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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도시
싸구려 합성목으로 만들어진 책상 위에는 곡선 모양의 커브드 모니터가 있었다. 옆에는 치킨 박스가 놓여 있었고, 두루마리 휴지와 안경 통, 비타민제까지 굴러다녔다.
그래도 모니터는 나름 비싸게 주고 산 건데. 대기업 제품이니까. 벨로크는 고개를 돌렸다. 물결무늬의 흰색 장판과 하늘색 벽지와 침대. 운동한다고 사놓았던 아령과 참고서 등이 꽂힌 책장까지.
5평 남짓한 작은 방에는 이것저것 물건들이 많았다. 배 나왔던 취준생에게는 익숙했던 공간. 하지만 이제는 조금 낯선 공간.
회색 도시.
이곳이 환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아련한 향수가 가슴을 간지럽혔다. 그런 벨로크의 상념을 깨운 것은 하이톤의 목소리들이었다.
“방안인가? 일반적인 양식은 아닌 것 같은데···”
적들의 매복을 경계해 주문을 준비 중이던 카라가 주변을 살폈다. 갈색눈이 조금 커진 것으로 보아 당황한 모양이다.
아델과 이자벨 또한 마찬가지였다. 포탈에서 빠져나온 그녀들은 각각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곧 한참이 지나도 주위가 조용하자, 벨로크 역시 침착한 기색이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요상한 양식의 물건들이 많습니다. 어디서 음식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코를 킁킁거린 아델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치킨박스에 관심을 보였다.
“이토록 투명한 유리라니. 아탈란테의 대신전에도 이런 것은 없었는데.”
이자벨은 모니터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며 흥미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 알약 같은 건 또 뭐지···? 뷔르타? 뭐라 읽는 거야?”
카라는 영양제가 담긴 약병을 읽어 내리다가 그것을 툭 던졌다. 이윽고 알겠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이방인 신은 분명 다른 세상 출신의 인간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광경은 그가 살던 세상의 모습일 거야.”
카라는 그 후로 우리들은 이 세상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일단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좋겠다. 또한 어떤 기상천외한 괴물이나 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르니 조심하자. 같은 당부의 말을 꺼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 벨로크?”
벨로크는 카라의 말을 뒤로한 채, 컴퓨터 앞으로 가서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전에 이 회색 도시로 왔을 때는 항상 저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저곳에서 자신과 동료들이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서 나타나기도 했고, 상태창과 퀘스트창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벨로크는 시스템창. 아니, 이를 빌미로 자신을 끌어들인 그 녀석이 지금 꽤나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놈은 어디에 있지?”
노르드로부터는 답이 없었다. 그냥 이따금 푸른빛을 점멸하는 펜던트에 그녀가 무언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 순간.
-얘는 아직까지 자는 거야?
-놔둬. 주말인데 뭐 어때?
-그래도 밥은 같이 먹어야지요.
굳게 받힌 방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 과정이 썩 기이했다. 분명 방금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세 사람의 귀신같은 감각은 몇 십 미터 밖까지의 기색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아델과 카라 이자벨은 흠칫 놀랐고, 벨로크 역시 흠칫했다. 그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제는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들. 들어간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며 두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온화한 인상의 중년 여자와 통통한 얼굴의 아저씨. 어디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는···
“일어나 있었네? 웬일이야?”
“하하. 밤을 새웠을 수도 있지.”
부부는 아델과 카라, 이자벨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내가 벨로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는 듯 말을 건네왔다.
“우두커니 서서 뭐 하고 있어? 어서 밥 먹으러 가자. 너 좋아하는 고기 구워놨어.”
“···”
“아들? 왜 말이 없어?”
중년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척. 벨로크는 말없이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 어떤 괴물을 상대할 때도 볼 수 없었던 분노가 검은 눈동자에 이글거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아련함도 섞여 있었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셨다.”
“응? 뭐라고?”
“부모님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날 돌아가셨다.”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에 가까웠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죽긴 왜 죽어? 여기 이렇게 잘 살아있···”
녀석들은 역겨운 가면을 쓴 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망설인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의 이 상황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마음 한편으로 기뻤기 때문이다.
사후 몇 년이 지났을 때는 그분들이 나오는 꿈조차 꿀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곧 나는 이 간질거리는 감정을 무시한 채, 들불 같은 분노에 몸을 맡겼다. 더 이상의 농락은 용납할 수 없었다.
스르릉. 검집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동시에 곧은 선이 그려졌다. 부부의 목이 나란히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벨로크는 거센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회색빛 영정사진, 검은 상복, 말로는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지만, 끝내 공감하지는 못했던 타인들의 얼굴 찌푸림. 이루 말할 수 없는 음울한 광경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선혈이 흐르는 바닥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적진이라고 날아온 곳은 별천지의 세상이지. 처음 보는 양식의 옷을 입은 사람들. 아니, 괴물들일 것이 분명한 놈들을 죽인 벨로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지. 당황한 카라가 말했다.
“베. 벨로크 님?”
아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들을 든든히 지지해주었던,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자 안절부절해했다. 그때.
“쉿. 괜찮아.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야. 이건 빌어먹을 악몽일 뿐이라고.”
