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혈투
시커먼 격류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흑기사의 새하얀 입김이 그 위를 수놓았다. 곧 그것은 붉은 피가 되었다.
“컥.”
울컥 피를 토한 이방인 신이 흑검을 휘둘렀다. 빙하가 쩍 갈라지며 파도 역시 거세게 요동쳤다. 무슨 모세의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궤적에 벨로크는 없었다.
그는 이방인 신의 뒤편에서 나타나 장검을 휘둘렀다. 갑옷이 쩍 갈라졌다. 피를 뿜어내는 상처의 회복 역시 더뎠다. 이방인 신은 그것이 놈이 다루는 신성. 자신의 신체를 억압하기 위한 의지를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크으으.”
신은 조금 전 까지의 여유만만하던 표정을 지운 채,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칼날의 폭풍이 몰아쳤다. 아니, 일어나는 도중. 턱 막혀버렸다. 교차된 검 사이로 무표정한 얼굴의 전사가 보였다. 자신의 제물로 점찍은 남자. 기껏해야 몇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곳을 방랑한 사내. 벨로크.
“어째서··· 어째서지?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레 강해진···”
신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가 팍 꺾였다. 벨로크는 오색찬란한 주먹을 뻗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후 이어지는 움직임. 장검을 들어 올려 놈의 칼날을 걷어내고, 녀석의 얼굴과 복부를 연타했다. 이윽고 한 바퀴 회전하며 놈의 가슴을 걷어찼다. 쿵. 신은 붕 날아가 탁한 급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내렸다. 자신의 미스릴 갑주 역시 가슴께가 퍽 우그러져 있었다. 기어코 반격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피멍은 곧 신성과 용의 피에 새살처럼 차올랐다. 이제는 놈과 같은 수준까지 왔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나와라.”
말을 마친 벨로크가 훌쩍 도약했다. 곧 그의 머리칼이 흩날리며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갔다. 고개를 슬쩍 내리니 빙하와 파도가 갈라지며 물에 흠뻑 젖은 이방인 신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검 끝은 허공에 있던 벨로크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놈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는데. 그 순간. 녀석의 가슴께에서 웬 회중시계가 떠올랐다.
모순된 말이었지만, 벨로크는 자신의 모든 감각이 정지했음을. 이 세상 자체가 멈춰버렸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오직 신만이 칼을 뻗어오고 있었다. 시간을 멈춘 것이다.
그가 이 막강한 권능에 저항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신성 덕분이었다. 법칙을 깨부수고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전율적인 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영혼이 깎여버린 듯한 증오든, 생사를 넘나드는 이 싸움이 깨달음을 준 것이든. 그는 이제 신성을 보다 확고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벨로크는 의지를 담아 퍼트렸다. 이 요상한 주문을 깨라고.
그러자 내면에 들어차 있던 힘이 공명하더니 바깥으로 뿜어져 나갔다. 흑백 세상으로 들어찼던 공간이 깨져나갔다. 벨로크는 자유로워진 몸을 비틀며 장검을 휘둘렀다.
쨍. 허공에서 두 개의 칼이 맞부딪쳤다. 찰나의 순간. 무정한 두 개의 칼날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수많은 잔상들을 피워냈다. 시간을 멈추고, 다시 흐르게 하고, 멈추고 다시 흐르게 하고, 그 사이로 수천 번은 넘는 검격이 서로 간에 오갔다.
희대의 대마법사가 남겼던 유산. 시간 여행자의 태엽이 쩍 조각난 순간. 강력한 반발력에 의해 두 사람 모두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벨로크는 수면 위가 땅이라도 되는 듯 고요히 파도 위에 서 있었고, 이방인 신은 망령의 힘을 이용해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허억, 허억. 허억. 이··· 빌어먹을 필멸자놈이···!”
놈은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다가 고함을 질렀다. 어깻죽지에서는 피막 날개가 돋아났고, 눈은 파충류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이국적인 생김새 위로는 다다다닥 비늘이 돋아났다. 흡사 괴물 같은 모양새였다.
“네놈의 영혼은 양분조차 되지 못 하리라. 심연의 구렁텅이 처박아 지옥 같은 고통을 겪게 해주지!”
놈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소리쳤다. 몸 주변으로는 파지직 스파크가 쳤고, 회색 도시의 하늘은 이제 음울한 것을 넘어 새카맣게 변했다. 무슨 일식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수백 줄기의 뇌전들이 떨어졌다.
