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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11화 (211/222)

푸르른 녹음, 반짝이는 별 무리, 살아 숨 쉬는 대지와는 인연이 먼 장소.

하늘에는 시커먼 매연이, 지면에는 인공적인 손길이 한가득 닿아 있는 세상. 주변 광경들이 흐릿하게만 보이는 낯선 자의 도시. 회색 도시의 한 탑 위에 앉아있던 그가 슬쩍 눈을 떴다.

“···”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 높지만, 끝이 뭉툭한 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까지. 그는 대륙 사람들과는 다른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곧 시커먼 갑주에 달려있던 후드를 뒤집어쓰자 그의 얼굴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한때는 대륙을 구한 영웅이자 모든 천상신들의 우두머리로 추앙받던 자. 이제는 지하의 다섯 옥좌들을 탄생시키고, 그들의 봉인을 풀어 대륙에 혼란을 야기한 자.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영혼. 혹은 그저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향수에 매몰된 자가 고개를 내렸다.

크르르르.

회색 도시의 아스팔트 위로 그가 지금껏 잡아 죽인 괴물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블린, 그렘린, 구울 같은 하찮은 미물들부터 시작해서 외눈박이 거인, 머리 셋 달린 오우거, 검은 피부의 미노타우로스, 서리거인과 크다만 용까지.

당장에 한 도시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괴물들 수만 마리가 눈을 번뜩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괴물들의 틈으로 인간들 역시 보였다.

넝마 쪼가리만 걸치고 있는 부랑자들부터 시작해서 철갑주로 잘 무장한 병사들. 그들을 이끄는 기사. 눈빛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까지. 절대신이 되기 전. 그가 지금껏 죽였던, 그리고 그의 새로운 육신이 될 그릇. 벨로크가 죽였던 모든 존재들이 지금 이 자리에 다 모여있었다.

“나의 경험치들. 영혼마저 속박당한 종복들이 많이도 모였구나.”

이방인 신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군세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저들 모두가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격이었다. 지금도 저들이 보내는 절규와 아우성. 혹은 분노와 흉포함이 자신에게 끝도 없는 힘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힘을 이용해서 오랜 숙원을 이룰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방인 신이 마치 왕이 된 모양새로 제 병사들을 내려다볼 때. 그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머리 위에 뿔 두 개가 달린, 파충류처럼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거리는 여자였다. 그녀가 말했다.

“위대한 의지시여. 놈들이 왔습니다.”

“알고 있다. 맞이해주어라.”

“한 번에 몰아붙일까요?”

이방인 신은 가부좌를 틀며 웃었다.

“아니, 뒷골목 왈패들처럼 바짓가랑이를 잡아끌며 시간을 끌어라. 너희들의 모든 것들을 희생해 놈들의 진을 빼놓아라. 그렇다면 내가 끝장을 내겠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수 천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그가 강대한 힘을 휘두르던 전성기 시절에도. 이제는 동료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과 함께했을 때도 쉬이 승리를 장담치 못할 정도의 강적이었으니까.

그는 주사위를 돌려 낮은 숫자의 확률이 나올 수도 있는 길거리 도박보다. 딜러의 꼼수가 개입된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옛날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에 몰아쳤겠지. 하지만 그는 이미 한 번 패배했었다. 그것도 제 동료들에게 배신당해 나락까지 떨어졌었다. 이번에는 신중을 가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자신의 기량을 보다 더 높이고, 탐식의 권능으로 흡수했던 힘들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검은흑룡 아스타로트는 고대신만이 아니라. 그 인간 기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고 한 마디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것에는 저 존재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노예로서의 각인, 그가 가진 힘을 알고 있기에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다는 생각. 마지막으로 혹시나 이변이 일어나 그 인간 기사가 저 케케묵은 망령을 물리치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주리라는 철없는 생각.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구나. 어린 용아. 그 하찮은 필멸자에게 무얼 기대하는 거지?”

