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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16화 (21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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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투

파도는 드높았다. 그리고 맹렬했다. 탁한 격류의 해일이 회색 도시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겠다는 듯 몰아쳤으니까. 드높은 빌딩의 허리가 쿵 꺾이며 굉음을 일으켰다.

크아아아아!

흑룡이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려고 했다. 불의 거인 역시 빌딩을 나무 타듯 기어오르며 이를 피하려고 했다. 소용없었다. 그들이 발버둥 치는 것보다 파도는 더 높고 거대했다. 또한 빨랐다. 용과 거인은 흔적도 없이 휩쓸렸다.

“아-펜토!”

칼라와 아가레스, 주변의 마법사들이 주문을 사용했다. 주변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서리 폭풍의 주문이었다. 갑작스레 눈보라가 치며 해일의 표면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뒤편에서는 또 다른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요술쟁이들 역시 꼬르르 물거품을 일으키며 가라앉았다.

움직이는 강철 마차들. 현대인의 과학 기술의 정수가 집약된 화약 무기들. 그 모든 문명들. 그리고 제 나름의 업을 쌓아 올렸던 희대의 영웅들과 괴물들까지. 대자연의 폭풍은 그 모든 것들을 일시에 쓸어버렸다. 지금 회색 도시에서 멀쩡한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구조물.

탑.

노르드가 만들어낸 역장 안에 있던 일행은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하며 탑을 향해 나아갔다. 벨로크는 이자벨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었고, 아델은 창을 꾹 쥔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힘이 있었다면 어째서···”

카라의 입이 열리다가 도로 닫혔다. 노르드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후우, 후우. 듣거라··· 난 놈의 세계에 구멍을 뚫고 내 세계를 접목시켰다. 두 세계 간의 겹침을 만들어낸 것이지.”

창백한 얼굴의 노르드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놈의 세계는 내 세계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에 놈은 아까전의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의지만으로 상대를 속박하던 기행을 벌이지 못한다는 말이군.

벨로크는 노르드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안에 담긴 것들은 많았다. 굳이 하나로 표현하자면 투쟁하는 자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눈동자 역시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지금이 놈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건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녀석은 네가 지금껏 부려왔던 그 모든 힘들을 도로 갈취했으니까. 게다가 놈은 인간이었던 시절. 이 땅에 일말의 질서마저도 없었던 혼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전사다. 수 백 년 동안 끝도 없이 투쟁해왔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권능과 비기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결코 공평하지 못한 싸움이지.”

이 세상이든 저쪽 세상이든 애초에 공평한 것이란 게 존재하기는 했나? 늘 그랬다. 강자는 강하고, 약자는 짓밟혔다. 이번에는 일행이 약자가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짓밟힐 수는 없었다. 벨로크는 제 인생을 회상했다.

회색 도시에서의 삶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라진 가족. 나만 홀로 남았다는 고독감. 나이를 먹음에 따라 하나 둘 씩 사라져가는 지인들. 점점 나오던 배까지. 하지만 그곳에서도 행복이 있었다. 일을 끝마치고 주말마다 한 잔씩 하던 맥주, 컴퓨터 앞에 앉아 시답잖은 영상을 보며 낄낄거리기, 기름기 가득한 음식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보기 등등.

별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나는 분명 그곳에 존재했었고, 행복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나를 동의도 없이 멋대로 이곳으로 끌어들인 녀석.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 삶 전체를 통째로 부정해버린 녀석. 휘말린 동료들, 죽어 나간 이 땅의 생명체들.

벨로크는 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곧 그것은 어떠한 적에게도 굴복하지 않던 전사의 투쟁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의지와 감응해 놈에 의해 억제되어 있던 신성을 일깨웠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그의 몸에서 넘실거렸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몸 전체를 덮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다시 한번 싸울 수 있다는 의지를 되찾은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승산이 있음이라.”

대화는 짧았다. 반투명한 역장이 곧 탑의 꼭대기 층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꼭대기 층은 평평했다. 무슨 연무장의 바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래로는 시커먼 급류들이 맹렬한 기세로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녹진한 안개가 깔려있었다. 탁. 일행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곳에 올라섰다. 노르드는 제 가슴을 움켜쥔 채 말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거라. 이곳은 이제 놈의 세상도 아니지만, 내 세상도 아니다. 휩쓸리면 구해줄 수 없다.”

“놈은···”

아델이 주변을 둘러보던 순간. 급류가 갈라지며 시커먼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곧 그것은 물기를 뚝뚝 흘리면서 무릎 꿇었던 자세를 일으켰는데. 시커먼 흑갑주를 차려입은 이국적인 풍모의 기사. 이방인 신이었다.

“이거 방심할 수가 없군. 설마하니 네 세계를 내 세상에 들이박아 간섭을 꾀할 줄이야.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걸고 하는 모험임과 동시에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기행이군.”

