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회색도시
아델과 이자벨은 냅다 몸부터 날렸다. 카라는 주춤했지만 벨로크가 그녀를 안고 뒹굴었다. 엎드린 네 사람 위로 조각난 유리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발치에서는 아직도 탄환들이 불꽃을 뿜어내며 연기를 피워올렸다. 귀가 먹먹했다.
“반격을···”
창대를 들어 올린 아델이 깨진 창 너머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려고 했다. 벨로크가 그녀의 머리를 잡은 채, 아래로 내렸다. 검은 머리칼이 몇 가닥 떨어졌다. 총알 한 발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아델은 식은땀을 흘렸다. 벨로크가 시범을 보여주었을 때와는 달리, 몸으로 저 요상한 병기들을 맞이하자 와닿는 느낌이 달랐다. 훨씬 더 위험했고, 훨씬 더 정신을 빼놓게 만들었다. 무슨 마법사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몸을 내미는 순간. 벌집이 될 거다.”
심상 세계는 곧 한 개인이 지금껏 살아왔던 삶, 경험. 기억 등이 모여서 만들어진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 세상을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러한 현상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제 세상을 침범한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특별한 제약을 건다거나.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이미지들을 구체화시켜 그것을 이용한다거나. 무엇이 됐든, 일행에게는 퍽 불리한 조건이었다. 남의 집 앞마당에서 싸우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일행은 이런 일로 주춤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생사의 갈림길을 수도 없이 넘겨온 역전의 용사들이었으니까.
“나에게 당신의 손길을. 당신의 적들을 불태울 수 있는 광휘를 내려주소서.”
아델이 기도문을 외우자 여신의 축복이 이자벨을 제외한 세 사람을 감쌌다. 카라 역시 손을 휘저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반투명한 역장이 생겨나더니 네 사람의 몸을 감싸며 스르르 흡수되었다. 일행의 몸 주위에서는 보랏빛과 붉은빛 아지랑이가 흐르고 있었다.
“투사체를 막아내는 주문이야. 화살 같은 것은 몇 번이나 맞아도 흠집도 안 나겠지만··· 저건 장담할 수가 없네. 어디까지나 보험이라고 생각해.”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고룡으로부터 배운 용의 주문이 그녀의 내면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사출되었다. 카라는 주문의 마지막 단락을 외치며 말했다.
“다들 준비해!”
그녀가 손을 휘젓자 네 사람은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들은 회색빛 하늘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카라가 그 잠깐 사이 쌓아 올린 성취에 대한 감탄도 잠시. 쾅.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웬 건물 한 채가 불길에 휩싸여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빌라였다.
“별의별 게 다 나오는군.”
벨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주 걷고는 했던 도로 위. 빌딩과 식당 건물의 틈 사이. 수없이 많은 군중들이 모여있었다. 하나같이 잘 무장한 군대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눈동자에서 검은 불길을 이글거리고 있었다.
“놈들이다!”
소리친 난쟁이가 몸을 돌렸다. 난쟁이 양식의 갑주를 입고 있는 녀석의 어깨에는 강철로 된 원통 하나가 들려있었다. 앞부분에 달려있는 뾰족한 쇳덩이.
로켓포였다. 복장은 중세 양식인데. 무기는 현대의 것이라니. 실로 어울리지 않는 모순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순된 놈들 수백 마리가 보였다. 고블린, 오크, 요정, 놀, 인간까지. 평소라면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웠을 놈들이 하나 되어 일행을 향해 이빨을 으르렁거렸다. 게다가 나름의 지성을 갖추고 있던 녀석들은 모두 손만 까딱거리면 반경 수십 미터를 초토화 시킬 수 있는 병기들을 들고 있었다. 그대로 건물 안에 있었다면 산채로 매장당했으리라.
“쏴!”
“죽여!”
일행에게 총구를 들이민 놈들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카라의 두 눈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녀가 소리치며 손을 뻗자 기이한 파동이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무형의 힘은 현대 병기들의 방아쇠들을 퍽 구부려버렸다. 벨로크가 보기에 저건 염력이었다.
