났다.

집과 가족을 잃고 울부짖던 사람들, 지난날의 악몽에 괴로워하는 자들.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목소리까지. 깊고도 깊은 상흔이 도시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그곳을 가로질렀다. 검은 양복, 검은 드레스와 검은 베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또각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곧 그들의 귓가로 종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태양과 달이 형상화 되어있는 조각상들의 중앙.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붉은 융단이 그들을 반겼다.

“···”

그들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떨어지는 빛을 알록달록하게 투과하는 색 유리창 아래. 그것이 있었다.

새하얀 국화꽃에 둘러싸인 새카만 관 하나. 그 뒤편에는 경건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수염이 성성한 노사제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놓인 의자에서 일어난 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조문객들이 있었다.

노사제는 뒤늦게 입장한 조문객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하던 일을 계속했다.

“로벤, 베이츠, 칸티오. 루벤터그를 아우르던 지배자. 스물 일곱 깃발의 기수이자 보호자. 맹약 기사단의 주인. 자유 해방군의 감찰관. 모든 신민들의 자유와 질서,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신 우리의 방패. 베로니카 로벤.”

주름 가득한 손에 들린 작은 종이 양옆으로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옆에 있던 수행 사제들은 고개를 깊이 숙였고, 노사제는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이제 그분을 놓아주려 한다. 비록 육신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만 고결한 영혼만은 하늘에 닿아 천상신들의 비호를 받으리라.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되리라. 우리들의 발아래에는 언제나 그분의 헌신이···”

노사제는 성호를 그으며 그녀의 찬란했던 업적, 위업, 사소하게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까지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그녀의 영혼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 차가운 죽음에서 해방되어 쓸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행위로 보였다.

“그렇게 되리라.”

“안식을.”

조문객들은 사제의 주도하에 나란히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갈색 머리칼을 묶어 내린 여인은 참담한 표정이었다. 짧은 머리칼의 미남자는 오열하다가 기절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칼을 뽑아 들며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소리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무릎을 꿇거나 작별 인사를 하기도 했다. 다들 베로니카와 깊은 인연의 끈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분의 품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든 말든 장례식은 계속되었다. 두꺼운 관이 들어 올려졌다. 대성당의 뒤편에 있는 뜰에는 깊은 구덩이가 하나 파여져 있었다. 기수는 그녀를 상징하던 깃발을 높게 들었고,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길고도 긴 행렬이 이어졌다. 따라 걷던 화린이 고개를 들었다. 뚝. 차가운 빗방울 하나가 얼굴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수없이 분열하며 화린의 망막에 아로새겨졌고, 온몸을 흠뻑 젖게 만들었다.

“하···”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위는 온통 시커멨고, 하늘도 시커멨다. 사람들의 표정 역시 죽상이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쿰쿰한 냄새. 마치 색이 사라져 버린 듯한 음울한 광경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죽음에 더 없이 어울리는 진혼곡이 아닌가.

화린은 베로니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야먕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 누구보다도 귀족적인 사람이라는 것. 벨로크를 사랑한다는 것. 그의 주변 사람에게는 나름의 호의를 보인다는 것만 기억했다. 당연했다. 함께한 시간이 채 몇 달도 되지 않았으니까. 또한 그녀들 역시 나름대로 바빴고,

···정말이지 얄팍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던 누군가가 죽었다. 때로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눈물 흘리기에 충분했다. 화린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힘을 가지면 뭐 하는가? 이미 소중한 사람은 떠나버린 것을. 나는 또 한 번 늦어버리지 않았나?

화린이 끝도 없이 자신을 비난하며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때. 다시금 종소리가 울렸다. 안식에 빠진 한 여인의 집이 흙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멈춰라.”

쇠창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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