이방인 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헐떡거리는 노르드를 보며 웃었다. 저 짐승에게서 더는 신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벨로크만이 작은 불씨들을 피워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멍청했다. 힘을 잃은 네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멍청한 건 너다. 난 애초부터 판을 깔아놓을 생각만 했을 뿐이니라. 나의 대전사가 오직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하하. 오래 봉인되어 있었더니 노망이라도 난 것인가? 고작해야 몇 년 동안 칼 휘두르는 법이나 조금 배운 애송이가···”

말을 하던 이방인 신이 흑검을 들어 올렸다.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장검이 벼락처럼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챙. 불똥이 튀었다. 두 개의 칼날 사이로 그와 똑같은 동향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벨로크는 씹어뱉듯 말했다.

“넌 주둥이로 싸우냐?”

이방인 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도 몇 만 년 동안 이곳에 갇혀있다 보면 이렇게 될 거다. 아니, 그 전에 미쳐버릴 수도 있겠군.”

그는 흑검을 가볍게 밀어냈다. 하지만 벨로크는 주문이라도 얻어맞은 듯 바닥을 굴렀다. 손아귀가 저릿저릿했다. 다리는 후들거렸다. 지금껏 자신을 상대했던 적들 전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방인 신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옆구리를 노리며 찔러오는 장창을 역시나 가볍게 튕겨냈다.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구태여 피하거나 잔재주를 부릴 필요가 없지.”

“큭.”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아델의 손아귀가 찢겨 나갔다. 주춤거린 그녀의 머리 위로 음영이 졌다. 거무튀튀한 흑검이 마치 사신의 낫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콰르릉 벼락이 쏘아져 왔다.

이방인 신은 피하지 않았다. 몸으로 그 벼락을 받아내며 여전히 검을 내려찍었다. 일단 거슬리는 놈들의 숫자부터 줄여놓은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산호로 만들어진 삼지창이 그의 궤적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위쪽에서는 독사의 송곳니 같은 쌍검이 제 목을 노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쯧. 혀를 찬 그는 아델을 걷어찼다. 뻗어나간 검은 부츠는 여신의 보호막을 대번에 깨버렸다.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아델이 뒤로 날아갔다. 휘몰아치는 파도가 그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카라가 다급히 주문을 외웠다. 그녀는 빛과 함께 사라지며 날아가던 아델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쿨럭.”

카라는 피를 토하는 아델을 끌어안은 채, 다시금 부유 주문을 외워 탑 위로 안착했다. 포션 뚜껑이 퐁하고 열렸다. 카라는 아델의 입가에 그것을 부어주며 상황을 살폈다.

막고, 흘리고, 빈틈을 찌르고. 네 명의 인영이 쉴 틈 없이 잔상을 일으키며 칼날의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흑기사의 검격을 한 번 이상 받아낼 수 없었다. 놈이 휘두르는 저 절륜한 괴력은 지금껏 그에게 흡수당한 수만 명 생명체들의 힘이 한 곳에 응축된 것이었으니까.

“끄으으···”

복부를 꿰뚫린 이자벨이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도 다리를 뻗어 놈의 복부를 걷어차고, 손에 들린 쌍검을 내려찍었다. 눈동자에서는 마력탄을 뿜어냈다. 이방인 신은 목만 슬쩍 비틀어 이를 맞아주었다.

덕분에 목이 잘리지 않고, 큰 자상만 남았다. 하지만 곧 그의 갑옷 가슴께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무서운 기세로 새살이 차올랐다. 불의 거인이 가진 권능 ‘꺼지지 않는 심장’의 효과였다.

철컥. 그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이자벨을 토막 내버리기 전. 벨로크가 덤벼들었다. 벨로크는 이제 완연한 푸른빛에 휩싸여 있었다. 몸에서 뿜어지는 신성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눈동자 역시도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쩍 갈라져 있었다.

“오호. 용의 축복을 받은 건가? 그만한 힘을 넘겨줄 용들도 이제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아낙스인가?”

제 내면속에 기생하고 있던 저 녀석이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은 건가? 그렇다면··· 찰나의 순간. 벨로크의 머리가 돌아갈 때. 이방인 신은 이자벨을 꿰뚫은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탑 위에 있던 사람들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뻗어나간 검풍은 반대편까지 날아가며 파도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큭.”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 그녀를 노르드가 낚아챘다. 또다시 벨로크와 이방인 신의 검이 맞부딪쳤다.

뿌드득. 벨로크는 잇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은 쿠르르 진동하며 깊게 파이고 있었지만, 그는 이전처럼 맥없이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장검은 흑검의 칼날을 가르며 그 주인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용의 피와 신성이 결합되어 그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니. 너는 전사로구나. 패배조차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듯싶군. 하지만... 나한테는 닿지 못한다.”

