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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14화 (214/222)

214

혈투

칼라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우두커니 선 채, 제 신발로 바닥을 긁어댔다. 아드리아 사람에게 별천지 같은 이곳 회색 도시가 그녀에게는 퍽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그렇긴 하죠. 하지만 당신이 그분의 그릇으로 선택받음으로써 지금의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났다는 생각은 못 해보셨나요? 그리고 거기에는 당신 자신의 선택도 연루되어 있었죠. 부채감을 느끼지는···”

칼라가 말을 하던 순간. 빛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이에 맞춰 칼라의 눈앞에 반투명한 역장이 나타났다.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쏘아져 나간 단검은 역장에 닿는 순간 스르르 사라지더니. 난데없이 보호막 안에서 나타났다. 퍽. 이윽고 그녀의 미간에 박혀 들었다.

단검을 휙 던진 이자벨이 팔을 뻗은 채, 중얼거렸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 제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만큼 추한 것은 없으니까. 그러게 누가 그딴 짓거리들을 벌이래?”

흐, 흐흐흐.

스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주변의 땅이 얼어붙었다. 쩌어억. 단검 박힌 칼라의 머리가 세로로 갈라졌다. 안에 담긴 핏물과 구불거리는 뇌, 결정적으로 돋아난 이빨들이 무척이나 흉물스러웠다.

저런 년이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따랐다는 거지. 아니, 내 내면에 있던 그 녀석을 따랐던 건가?

“주인의 의지에 감응해 공간이동 주문을 발현하다니. 이건 또 굉장한 물건이군요. 하지만 강대한 주문에는 필히 그만한 반동-”

퍽. 머리가 갈라진 채로 말을 하던 그녀에게 바위 같은 주먹이 박혀 들었다. 보호막은 유리창처럼 깨졌다. 칼라의 상체 절반 역시 사라졌다.

움찔. 쓰러져 경련하는 시체를 뒤로한 채,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카라만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벨로크는 손을 툭툭 털다가 아름다운 세공이 되어있는 단검을 주워 뒤로 휙 던졌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자벨이 잡아챈 모양이다. 그는 정적을 깨고 말했다.

“입이 길군. 덤벼라.”

[그래! 이 엿 같은 인간 새끼! 네놈 때문에 나는···!]

[끝도 없는 미궁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처지를! 네놈이 아느냐아아아!]

아스타로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몸 전체에 비늘이 돋아났다. 그 변신은 곧 거대한 날개와 주둥이, 손발톱을 잉태했고, 그녀는 이제 한 마리의 검은용이 되었다.

[우어어어어어!]

거대한 짐승의 유골 같던 노왕의 모습 또한 뒤틀렸다. 얼굴이 물처럼 흘러내리고, 그 자리를 시뻘건 불꽃이 가득 채웠다. 곧 녀석의 머리는 구름까지 닿을 정도로 커져서 20m정도 되어보이는 불의 거인이 되었다.

끼아아아아아!

검은용은 날개를 확 펼치며 포식자의 정점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대지가 우르르 울리고, 그녀의 의지에 감응한 하늘이 비명을 지르며 어두워졌다. 번쩍. 곧이어 먹구름에서 벼락들이 연달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놈의 농간이라 해도··· 나는 널 죽이겠다아아!]

아스타로트가 입을 쩍 벌렸다. 송곳 같은 이빨과 허무의 구덩이 같은 목구멍에서 샛노란 빛더미가 슬금슬금 올라왔다. 이윽고 용의 브레스가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불의 거인의 공격은 좀 더 직관적이었다. 심장에 구멍이 뻥 뚫려있는 그놈은 집채만 한 제 주먹을 들어 올린 후. 아래로 내려찍었다. 강철도 물처럼 녹여버릴 정도의 용암이 뚝뚝 흘러내렸다. 여기에 녀석의 육중한 덩치에서 오는 파괴력이 더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공격들의 중심에는 벨로크가 있었다.

“벨로크님!”