“너는 놈과의 결전을 대비해서 힘을 아껴! 여긴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카라가 다시 한번 손을 휘저었다. 꽈르릉. 당황한 녀석들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콘크리트 파편들이 요란하게 튀어 나가며 수십 마리의 하수인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물론 놈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망가진 로켓포들 대신 이제는 총기를 꺼내든 녀석들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당연히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 보다 탄환이 날아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수 백 개의 빛줄기들이 일행의 몸을 찢으려고 들었다. 장담컨대 이토록 압도적인 공격은 없었다. 하지만 신비한 힘을 부리는 것은 마법사만이 아니었다.
“광명이여!”
아델의 한 손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들은 곧 하나의 형태가 되어 태양과 종이 그려져 있는 문장 방패를 띄워냈는데. 현대의 화망은 신의 권능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다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물론 사격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녀의 성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이면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빠져나가기에 충분했다.
창백한 회색빛 손가락이 활 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손에 들린 묵빛의 활. 사안의 마궁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지하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시커먼 화살들이 불길한 기운을 꿈틀거렸다.
“흐읍.”
이자벨은 짧게 호흡을 멈춘 채, 시위를 놓았다. 검은 화살들은 날아가는 와중 분열했다. 일곱 발이 열네 발. 열 네발이 다시 스물여덟 그리고 그것들은 곧 화살비가 되어 하수인들을 향해 떨어졌다.
“벤-베르타아!”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있던 요정 하나가 주문을 부렸다. 반투명한 역장이 생겨났다. 곧 놈을 위시로 한 마법사들. 치렁거리는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들고 있던 트롤, 머리 셋 달린 오우거, 벨로크에게 죽었던 스콜라의 마녀들까지.
그들 모두가 주문들을 사출했다. 화살들을 맞받아치기 위한 공격용 주문들도 있었고, 제 몸뚱이를 돌처럼 단단하게 만든 놈도 있었다. 누군가는 투명한 크리스탈로 주변을 감싸기도 했다.
“흥.”
이자벨은 코웃음을 친 순간. 검은 화살들은 마법사들의 주문을 간단하게 부숴버렸다. 그저 힘으로. 내면에 담겨있는 사악한 마력으로 그것들 모두를 짓누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쉴 틈 없이 손을 움직이며 화살비들을 쏟아냈다. 도시가 요란하게 요동치며 괴물과 지성 종족들의 아우성들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이미 화살의 범주를 넘어선 폭격이었다.
“끄아아아!
그 순간. 그녀의 뒤편에 있던 빌딩의 옥상에서 빛이 번뜩였다. 쐐애애액. 이윽고 12.7mm의 저격용 탄환이 그녀의 머리를 노렸다. 귀를 울리는 총성과 몸에 박히는 이물감. 퍼억. 이자벨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나갔다. 하지만 곧 녹진한 어둠이 모여들더니 그녀의 얼굴이 재생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린 채, 화살을 쏘았다.
“컥.”
가죽옷을 차려입고, 대물 저격총을 들고 있던 요정 하나가 얼굴이 시퍼렇게 된 채, 떨어졌다. 시발. 식겁했잖아. 공중에서 내려와 아델과 함께 적진을 휘젓던 벨로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서는 공포심을 이겨내기 위한 악다구니가 들려왔다.
“크르르아아!”
탄창이 가득 매여있는 검정색 조끼에 국방색 바지. 그것을 차려입고 있던 오크가 소총을 들이댔다. 놈은 지체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격발음과 함께 샛노란 탄환이 소용돌이치듯 날아왔다.
분명 저 무정한 쇳덩이는 음속을 넘어서서 쏟아오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의 괴물같은 동체시력은 고개를 슬쩍 젖히는 것만으로 그 탄환을 피해내게 만들었다. 가슴과 하체로 날아오는 것은 칼을 휘둘러서 베어냈다. 주변에 있던 하수인들의 입장에서는 그의 주변으로 불똥으로 된 보호막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한 발 크게 내디딘 그가 장검을 휘둘렀다. 빛이 번뜩였고, 휘몰아친 검풍에 오크는 물론, 그 뒤편에서 아델에게 달려들던 외눈박이 거인 역시 두토막이 났다. 덕분에 막 갈라지는 시체에 창을 휘두르려던 아델은 몸을 돌렸다.