이자벨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떨리는 그의 몸이 부동을 되찾을 때까지. 그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그냥 그를 포근히 감싼 채,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갑옷 사이로 와 닿는 그녀의 온기, 숨결. 익숙한 체취.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벨로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이자벨의 뺨을 한 번 쓰다듬었다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윽고 퍽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시체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 속에서는 꺼져갔던 분노가 다시금 타오르고 있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게 먼저겠지.”
시체들을 치운 벨로크는 익숙하다는 듯 앞장섰다. 싱크대와 냉장고, 여러 선반들이 위치한 주방의 중앙에는 식탁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갓 지은 쌀밥과 갈비찜, 김치찌개 같은 음식들이 모락모락 김을 풍겨댔다.
그것들 모두가 그의 옛 추억을 자극했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잡고 앉아 한 술 뜨고 싶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현관문으로 향했다. 지금은 그 옛 기억들에 매몰되는 것보다 놈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분노가 더 컸다.
네 사람이 막 쇠로 된 문 앞에 선 순간. 띵동. 어디선가 경쾌한 벨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있는 인터폰이 울리고 있었다. 쿵쿵. 곧이어 바깥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 역시 들렸다.
“경찰입니다. ■□씨. 안에 계십니까?”
벨로크는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경찰 정복을 차려입은 사내 둘이 그 앞에 서 있었다. 허리춤에는 권총과 경관봉을 매달고 있었다.
“■□씨 되시죠? 경찰입니다. 부모님 되시는 ㅇㅇ씨와 ㅇㅇ씨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는데요.”
사내들은 신분증을 내보인 후.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벨로크는 아무런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대뜸 칼을 휘둘렀다.
“뺑소니 범이··· 으컥.”
두 경찰은 머리를 잃은 채,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엿 같은 새끼들. 네놈들은 그냥 일한다는 티 좀 내며 성과만 타면 그만이지? 민중의 지팡이니 언제나 말만 번지르르하지. 그놈의 심신미약. 그놈의 솜방망이 처벌.
침을 퉤 뱉은 벨로크는 곧바로 그들을 지나치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쓰러진 사내들의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손에 들린 것은 시커먼 빛을 띠고 있는 리볼버 한 자루였다.
“다들 이걸 잘 봐둬라. 무척이나 위험한 물건이니까.”
벨로크가 내보인 알 수 없는 행동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요상하고도 낯선 세상. 입을 꾹 닫은 채, 긴장하고 있던 세 사람은 그를 주목했다. 벨로크는 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쾅. 밀폐된 복도 안에서 천둥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매캐한 화약 내음도 진동했다.
“그,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아델은 벽에 뚫린 작은 구멍을 보며 당황했다. 이자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작은 쇳덩이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회전하면서 날아갔군요. 화살보다 몇 배는 더 빨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주문 걸린 무기야?”
카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벨로크는 쓰게 웃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그녀들과 자신간의 간극에, 앞으로 적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올지 하는 걱정에, 그리고 그 화마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긴, 지금 이러고 있어봤자 소용없지. 어떻게든 발버둥칠 수 밖에.
“주문 걸린 장비는 아니다. 이건 그러니까··· 연금술이 극도로 발전해서 탄생한 물건인데. 여기 있는 이 방아쇠를 당기면 방금과도 같은 쇳덩이가 날아드는 원리라고 보면 된다.”
벨로크는 총을 흔들면서 이것의 원리. 이를 닮은 강력한 병기들. 수천 보 이상의 거리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저격총, 발사속도가 어마어마한 기관총, 느닷없이 폭발하며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폭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세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저 기상천외한 물건에 대한 대처법을 생각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리고···
“무시무시한 물건이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벨로크 넌 어째서 그 물건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카라가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자벨이 그녀의 어깨를 턱 잡으며 주제를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저런 가공할 무기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며, 이곳의 지배자인 이방인 신을 어떻게 상대할지에 대해 고민해야죠.”
“그건 그렇지만···”
카라는 말끝을 흐리며 벨로크의 기행들을 떠올렸다. 가끔씩 중얼거리고는 했던 알 수 없는 말. 기사답지 않은 아니, 이 세상 사람답지 않았던 파격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지금 이 별천지 같은 세상 속에서 익숙하게 움직이며 행동하는 그의 모습. 이계에서 왔다는 이방인 신. 그의 몸을 뺏으려는 이유. 설마···
“···!”
입을 헤 벌렸던 그녀는 곧 입술을 도로 닫았다. 어깨로 와닿는 손길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카라가 고개를 돌려 이자벨을 바라봤다. 갈색 눈동자 속에는 너는 알고 있었어? 라는 물음이 담겨있었다. 이자벨은 고개를 슬쩍 저으며 입술만 움직였다.
나도 이제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요? 벨로크는 벨로크예요.
하긴. 카라가 수긍할 때.
“요컨대 총구의 방향을 보며 날아올 방향을 예상하거나. 방아쇠를 당기기 전 죽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저격?총? 기관총 같은 것은 카라의 주문이나 제 보호막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델이 씩씩하게 답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 어째선지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벨로크가 뭐라 입을 열려던 그 순간. 귓가로 바람 찢어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투다다다. 곧이어 고막이 터질 듯한 소음과 함께 복도의 창문들이 요란하게 깨졌다.
“엎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