이방인 신의 눈가가 번뜩였다. 대악마였던 존재는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디, 부디 용서를.”

“본래라면 너를 심연으로 처박고 끝도 없을 고통을 주었을 테지만··· 그래, 시간이 없군. 가라. 가서 놈들을 환영해주어라.”

이방인 신이 손을 휘저었다. 흑룡은 깊이 허리를 숙이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마녀 집단의 우두머리, 몸 전체가 타오르고 있는 불의 거인, 신목과 융합했던 혼돈의 존재. 타락 요정이 따라붙었다.

쓰레기 같은 배반자 놈들. 역시나 신의와 호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관계 따위 얄팍하기 그지없다. 목줄을 틀어쥔 채, 부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는 자신이 남긴 옛 잔재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곧이다. 이제 몇 개의 퍼즐만 더 모은다면 돌아갈 수 있다. 악의와 거짓만이 넘쳐나는 이런 가짜 세상이 아닌, 진짜 나의 고향으로···”

이방인 신의 검은 눈동자가 욕망으로 타올랐다.

촌각을 다투는

“허억, 허억, 헉.”

“각하! 이쪽으··· 컥!”

말을 하던 기사가 울컥 피를 뿜었다. 보라색 피부에 핏줄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손 하나가 그의 배를 꿰뚫고 있었다.

“으아아!”

“놈!”

공포에 질린, 혹은 분노한 다른 기사들이 칼이며 도끼를 휘둘렀다. 퍽퍽. 악귀병은 온몸이 난도질당해 축 쓰러졌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이 일행의 발을 묶었다. 뒤편에서 아귀처럼 따라오던 괴물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캬아아악!

어둠에 잠긴 돌계단 너머로 붉은 눈동자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그 번뜩임과 거친 숨결, 몸에서 풍기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일행의 코를 마비시켰다. 이성 역시 마비시키려고 했다.

“으, 으아아아!”

고무처럼 늘어난 악귀병의 팔이 제일 후미에 있던 기사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쇠 구부러지는 소리, 찢어지는 살점과 비명, 그리고 또다시 공기를 가르는 굉음.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베로니카는 다급히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곧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금테가 둘러져 있는 상아색 뿔피리였다. 베로니카는 숨이 턱 막혀 죽을 것 같음에도 뿔피리를 힘껏 불었다.

크-아아아아!

그러자 용이 포효하는 듯한 괴성과 함께 뿔피리에 새겨진 룬 문자가 점멸했다. 그녀의 의지를 타고 전해진 기이한 파동이 괴물들에게 닿았다.

끄르르악?

양다리로 뛰고 네 발로 천장을 기던 놈들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핏줄 가득한 눈동자만 사방으로 움직여댔다. 광룡의 뿔피리가 가진 마비 효과였다. 베로니카는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그녀가 소리쳤다.

“움직여라!”

느닷없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악귀들과 악마들이 도시를 습격했다. 수 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의 모든 것들이 타오르고 있었고,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그 화마를 피해 지금 내성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것이 제 명을 재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악마들, 성벽을 타고 넘어온 괴물 병사들이 집요하리만치 성의 중심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마치 이곳에 있는 어떠한 존재가 목표인 듯 보였다.

“왼쪽으로!”

괴물들이 성의 입구를 틀어막고, 주변을 포위하고 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올라가는 것뿐이다.

한 손에는 횃불, 다른 한 손에는 검. 아롱거리는 주홍빛 무리가 어둠의 파도를 헤쳐 나갔다. 지금, 이 순간. 석재로 지어진 드높은 성은 요새가 아니었다. 감옥이었다. 밀폐된 공간 곳곳에서 비명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던 사용인들. 병사들이 내지르는 절규이리라.

선두에서 달려가던 기사가 주춤했다. 눈앞에서 여인의 얼굴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리에 쓰고 있는 에이프런. 성에서 일하는 하녀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녀의 두 눈은 크게 뜨여있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수염 기른 중년 기사가 소리쳤다.