일순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쿠르르르. 얼어붙었던 빙하들이 박살 나고, 떨어진 우레들은 곧 하나의 선이 되어 검고 시커먼 물을 타고 흘렀다. 그 어디에도 저 압도적인 공격을 피할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 맹렬한 포화 속에서 벨로크가 한 일은 간단했다.
신체를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동방의 신비로운 비전.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강대한 생명체 용의 피. 그 옛날 대륙의 지배종이었던 고대신의 권능. 그는 이 세 가지의 힘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그가 놈을 상대로 압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힘마저도.
벨로크가 땅을 박찼다. 그는 떨어지는 벼락들만큼이나 번쩍거리는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 파괴적인 원소들을 막아냈고, 이방인 신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르륵.”
파괴적인 기운을 담은 칼날은 용의 비늘을 갈라내고, 그 안의 속살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이제는 신체의 재생마저 원활히 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신은 저 무정한 칼날이 자신을 토막 내기 전. 다급히 벨로크를 걷어찼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갯짓을 해서 빠져나와야 했다. 초월자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둘러왔다.
“나는 네깟 놈이! 샐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세월을 싸워왔다! 제 가족도 팔아먹는 도적! 그 누구보다도 악랄했던 탈영병! 희대의 악마! 미치광이 귀족의 군대! 고위 요정과 고대 난쟁이! 용! 종래에는 고대신들까지!”
끓어오르는 분노, 몸에서 느껴지는 격통,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의문까지. 이방인 신은 그 모든 감정들을 담아 소리쳤다. 그의 의지에 화답하듯 꽈르릉 벼락들이 연달아 쳤다. 흡사 한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강하다! 나는-! 오직 혼란과 증오! 악의뿐이던 옛 세상에 질서를 가져왔다! 고통받던 생명체 모두를 구원했다! 맨손으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청년 한 명이 말이다아아아아-!”
소리치는 신의 뒤편에서 각양각색의 환영들이 떠올랐다. 그가 지금껏 죽여온 생명체들. 인간과 요정, 난쟁이와 거인, 악마와 괴물. 수만 명들의 영혼이 절규하듯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흑검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고, 푸른빛이 도는 장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신은 이빨을 뿌드득 씹으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말했다.
“헌데 어째서 내가, 너 따위한테··· 고작해야 이 땅을 방랑한 지 몇 년도 채 되지 않은 네깟놈 따위한테···”
“네놈한테는 남은 게 있으니까.”
“뭐라?”
벨로크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녀석의 눈이 부릅뜨였다. 말은 꺼낸 벨로크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얼굴은 차갑게 굳어 석상 같았고, 검을 잡고 있는 동작 또한 기계 같았다. 눈동자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인형처럼 입만 움직였다.
“난 네놈을 죽이겠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맹세했지. 현대인으로서의 나의 삶, 기사로써의 이곳에서의 삶. 그 모든 것을.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을 걸었지.”
이방인 신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목숨을 건 각오? 모든 것을 다 내던졌다고? 그런 하찮은 의지 때문에 이토록 밀린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 역시···”
이방인 신은 퍼뜩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지금의 삶에 미련이 남았다. 이 대륙을 불태우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이고, 그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 한다. 엄마를 보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고,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못해본 게임, 못 만난 친구들.
애초에 그가 이런 미친 짓거리들을 벌이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고향에 대한 향수. 그리고 이렇게 남은 미련은 자신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설령 미세한 틈새라고는 하나. 눈앞의 이 전사는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거기서 그는 벨로크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남은 것이 있었고, 저자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잠···”
벨로크는 자신이 가졌던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화린으로부터 배웠던 동방의 비전. 제 권리를 떠넘기기 위해 아낙스로부터 반쯤 넘겨받다시피 했던 용의 피.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끝내는 서로 간에 목적을 위해 계약했던 태초의 짐승으로부터 받은 힘. 신성.
그는 노르드의 약조를 기억했다. 이방인 신에게 복수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 줄 거라고 했다. 필히 거기에는 신성이 필요할 터였다. 차원 이동이라는 게 어디 보통의 힘만으로 될 리가 없었으니까.
