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심상세계
이자벨은 벨로크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이 그녀가 지금의 상황에 큰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내보인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응, 응. 그렇군요. 그렇게 된 거였구나.”
벨로크는 여전히 자신의 품에 안긴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쯤 됐으면 늘 튀어나오던 소리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아델은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이를 갈며 나서지 않았다. 그저 제 입술을 매만지며 발을 꼼지락거렸다. 카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입가를 슬쩍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틀림 없이 너도 놈들의 술수에 당한 줄 알았는데.”
그 무언의 눈빛에 벨로크는 이자벨을 살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이자벨은 순순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뻔했죠.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때의 악몽을 다시금 겪고 있었으니까요. 머리는 멍하고 몸은 고통스럽고, 기억마저 그때와 똑같아서 하마터면 나 자신을 잃어버릴 뻔했어요.”
정말이지 끔찍한 주문이로군. 그런데 어떻게 풀려났어? 그가 물으려고 할 때. 그녀의 고개가 쇠침대 너머. 시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일행 역시 고개를 돌렸다. 하르모아를 포함한 스콜라의 마녀들의 것도 있었고, 그리고··· 아델이 소리쳤다.
“저건 우리들 아닙니까!”
놀란 세 사람은 가까이 가서 시신들을 살폈다. 검은 머리칼에 대검을 가진 전사. 단발머리에 성기사 갑주를 입은 여기사. 레이피어를 찬 붉은 머리의 마법사까지. 벨로크, 아델, 카라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자들이, 일행이 그때 당시 입고 있던 장비들을 그대로 걸친 채. 죽어있었다.
“음.”
특히나 벨로크의 시신만이 유독 손상도가 심했다. 복부는 난도질당해 내장과 뼈를 드러내고 있었고, 폭탄이라도 얻어맞은 듯 팔과 다리는 조각조각 나 있었다. 이자벨의 마력탄과 손톱을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보기 좋은 건 아닌데. 죽어있는 본인의 모습을 본인이 확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만큼이나 꺼림칙한 일이었다.
“도플갱어인가?”
“대상자의 모습을 훔쳐낸다는 놈들?”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아는 마물들 중에서 상대의 모습과 기억마저 똑같이 복제하는 녀석들은 도플갱어와 거울 속의 유령들 뿐이야.”
“그렇다고 해도 죽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벨로크는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 하기 전의 도플갱어의 모습(현대인의 상상력이 결합된)눈은 튀어나오고 초록색 피부에 이족보행을 하는 개구리 괴물을 떠올렸다.
“벨로크. 너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애초에 도플갱어한테 자신의 본모습이란 건 없어. 그들은 희뿌연 연기 같은 형태로 물질계에 존재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기생해 그 모습을 훔쳐 가니까.”
그래? 그럼 우리가 지금껏 만난 놈들은 도플갱어들이 아닌가? 놈들은 끝에 가서는 모습이 바뀌었었으니까. 카라가 고개를 젓고, 벨로크가 마물의 생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자벨이 말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던데요?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도 이놈들 덕분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아델이 물었다. 이자벨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 내가 다시 한번 실험체가 되어 고문받고 있을 때. 느닷없이 세 사람이 들이닥쳤었어요. 그리고는 마녀들을 처리하고 나를 구해주었지요.”
카라의 경우와 비슷하군.
“그건···”
“그래요. 그런 일은 없었죠. 이들은 내 기억을 조작하려 한 거예요. 난 그것도 모르고 울고불고 벨로크에게 매달려 있었는데···”
시체를 바라보는 이자벨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평소의 당신한테서 풍기는 체취? 포근한 느낌? 아무튼 이런 것은 하나도 없고, 소름 끼치는 악의만이 느껴지더군요. 게다가 결정적인 건 너무 따뜻했어요.”
벨로크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왜?”
이자벨은 베시시 웃었다.
“이때의 당신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마치 딴사람이 된 것 마냥. 놀랍도록 다정했다니까?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다면 확 깬다고, 나도 그때 부터 세 사람이 진짜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거죠.”
듣고 있던 카라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푸흐··· 도플갱어와 환상 주문의 합작을 이렇게 깨다니. 아니, 그럴 만도 한가? 그 벨로크가 여자에게 다정해지다니.”
“으음.”
아델마저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벨로크의 표정이 뚱해졌다. 다시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그때로. 낯선 세상에 떨어져서 영문 모를 방랑을 하던 전사의 분노가 슬금슬금 올라왔다. 카라가 그의 어깨를 쳤다.
“옛날이잖아. 지금 중요한 건 우리들이 걸어 나가야 할 현재와 미래 아니겠어?”
얼씨구. 할 말 못 할 말은 다 해놓고, 이렇게 넘어가겠다고? 벨로크는 카라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구불거리는 마구 머리칼을 헤집었다.
“악! 너어!”
그 꼴을 보던 아델과 이자벨이 또다시 웃었다. 그 순간. 기이한 느낌과 함께 심상 세계가 요동쳤다. 석실이 쿠르르 울리며 천장에서 돌무더기들이 떨어지길래 일행은 황급히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건조한 공기와 메마른 땅. 쨍한 태양이 그들을 맞이하기 무섭게. 흑마법사들의 거처가 우르르 무너졌다. 이자벨은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 광경은 언제 봐도 기분 좋네요.”
카라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말했다.
“이걸로 다시 완벽하게 모였군. 대악마를 사냥하던 파티가 이제는 신을 끌어내리려 가는 건가?”
아델은 벨로크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이제 놈이 있는 곳으로 가겠군요.”
“그래,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끝장을 볼 때가 온 거겠지.”
일행이 얼굴을 굳혔다. 벨로크가 펜던트를 툭툭치자 조금 늦게 노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반응하지 못한 걸 이해하거라. 놈과의 결전을 대비해 나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벨로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넷이 다 모였구나. 좋다. 그렇다면 놈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가기 전. 한 가지 당부해둘 것이 있다.]
일행은 가만히 경청했다.
[그동안 겪었던 일들로 인해 깨달았겠지만, 다른 자의 세상에 침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들어가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간다고 해도 너희들은 제 역량을 펼칠 수가 없다. 너희들을 배제하기 위한 놈의 의지가 너희들을 짓누를 테니까.]
“으음.”
이자벨은 벨로크가 홀로 로벤으로 공간이동 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자신과 아델, 카라가 빈사 상태까지 갔었던 것도. 놈의 의지 자체만으로 그들은 한순간에 만신창이가 됐었다.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벨로크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놈은 신이었다. 그것도 대악마 셋의 정수를,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들을 잡아먹은 채, 한때 이 세상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존재.
[놈의 간섭에서 너희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너희들을 보조할 것이다. 신성으로 일종의 보호막을 치는 것이지.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말 몇 마디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존나게 힘들 거란 얘기지?”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노르드 역시 웃었다.
[그래, 회색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너희들을 노릴 것이다. 움직이는 강철 마차, 석궁보다 몇 배는 빠른 기상천외한 병기들, 놈이 그동안 죽여왔던 이 대륙의 생명들. 영혼마저 속박당한 존재들이 맹목적으로 달려들 테니까. 그러니 각오를 다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펜던트가 푸른빛으로 번쩍거렸다.
[그럼 준비는 됐느냐?]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포탈이 열렸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시커먼 통로 속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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