소리친 아델의 얼굴과 목덜미, 성기사 갑주위로 붉은색 문양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어 칼끝으로 녀석들을 겨누고 있었는데. 그것이 곧 전에 사용했었던 여신의 비전. 허공에서 떨어지던 거대한 성력의 칼날을 소환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 힘을 쏘아내는 것보다 놈들의 공격이 들이닥치는 것이 더 빨랐다. 그리고 그 화마의 중심에 있던 벨로크는 검도 뽑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물론 그가 미쳤다고 멍때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가라앉혀 두었던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샘솟았다. 푸르스름한 아지랑이와 굳건히 디딘 두 다리 아래. 원형을 그리며 깨져나가고 있던 대지가 그것을 증명했다.

파지지직 거리는 벼락이 머리칼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고온의 불덩이가 몸에 닿기 전. 그가 움직였다.

왼손은 물 흐르듯 움직이며 허리춤의 검집을 잡았고, 오른손은 검의 십자막이 아래를 단단히 붙잡았다. 철컥. 검집에서 칼날이 빠져나왔다. 칼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푸른빛을 한가득 흘리고 있었다.

신성.

오래전 아드리아 대륙의 지배자들이었던 세 존재가 다루던 권능. 성력과 마력. 천상신들과 대악마들이 다루던 그 모든 힘들의 근원. 세상의 섭리를 비틀고, 존재를 부정하는 압도적인 힘.

그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칼날을 가볍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여파는 가볍지 않았다. 떨어지던 우레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용의 거체에 가는 실선이 그어졌다. 불의 거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놈은 주먹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끔뻑 멈춰버렸다.

굳어버린 두 대악마들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검을 휙 털었다. 그의 뒤편으로 무언가가 쿵 떨어졌다. 잘려 나간 용의 머리였다. 불의 거인은 온몸이 급격히 쪼그라들더니 외마디 괴성과 함께 뻥 폭발했다.

“어?”

아델이 당황했다. 애써 끌어모았던 성력이 스르르 흩어졌다. 카라 역시 주문을 외우다가 제 입술을 씹었다.

번뜩이는 검광과 머리 잃은 채, 쓰러지는 용의 거체, 하늘을 수놓고 있는 불똥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전사. 그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벨로크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흐릿 잔상을 일으키며 흑요정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막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손을 뻗고 있었다. 시커먼 해골이 폭사하듯 뿜어지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이자벨이 쌍검을 내려찍고 있었다.

“흡.”

벨로크가 중간에 끼어들자 이자벨은 칼을 우뚝 멈췄다. 아가레스의 주문은 벨로크의 몸에 닿자 거울에 튕기는 소멸해버렸다. 그는 오른손을 뻗었다.

“컥.”

타락 요정은 그의 손아귀에 잡혀 대롱대롱 매달렸다. 녀석은 켁켁 거리면서도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양팔을 억지로 벌리며 무언가 끌어모으는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어김없이 벨로크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놈의 몸에서는 파지직 스파크가 튀겼다. 신성이 놈의 주문 자체를 차단시켜 버린 것이다.

“흐, 흐흐흐. 거기서 더 강해지다니. 이거 정말 괴물이 따로 없군. 우리들이 힘을 잃지 않았더라도··· 당해내지 못했겠어.”

녀석은 잠시 버둥거리다가 이내 저항을 멈추었다. 요정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악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모습이었다. 벨로크 역시 놈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흑룡은 대상의 마음을 제 마음대로 조작하던, 미혹과 악몽의 권능을 쓰지 못했고, 불의 거인은 그 초월적인 재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놈 또한 그때 혼돈체가 되었을 때처럼 강력한 힘을 부리지 못했다. 그저 주문 좀 사용할 줄 아는 요술쟁이였지.

“할 말은 다 했냐?”

놈은 피식 웃었다.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체념한 자살희망자 같은 미소였다.

“그렇다. 굳이 길게 입 놀릴 필요는 없지. 어차피 우리들은 또 만나게 될 테니까.”

벨로크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우둑 목이 꺾인 흑요정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었다.

“너는 과연··· 이길 수 있겠··· 수 만명의 삶과 영혼을 착취, 그 힘. 강대한··· 망령-꺽.”

벨로크는 흑요정의 시체를 휙 던졌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 사람 모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것 같았다.

“어서 움직이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금이 쫙 간 건물들, 벼락에 짓이겨져 불타오르고 있는 자동차들. 여기에 바닥을 뒤덮은 질퍽거리는 시체들까지. 무슨 아포칼립스 세상에 와있는 기분이군. 그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벨로크가 고개를 들었다.