“따라와라! 이곳은 위험···”

말을 하던 그가 헉 소리를 냈다. 횃불들이 모여들면서 여인의 뒤편에 있던 어둠이 걷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인은 상체만 남아 내장과 척추뼈를 데롱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흐물거리는 촉수들이 달려있었는데. 그 촉수들이 나온 곳을 확인하니. 마치 피부를 다 벗겨놓은 듯한 시뻘건 악귀 한 마리가 그녀를 가지고 인형 놀이를 하듯. 능욕하고 있었다.

키아아아-!

아, 아아···

악귀가 소리치자 여인이 입을 딸깍거렸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반토막이 난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악마의 저주였다. 그 기괴한 모습에 모두가 얼어붙었을 때. 그녀의 상반신에서 뻗어 나온 내장이 마치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빛이 번뜩였다. 데비안이 휘두른 룬검이 악의로 가득한 살덩이들을 가르고, 여인을 토막 냈다. 하지만 악귀는 칼날이 닿기 전 이미 어둠 속으로 몸을 빼고 있었다.

“뭘 멍하니 보고 있나! 죽-여!”

평상시 조용한 성정과 벼락출세로 인해 다른 동료들에게 멸시받던 기사. 데비안이 일그러진 얼굴로 악을 썼다. 그 고함에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부웅. 투척 도끼가 날아들었다. 석궁들이 시위를 풀어헤치며 검은선들을 쏘아냈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여태까지 살아남은 기사들의 실력 덕분인지. 괴물은 팔이 머리가 쪼개지고, 몸 곳곳에 화살받이가 되어 죽었다.

“움직여!”

일행은 다시금 달렸다. 이제는 마귀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에서는 별의별 괴물들이 다 튀어나왔다. 상체가 세로로 갈라지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악귀. 얼굴이 있던 자리에 손바닥이 돋아난 괴물, 웃고 있는 인간 머리통 수십 개를 이어 붙인 채, 소리 지르며 굴러오는 괴물까지.

녀석들은 그 기괴한 생김새만큼이나 끔찍한, 그리고 예상할 수 없는 공격들을 퍼부었다. 웃는 얼굴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며 녹색 액체들을 내뿜었다. 산성액을 뒤집어쓴 기사 몇은 온몸이 녹아내려 쓰러졌다. 손바닥 괴물은 제 머리통으로 기사 하나를 턱 감싸더니. 방패와 갑옷 채로 구겨버렸다.

겔겔겔겔!

괴물들은 웃었고, 인간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덤벼들었다. 날렵한 인상의 기사가 손을 뻗었다. 단검이 번뜩이며 웃고 있던 괴물들의 눈에 박혀 들었다.

“후읍.”

그 틈을 타. 거대한 체구의 기사가 양손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스파이크가 달린 워해머가 곧은 선을 그리며 쏟아졌다. 기사가 십수년간 쌓아온 노력. 영주의 친위기사로 뽑힌 그의 넘쳐나는 재능과 경험이 합쳐지자. 괴물의 단단한 갑피가 퍽 부서졌다. 시커먼 피가 꿀렁거렸다.

키이이이!

그 틈으로 데비안의 룬검이 칼날을 뿜어댔다. 악귀들은 토막 났고, 그들은 동료들의 유해를 수습하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꼭대기 층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폭이 좁은 계단 곳곳에 난 창문들 사이로 달빛도 들어와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용의했다. 기사 한 명이 빛이 닿지 않는, 어둠 가득한 천장에서 쏘아지던 촉수를 방패로 막아내며 소리쳤다.

“각하!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탑의 꼭대기로 간다고 한들 무슨 수가 있는 것입니까! 차라리 여력이 있을 때. 어떻게든 활로를 뚫는 것이···”

그가 말을 하던 순간.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그리고는 거대한 팔 하나가 들어와서는 그 기사를 턱 잡아챘다.

“어컥.”