“죽어라!”
뻗어나간 그녀의 창이 곧은 선형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선은 소리치던 인간 기사의 칼을 툭 부러트리고, 머리를 두쪽으로 쪼겠다.
철컥. 또다시 들려오는 격발음. 하지만 중첩된 보호막과 성력의 불꽃에 의해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간 총알. 뻗어나간 왕의 장창이 식당의 간판을 부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거인 사수의 심장을 박살 냈다. 아델은 숨 한 번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말했다.
“끝이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있는 건지···”
두 사람의 주변으로 쌓인 시신들만 수백구였다. 하지만 놈들은 많았다. 아직도 회색 도시 저편에서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길에서도 몸을 숨긴 채, 총구를 들이댔다.
여기에 마법이 섞여들고, 검술과 괴물들의 육체가 더해지니. 퍽 위협적이었다. 일행은 지금 냉병기를 든 채, 현대의 문명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무슨 야만과 이성의 맞부딪침처럼 보였다.
물론 시간만 있다면 저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일행도 이제 저 기상천외한 현대의 문물에 대응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놈들 뒤에 도사리고 있을 이방인 신. 그 놈이었다. 이 잠깐의 틈새에 지금도 녀석이 무슨 술수를 부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힘을 아낀다는 것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지. 녀석도 역으로 이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벨로크가 내면의 신성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
자신에게는 퍽 익숙한,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피부로 와닿는 공기가 달라졌다. 무언가가 짓누르듯 무거워졌다. 또한 입술이 메마르며 열기가 느껴졌다. 벨로크가 시선을 올렸다.
우중충했던 하늘이 쿠르르 비명을 지르며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윽고 그 염색된 구름들 사이로 지글거리는 돌덩이들이 쉴 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 주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재수 없던 요정왕. 엘가르가 쓰던 비전 이자 주변의 모든 것들을 초토화 시키는 파괴 마법. 그 가공할 주문이 카라의 손에 의해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끄아아악!
하늘에서는 떨어진 유성우에 의해 현대인의 문명의 정수들.
드높은 빌딩, 말없이 움직이는 강철 마차.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 도로가 뻥뻥 터져나갔다. 불꽃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회색 도시는 한 순간에 폐허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하수인들은 곤죽이 되거나 비명을 지르며 어딘가로 달아났다. 몸에 붙은 불을 끄지 못해 잿더미가 된 놈도 있었다.
일행이 있던 곳을 제외하고는 주변 모든 것이 시뻘건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인간 미사일이 여기 있었군.”
그 전율할 파괴력에 벨로크는 순수히 감탄했다. 괜히 경지를 이룬 마법사를 하나의 군단이라고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억. 허억. 뭐라고? 너 또 이상한 말했지? 계속 그렇게 너만 아는 말만 할래? 비밀들을 쌓아 둘거냐고.”
이자벨의 곁에서 숨을 고르던 카라가 말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이제 확신의 빛을 띠고 있었다. 벨로크는 그 시선을 잠깐 마주하다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입이 꽤나 아플 것 같았다. 그래, 다 설명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벨로크는 일단 고갯짓했다.
“일단 움직이지.”
그를 붙잡고 있던 추억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바탕 소란을 피웠던 덕분일까. 벨로크는 이제 놈이 있는 곳을 정확히 알 수가 있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가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떠한 적들. 심지어 노르드의 본체를 마주쳤을 때보다도 더한 미증유의 기운.
일행은 타오르는 도시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동하는 와중에도 하수인들의 저항은 거셌다. 아까 전의 요정 저격수처럼. 고지대를 선점해 총을 쏴대거나. 폭탄 조끼를 매달고 달려오는 놈들도 있었다. 자동차를 끌고 일행을 들이받으려는 놈들도 있었다.
