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심상세계
[신성의 사용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것. 알고 있겠지?]
“굳이 사용할 필요도 없지.”
벨로크는 송곳니가 드러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주먹을 휘둘렀다. 인형의 목이 우둑 꺾였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뒤편.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녀석들까지 뻥 터져나갔다. 한계까지 압축된 근력과 속도가 주변 자체를 파괴시킨 것이다. 그그그극. 사라져가는 동료들을 뒤로한 채, 얼굴의 반이 날아간 인형 하나가 손바닥을 쭉 폈다.
철컥. 녀석의 손가락 관절부들이 휙 돌아가며 검은 구멍이 엿보였다. 이윽고 그 안에서 날카로운 쇠침들이 연신 쏟아졌다.
벨로크는 옆에서 칼을 휘둘러 오던 귀족 인형의 목을 틀어쥐었다. 멋들어진 황금 단추로 된 조끼를 입고 있는 놈이었다. 그리고는 놈을 방패 삼아 쇠침을 막아내고는 녀석을 휙 던져버렸다.
몸뚱이로 동료를 받은 놈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는 땅을 크게 디디며 그 틈으로 파고들어 마치 야수처럼 날뛰었다.
기괴한 각도로 찔러오는 손톱을 피하고, 더벅머리 인형의 머리통을 부쉈다. 심장을 노리며 날아오는 창날을 잡아 놈의 기계심장에 그대로 꽂아주었다. 그의 주변에는 텅 빈 눈동자를 가진 인형들뿐이었다. 녀석들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기기긱. 거리며 제 무기들을 쏟아냈다.
포위상태에서의 일제 공격.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델은 물론 카라와 벨로크까지 세 사람은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위험해진 것은 인형들이었다.
배가 쩍 갈라지며 쏘아져 오는 쇠사슬이나, 입안에서 나오는 불길, 쇠침 등은 그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벨로크의 몸이 점점 더 한계를 벗어난 속도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칼날이 닿기도 전. 인형들의 신체가 부서지며 흩날렸다. 직후 사라진 그는 또다시 다른 곳에서 나타나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놈들은 그를 포위하지 못했다. 몸으로 밀어붙이는 육탄공격이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꼬리를 감춘 것이다.
그때. 벨로크의 시선에 머리가 갈라져서 꿈틀대던 인형. 카라의 여동생의 모습을 의태한 괴물 피델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끄아아아! 이 하찮은··· 필멸자가아아아!
소녀는 마치 죽음에서 되돌아온 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번들거리는 피부 사이로 시커먼 기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다른 인형들처럼 텅 빈 동공이 아닌, 악에 받친 눈빛으로 벨로크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양팔로 제 몸을 감싸며 신체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덩치는 무슨 빌딩만큼 커졌고, 양옆으로는 인간들의 팔다리 수 백 개가 돋아났다. 무슨 인간 지네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괴수의 머리 부분에는 새하얀 가면이 씌워져 있었는데. 중앙 부분에는 어린 소녀의 얼굴이 박혀있었다.
철컥. 소녀의 입이 열렸다. 그 안에서는 벨로크에게 익숙한,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 돋아났다. 원통형의 차가운 총구. 대포였다.
시발. 저게 저기서 왜 나와? 아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공간에 있는 인형들 자체가 이 세상에 걸맞지 않은 파워테크놀로지였으니까.
고대 난쟁이의 유물이라고 했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벨로크는 막 지팡이 끝에서 쏘아지는 비전 화살을 고개 젖혀 피한 후. 마법사 인형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렸다. 이윽고 쏟아지는 그 파편 사이로 대포의 위치가 향하는 곳을 살폈다.
“뒈져!”
온몸에 화염을 두른 채, 인형들을 학살하고 있는 여기사가 보였다. 아델의 옆에는 카라가 보조를 맞추며 짧은 주문을 쏘아내거나 레이피어를 찔러대고 있었다. 난전이다 보니 큰 주문을 사용하기가 벅찬 모양이다.
뻥. 공기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쇠구슬이 두 사람에게 날아들었다. 괴물의 크기가 크다 보니 대포알 또한 컸다. 이변을 알아차린 아델이 눈을 크게 뜬 순간. 벨로크가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발차기를 날렸다. 쇠구슬은 도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냥 분해되어버렸다.