일행이 무언가 손 쓸 틈도 없이 팔은 뒤로 쑤욱 빠졌다. 뿌드득. 역시나 비명과 함께 거친 날갯짓 소리가 깨진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말할, 허억. 시간에 움직여! 지금, 이 도시에서 가장 허억. 안전한 곳이 그곳이니까!”

땀에 푹 절은 베로니카가 악을 썼다. 쿠웅. 무슨 폭탄터지는 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인간들의 비명 대신 악마들의 단말마들이 들려왔다. 몇 안 남은 기사들의 눈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러고 보니 도시가 이 난리인데. 영주의 약혼자가 보이지 않았다. 단신으로 성문을 부수는 그 괴물 같은 기사 말이다. 게다가 고문 마법사인 붉은 마녀와 기사단의 단장인 아델 역시 안 보였다. 그들이 저 위에 있는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분들과 함께라면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은 종아리에 힘을 주며 다시금 놀렸다. 하지만 곧 절망했다.

“이런···”

“헬레나여···”

탑의 허리 부분에 쩍 금이 가며 웬 악마놈이 대가리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기괴하게 구부러진 뿔. 툭 튀어나온 주둥이와 뻣뻣한 검은 털. 세로로 갈라진 붉은 동공까지.

베로니카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깨진 탑의 틈새로 날개를 펄럭거리고 있는 저 악귀가 그녀의 악몽을 수면위로 부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사, 산양. 산양 머리··· 아, 악마아아아!”

메에에에에!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산양머리의 악마는 힘을 벌리며 웃었다. 뱀처럼 갈라진 혀가 쉿쉿 거리고, 송곳 같은 누런 이빨에는 굳지도 않은 피와 살점이 끼어있었다. 아까 전에 방패든 기사를 낚아챘던 괴물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놈은 위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이 무엇인지 아는지. 일행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아는지. 탑의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제 몸뚱이를 이용해 턱 틀어막고 있었다. 상체만 탑에 턱 끼운 모양새였다.

“뒤, 뒤쪽에서도 옵니다!”

후미에 있던 기사가 소리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는다! 뚫어!”

소리친 데비안이 달려들었다. 망치를 어깨에 걸친 기사, 비도를 다루던 기사 또한 그 뒤를 따랐다. 그 순간. 씨익 웃은 괴물의 코앞에서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불길한 보랏빛으로 번뜩이는 선들의 집합체였다. 그리고 달려들던 세 기사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

양 웃음소리를 낸 악마가 입을 쩍 벌렸다. 그 사이로 갈라진 혀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산채로 잡아먹을 속셈인 것 같았다.

뒤편에 있던 기사들은 손 놓고 있지 않았다. 투척용 창을 던지고, 석궁을 쏘아댔다. 하지만 저 산양 머리 악마는 지금껏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다른 놈인지. 무슨 피부와 각막이 돌처럼 단단했다. 이대로라면 일단 눈앞에 있던 세 기사는 죽는다. 그리고 뒤편에서 달려드는 다른 놈들에 의해 그들마저 죽을 것이다.

“으, 으.”

거구의 기사 겔론이 눈동자를 흔들며 잇소리를 내던 그 순간. 화염으로 이루어진 용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베로니카가 룬 문자가 새겨진 종이를 반으로 찢은 채,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다. 투명망토, 광룡의 뿔피리와 함께 위급할 때. 사용하라고 벨로크가 주었던 용의 숨결이 담겨있던 스크롤이었다.

메에에에!

과연 에밀이 자신했던 대로 주문서의 위력은 절륜했다. 산양 머리 악마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피부가 물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덕택에 세 기사들 또한 마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놈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온몸에 불덩이를 뒤집어쓴 채, 앞길을 틀어막고 있었으니까.

“엎드려!”

베로니카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악마의 질긴 생명력을 감안하고 또 하나의 스크롤을 찢었다. 쏘아진 찬란한 빛무리가 어둠을 가르고, 악마의 몸뚱이도 갈랐다. 첨탑마저 가르고 하늘을 수놓았을 정도니. 그 위력을 알 수 있었다.