목적지는 한 곳이었다. 뿌연 매연 너머. 온갖 콘크리트 더미들이 가득 쌓여있는 무덤들 사이로 드높은 탑 하나가 보였다. 현대의 양식과는 맞지 않는, 고풍스러우며 옛스러운 멋을 가진 탑이었다. 피사의 사탑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즉.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요상한 주문이 날아드는 세상에나 어울릴 법한 건물이었다. 어딘가의 마탑처럼 생겼으니까.

일행은 회색 도시의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깊고도 깊은, 미궁의 한 가운데로. 잊혀졌던 신이 있는, 한 때는 자신이 살았었던 세상을 불태우려고 하는 광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일행의 뒤편으로 그들이 지금껏 죽였던 하수인들. 대악마들의 시신이 빛에 휩싸여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더미들은 하나의 선이 되어 탑의 꼭대기를 향해 날아갔다.

#

일행이 탑 아래에 도착해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였다.

“왔나?”

그는 마치 친구에게 인사하듯 말을 건네왔다. 네 사람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매연 가득한 하늘 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탑 위에서 강렬한 존재감 하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찰랑. 목에 걸린 노르드의 펜던트가 저절로 움직이며 빛을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 보다 그 반응이 격렬했다.

“이건···”

“놈이야!”

일행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흐릿하게 점멸하는 태양 사이로 무언가가 쿵 떨어졌다.

균열을 일으키며 터져나가는 도로와 치솟는 흙먼지.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시커먼 건틀릿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색깔이 똑같은 갑주가 연기를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완연한 흑기사의 모습이었다. 일행이 볼 수 있는 것은 쓰고 있는 로브 아래로 타오르는 두 개의 광망 뿐이었다.

“기다리다 지쳤다. 끝내지 못한 과거의 질긴 인연아. 나의 그릇될 자야.”

그는 벨로크와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윽고 로브 아래의 음영보다 더 깊고 시커먼 불길을 피워올렸는데. 마치 그의 증오와 분노를 대변하는 듯했다.

이방인 신.

세상을 구했지만, 끝내 고향으로는 되돌아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손에 의해 수만 년 동안 봉인 당한 존재. 고독한 방랑자이자 케케묵은 망령. 그리고 벨로크를 이 세상으로 끌어들인 장본인. 그에게 전쟁을 강요하고, 악귀와의 드잡이질을 강요한 시스템 창 그 자체.

녀석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하나의 거대한 위압감이 되었다. 이는 지금껏 일행이 만났던 괴물들, 악귀들, 그 어떤 지성 종족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박을 선사했다.

"..."

아델과 카라의 입은 추라도 매단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자벨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나오는 것은 신음뿐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만은 놈을 보면서 분노를 불태웠다. 그의 입에서 씹어뱉 듯 나오는 말 또한 이를 대변했다.

“씹쌔야. 뒈질 준비는 됐냐.”

“크흐흐흐흐. 실로 천박한 말투로군. 전혀 기사답지 않아. 마치 방구석에서 게임이나 하던 놈이 할 법한 말이 아닌가?”

이방인 신은 살기 가득한 말에도 웃었다. 마치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법한 유쾌한 친구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벨로크는 놈의 목소리에 서린 향수, 그것으로 인해 피어난 그의 짙은 집착과 탐욕. 분노와 증오. 상대를 언제든지 밟아 죽일 수 있다는 오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에는 네가 이긴다 이거지? 여기는 네 앞마당이고, 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며 쌓은 지식과 힘이 있을 테니까.

물론 벨로크는 겁먹지 않았다. 그저 야수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너 같은 새끼들 모두 결국에는 머리가 두 쪽 났지.”

“넌 여전히 오만하구나. 내가 깔아놓은 운명을 그대로 밟아온 버러지 주제에 말이다.”

녀석 또한 히죽 웃으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용이 그려져 있는 철판벨트 아래. 놈의 갑옷만큼이나 거무튀튀한 흑검이 굳건히 매달려 있었다.

“뭐, 긴말 할 것 없겠지. 좋다, 우리 모두 잘 하는 것들을 시작해보자고, 이 세상의 운명을 건, 서로간에 목숨이 걸린 칼부림을 말이다."

망령과 기사는 일시에 땅을 박찼다. 곧 우레와도 같은 소리가 울리며 두 개의 칼날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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