“컥, 컥컥. 그분의 뜻대로···”
핏발 선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증오, 분노, 절망. 저주의 말만 없었다 뿐이지. 온갖 음울한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벨로크는 멱살 잡고 있던 인간을 휙 던져버렸다. 그러자 놈의 조끼가 붉게 달아오르며 뻥 폭발했다. 육편이 튀고, 피가 증발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놈들은 지금 시간을 끌고 있다. 이런 놈들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면, 분명 위험한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산발적으로 조금씩 달려들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현대전술에 무지한 사람이라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뜻대로 놀아날 순 없지. 일행은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고, 행군 속도를 높이려고 했다. 그 순간. 눈앞에 기묘한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어진 철물점이라 쓰여 있는 건물이 그것에 휩싸여 사라졌고, 이는 아스팔트 도로 위. 주변에 있던 가로등과 전봇대까지 집어삼켰다. 어째선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의 인기척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주문이야! 모두 멈춰!”
카라가 다급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곧 그녀의 손에 새하얀 구슬 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을 위로 던지자 구술이 번쩍 터져나가며 감옥 같은 안개들이 사라졌다.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또다시 안개가 스멀스멀 끼기 시작했다. 카라가 주문을 깨트리면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안개가 꼈다. 그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주문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아.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것 같아.”
마법사들은 일방적으로 준비하는 자라 불린다. 시약과 촉매를 이용해 마법진을 그리고, 그 주문이 최적의 효율을 발휘하기 위해 계산 하고, 그리고 이를 쏘아낼 대상에 대한 연구마저 끝마친다면 그 힘은 평상시의 주문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해진다.
"흐으..."
카라가 진땀을 흘렸다. 그녀가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점점 더 안개에 휩싸여 가고 있었다. 아델이 기도문을 외웠다. 하지만 주문은 성력과는 전혀 반대되는 힘이었기에 별 소용이 없었다. 이는 이자벨의 마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그가 겪어왔던 주문이라는 것은 대처 불가능한 재난에 가까웠다. 느닷없이 잘 살던 사람들을 괴물로 만든다거나. 정신을 회까닥 잃게 만들어 제 부모도 못 알아보게 만든다거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덩이를 뿜어내 사람들을 불태워버리는 기괴한 힘이었으니까.
평소라면 일행의 단 하나뿐인 마법사. 카라가 고전을 금치 못하면 일행 역시 손쓸 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벨로크는 내면의 힘을 끌어올렸다. 곧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사라져라.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강력한 의지가 담긴 폭풍이 몰아쳤다. 쩌저적.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안개들이 눈 녹은 듯이 사라졌다.
“컥, 컥컥.”
그들 주변으로는 로브 쓴 놈들 수십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기괴한 행색을 한 여인네들. 그는 저놈들을 알고 있었다.
“스콜라의 마녀들!”
이자벨이 소리쳤다. 짝짝짝. 곧 박수 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공간을 가르며 나타났다. 여인네 둘, 치렁거리는 로브를 쓴 요정 하나. 갑각질의 피부를 가진 거대한 체구의 괴물. 모습은 조금 달라졌지만, 일행 모두 놈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 역시 일행을 알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손에 한 번씩은 죽었던 괴물들이니까.
아드리아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타락의 재림. 흑룡 아스타로스.
사막왕국 아리안의 전복을 꿈꾸었던 데몬들의 우두머리. 수천 살 먹은 악마 노왕.
요정들의 정수인 신목을 집어삼키고 끝에 가서는 혼돈의 존재로 다시 태어났었던 흑요정. 아가레스까지. 이방인 신에게 간사한 말을 속삭이고 그의 힘을 빼앗은 찬탈자들. 이제는 이도저도 아닌 노예들. 지하의 다섯 옥좌 중 셋이 저곳에 있었으니까.
“당신이 격을 쌓아올리기 위해 잡아먹은 존재들. 영혼마저 저당 잡힌 피해자들의 절규는 잘 느껴보셨습니까?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마지막으로 스콜라의 마녀들의 리더. 그에게 흡수당해 망령의 칼날이라는 새로운 힘을 주었었던 존재. 칼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벨로크는 적으로 되돌아온 제 힘들. 그리고 지옥에서 되돌아온 적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송곳니가 드러나는 전사의 미소였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웬 지랄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