산양 머리 악마는 목이 반쯤 갈라져 쉭쉭. 공기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타올랐던 살점들은 어느새 서로 엉겨 붙으며 재생하려고 했다. 실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그때. 쏜살같이 달려 나간 데비안이 검을 찔러넣었다. 악마의 몸에 또 하나의 바람구멍이 뚫렸다.

“으아아아!”

소리지른 그가 양손에 힘을 주자 거대한 염소 머리가 뿌드득 잘려 나갔다. 기사들은 그의 용기와 영주의 순발력에 찬탄을 보냈다. 베로니카 역시 말했다.

“잘했다! 데비안!”

“···움직이셔야 합니다. 주군.”

데비안은 차갑게 대꾸하며 그녀를 부축했다. 베로니카는 몇 주 전부터 일어난 그의 변화에 더 이상 웃지 않는 그의 모습에, 그리고 갑옷으로 와 닿는 한기에 몸을 슬쩍 떨었지만, 곧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서··· 어서 가자꾸나.”

일행은 반파된 탑의 허리를 넘어 성탑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역시나 굳건하게 잠겨있어야 할 문은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는 악마들의 시체와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끈적하게 수놓고 있었는데. 그 일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맙소사.”

“어떻게 저런···”

악전고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만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놀라웠다. 떨어지는 달빛 아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쿵 발을 찍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편에 서려 있던, 빛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제 손바닥을 날렸다.

끼에엑!

퍽. 탑을 기어오르며 나타났던 거대한 임프가 순식간에 피떡이 되었다. 화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단정하게 묶어 내린 머리칼을 쉴 틈 없이 흔들며 양손과 다리를 휘둘렀다.

공기가 부르르 떨리고, 대지가 요동쳤다. 빛으로 이루어진 거인은 수십 개의 팔들을 사방으로 뻗어냈다. 그때 마다 달려들던 악마와 악귀병들은 온몸이 분해 당하며 물처럼 흘러내렸다.

지하의 악귀들을 도살하고 있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여인. 화가에게 영감을 줄 만큼 전율적인 광경이었다.

“후우, 후우. 후우. 베로니카씨! 이게 지금 어떻게 된 거죠?”

화린이 만들어낸 잠깐의 틈 덕분에 일행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카라가 새긴 수호부들은 요란한 빛을 뿜어내며 점멸하고 있었다.

그 주문이 지지해준 덕분에 첨탑이 지금껏 무너지지 않은 모양이다.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며 쓰러진 그들을 바라보다가 피딱지가 굳은 검을 휙 뽑아 들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벨로크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설명하자면 길다! 그리고 애매하기까지 하구나.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화린은 다시금 자신의 비전. 투신나찰을 운용하며 악마들을 토막 냈다. 화린은 고개를 돌려 무언의 눈빛으로 물었다. 베로니카 역시 달려드는 악귀병 한 놈의 다리를 걸어 녀석을 넘어트리고, 훤히 빈 목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녀는 건틀릿 낀 손으로 와 닿는 악마의 버둥거림. 죽어가는데도 지상 만물의 모든 것을 증오하는 듯한 붉은 눈빛. 그 속에서 지금 이 모든 일의 시발점. 대륙에 혼란을 초래한 그 망령을 상대하러 간 자신의 약혼자를 떠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이들이 벨로크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요? 그렇군요... 그거면 충분해요. 그거면··· 제가 이놈들을 모조리 다 찢어 죽일 이유로는 차고 넘치는군요.”

화린의 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솟구쳤다. 머리칼이 하늘 높이 치솟은 화린은 쓰러진 네 사람의 앞을 가로막은 채, 자세를 잡았다. 왼 주먹은 옆구리에 붙이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앞으로 향했다. 양다리는 훤히 벌려져 그녀의 자세를 굳건히 지지했다.

“이 뒤로는 한 발자국도 못가.”

뻗어나간 무투가의 주먹이 악마들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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