어쩌면 노르드는 자신이 놈을 상대하기 위해 가진 신성을 다 쏟아부을 것을. 혹은 놈에게 닿지도 못하고 바스라질 것을 예상하고 그런 약속을 했을지도 모른다.
벨로크로서는 이용만 당한 것일지도. 하지만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갈 곳 잃은 방랑자인 자신에게. 두 개의 세상 속. 더는 소중한 사람들도 남지 않은 고향 따위 무슨 미련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벨로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그간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미련 없이 검 안에 담을 수 있었다. 나무와 풀 따위가 음각된 요정식 장검의 칼날이 환하게 빛났다. 푸른빛을 띠던 신성은 황금빛으로 바뀌었고, 모든 힘을 쥐어 짜내고 나서야 그는 자신만의 신성을 터득할 수 있었다.
“웃기지··· 웃기지 마라아아아!”
흑검 또한 지옥의 염화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그가 수만 년 동안 쌓아 올린 힘, 검술, 집약된 영혼들의 절규도 찬란하게 타오르는 칼날을 꺼트리지는 못했다.
“말했지. 여기가 우리 무덤이라고.”
벨로크는 장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내려치기.
이제는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몸에 익어버린, 수 없이 휘둘러왔던 자세였다.
검은 곧은 궤적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반대편에서는 악마의 이빨과도 같은 흑검이 맹렬히 날아왔다. 우레가 터지며 두 개의 칼날이 맞부딪쳤다. 새하얀 빛이 퍼져나갔다. 벨로크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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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크 님. 벨로크 님. 제발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네에? 벨로크니임.”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었다. 시발. 벨로크는 나 좀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 집어치우고 늘어지게 자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곧 부유하던 그의 의식은 익숙한 목소리. 체취.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에서 방황을 멈추고 수면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아델?”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눈가가 빨개진 단발머리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토막 나 내장을 뿌리지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양손에 성력을 피워올리며 자신에게 불어넣고 있었다.
“아델. 그만! 그러다가 네가 먼저 죽··· 벨로크!”
소리치며 다가온 건 또 다른 사람.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을 자랑하는 여인네였다. 그녀 역시 화재 사고의 피해자처럼 온몸이 새카맣게 변해있지 않았다. 피부에는 화상자국이 보이기는 했지만 살아있었다.
“깨어났다구요? 세상에··· 감사드립니다. 셀레네여. 헬레나여. 샤트라여.”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신을 찬양하던 악마 역시 눈물을 주륵 흘렸다. 벨로크는 아델과 카라 이자벨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멍한 눈동자였다.
“이곳은··· 저세상인가? 지옥? 아니면 천국?”
처음 보는 벨로크의 모습. 세 사람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델은 상처 때문인지 웃다가 인상을 찌푸렸고, 카라 역시 피부에서 진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자벨은 부르튼 손가락으로 제 눈물을 훔쳤다.
“어지간히 힘들었나 봐.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또 처음이네. 하지만···”
이자벨은 벨로크의 머리를 조심히 들었다. 이윽고 포근히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정말 고생했어요.”
힘들었냐 뿐이게? 벨로크는 맥이 탁 풀릴 지경이었다. 다 죽은 줄 알았다. 토막 나고 재가 되고, 얼어붙어서 다 죽은 줄 알았다고. 그런데 지금 이건···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온기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도움을 좀 받았다. 너를 구하고, 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지. 아무튼··· 상황은 나중에 설명해 주마. 지금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자칫하다가는 육체를 잃고 영혼만 남아, 이 망가진 세상과 함께 침몰할 것이다.”
노르드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복수를 끝마쳤다는 후련함 대신 찝찝함이 가득했다. 미약한 불안감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시선을 올렸다.
회색 도시의 하늘이, 매연으로 들어찼던 탁한 세상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이 사라질 때마다 그 아래에 있던 땅들은 녹진한 어둠에 휩싸였다. 마치 존재 자체가 소멸하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걸까. 분명 죽은 것을 확인했는데. 의식 세계에서의 죽음은 현실에서의 죽음과 똑같지 않았던가? 내가 주문에 빠진 건가? 놈은 어떻게 됐지?
생각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들어 올린 이자벨의 손을 따라 풍선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지금은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요. 일단 돌아가는 것에만 집중하자고요.”
자신을 토닥거리는 부드러운 손길과 목소리. 나지막이 들려오는 요상한 발음의 주문. 다섯은 빛에 휩싸여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