피식 웃은 이방인 신은 힘을 끌어모았다. 흑검 주변으로 이글거리는 검은 불꽃들이 모여들었다. 신성이 담긴 칼날은 흑검을 더는 밀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갑옷 아래 감춰져 있던 놈의 근육과 뼈.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들이 점점 더 가속하며 한계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초월자는 슬쩍 손을 틀어 벨로크의 검을 빗겨냈다. 벨로크 역시 놈과 똑같은 기예를 펼쳐 보였다. 곧 두 사람의 모습이 흐릿한 잔상을 피워내며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미스릴 갑주의 상판이 깊게 갈라지며 피를 뿌렸다. 중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성을 이용해 섭리를 비틀었다.

나는 상처 입지 않았다. 그러자 시간이 역행하기라도 한 듯. 가슴의 상처가 아물었다.

이방인 신은 몸을 회전시키는 동시에 오른손을 뻗었다. 뻗어나간 빛살이 노르드의 발치에 박혔다. 끼아아악. 마녀의 한이 서린 단검. 망령의 칼날이었다. 곧 그것으로부터 푸른빛이 폭사하며 거대한 얼음기둥이 만들어졌다. 이자벨과 노르드는 얼음 속에 갇힌 인형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다.

회전하던 두 사람의 칼이 다시금 부딪쳤다. 쩡. 공기가 터져나가며 파도들이 출렁거렸다. 벨로크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주변을 둘러싼 한기가 그의 몸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신성을 이용한다면 금방 흩어버릴 수 있지만 그런 곳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

지금 저놈의 검격 한 번을 받아내는데도 그가 지금껏 쌓아온 신성들이 뭉텅이로 깎여나가고 있었으니까.

“흐. 왜 그러지? 망령의 칼날. 태산도 짓누를 듯한 힘. 초월적인 재생력. 그 모든 것들이 네가 지금껏 누리던 것들이다. 네 적들에게는 악몽을 선사했던 힘이기도 하지. 이제 와서 피식자의 기분이 되니 두려운가?”

벨로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둔해진 몸으로 놈의 칼날을 비틀었다. 어깨가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은 채, 장검을 휘둘렀다. 또다시 튀기는 불꽃. 직후 날아오는 칼날의 폭풍.

전후좌우. 모든 곳을 노리며 쏘아져 오는 악의에 벨로크는 다급히 제 송곳을 마주 휘둘렀다. 올려치기를 사선 베기로 막고, 찌르기를 검면으로 튕겨내고, 수직 베기를 몸을 뒤틈으로서 피해냈다. 하지만 놈의 검은 수 많은 잔상을 피워올리며 그를 덮쳤고, 벨로크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나며 비릿한 것이 올라왔다. 빠져나간 혈액들로 인해 시야는 흐릿했다. 그 사이로 미소 짓고 있는 흑기사가 보였다. 놈의 눈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길이 아주 잘 보였다.

완연한 죽음의 공포가 벨로크에게 들이닥쳤다. 그는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난 직후. 자신에게 이런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었나 생각했다.

없었다. 이만큼 압도적인 적을 맞이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내면속에도 더 이상 이 공포를 털어버리게 해줄 스킬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지금껏 녀석이 깔아준 길을 편히 건너 온 것에 지나지 않는···

“벨로크니이임!”

그가 정신을 못 차리던 그 순간.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시야 한구석에 누군가가 들어찼다. 번쩍이는 성기사 갑주에 검은 단발머리의 여기사. 아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상체가 토막 난 채, 쓰러지고 있었다. 자신을 감싸고 바닥을 구르느라. 놈의 칼날을 대신 맞은 것이다.

“아···”

“아아아아악!”

울리는 단말마. 여 마법사의 비명과 쏘아지는 빛무리들. 순식간에 뒤바뀌는 시야. 곧이어 하늘을 찢을듯한 우렛소리와 온몸이 새카맣게 변해버린 붉은 머리칼의 여인까지.

툭. 자신을 감싸고 있던 아델의 손이 떨어져 내린 그 순간. 벨로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희망. 혹은 안도. 외딴 세상에 홀로 떨어진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던 온기. 숨결들. 내가 이 세상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주던 사람들. 그들 모두가 사라졌다. 타오르고 토막나고, 차가운 석상이 되었다.

“흐하하하하!”

그리고 이를 만들어낸 원흉이자 제 원수가 지금 제 머리맡에서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벨로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타오르는 분노도, 증오도, 결의와 각오도 없었다. 그저 시궁창의 오수처럼 탁하게 가라앉았으며 무감정할 뿐이었다.

“또 일어나려고? 이제 그만 편해지는 것이 어때?”

이방인 신은 피 묻은 흑검을 휙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남의 소중한 사람들을 토막 냈음에도 그는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않겠다.”

“뭐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 나한테 남을 미래 따위는 없어도 좋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

벨로크의 몸에서 오색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것은 곧 신성, 용의 힘과 맞물려 폭발적인 기세를 뿜어냈다.

“이건···?”

“넌 여기서 죽는다.”

뻗어나간 전사의 주먹이 신의 얼굴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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