기기기긱!
전사가 가진 힘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시간도 못 끌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괴물이 분노했다. 놈은 간질환자처럼 머리를 흔들어대더니 사방으로 대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쇠구슬들이 향하는 곳은 인형들의 파도 속에 있던 벨로크였다. 하지만 지글거리는 화약 구슬들은 애꿎은 땅과 인형들만 부술 뿐이었다. 파편이 흩날리는 곳에 그는 없었다.
괴물의 고개가 돌아간 순간. 녀석의 시야 위로 시커먼 것과 하얀 것이 가득 찼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검은 눈동자의 전사가 자기 위에 올라타 있었다. 괴수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지네 같은 팔들을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굳건한 두 다리로 이를 버티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이윽고 그것을 내려찍었다.
쩍. 괴물의 가면에 금이 가며 박혀있던 장검이 튀어 올랐다. 벨로크는 날아가던 검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늘 그랬듯. 거침없이 내려찍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놈은 신체를 괴상하게 개조한 탓에 고통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육체의 붕괴는 막을 수가 없었다. 항거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 자신을 종잇장마냥 찢어버리고 있었다.
──────!
몸 전체에 실선이 쩍쩍 그인 괴수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인형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건 고대 난쟁이 신이 자신의 발명품들에게 자주 써먹는 방법이기도 했다.
철컥.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도 수 백 개가 동시에 울리자 벨로크의 귀에는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그는 기계를 닮은 이 괴물들과 태엽 소리. 그리고 궁지에 몰린 이 녀석이 행할 법한 행동을 생각해보았다. 현대인의 상상력이 결합되자 답은 쉽게 나왔다. 자폭. 그렇다면 벨로크가 할 일 또한 간단했다.
“───!”
괴수 못지않게 크게 소리 지른 그는 붕괴되어 가는 괴물의 몸체를 턱 잡은 채, 허리를 틀었다. 환상 속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 무게와 숨결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세상 속에서 괴물의 거체가 들렸다. 수백 톤에 이르는 몸뚱이가 코딱지만 한 인간에 의해 끌려간 것이다.
기기기긱!
벨로크는 카라와 아델을 파묻어버릴 기세로 달려들고 있는 인형들.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저 파도를 향해 괴수를 집어 던졌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파도가 출렁거렸다. 놈들의 기계심장은 거세게 맥동하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멈췄다. 이윽고 하나둘씩 빛을 일으키며 뻥뻥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그 사이를 달렸다. 전투의 열기로 인해 달아오른 그의 감각이 인위적인 시간의 감속을 만들어냈다. 흩날리는 파편과 터져나가는 빛무리. 그 파괴적인 행각들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오롯이 그의 시선에 새겨졌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몸을 날려 두 여인들을 양손에 꼈다. 그리고 땅을 박차며 하늘 위로 높이 솟았다.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이따금씩 빗줄기가 툭툭 떨어지며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택의 지붕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온 벨로크는 지붕의 경사면을 밟은 채, 아래로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잘 관리된 정원에 발을 디디고 섰다.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리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자폭이라니. 뼈도 못 추릴 뻔했네···”
카라가 보호막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아델은 기도문을 외우며 카라의 몸에 난 생채기들을 치유했다. 그때. 쿠우우웅. 땅이 울리며 불붙은 나무토막, 깨진 창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등이 날아와 역장에 팅 부딪쳤다. 드높아 보이던 대저택은 몸 전체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카라는 점점 커져가는 불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잔해들, 타오르는 과거의 악몽들을 보면서 카라는 후련함을 느꼈다. 제 마음속을 채우고 있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린 느낌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사라진 저택도 가족도, 현실에서는 버젓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본인을 좀 먹고 있던 과거를 털어버렸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테니까. 그 순간. 심상세계가 요동쳤다.
우중충했던 먹구름들이 걷히고, 따스한 태양빛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빛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한 줄기 광명을 선사했다. 카라는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며 눈을 슬쩍 감았다. 그녀가 말했다.
“난 준비 됐어.”
그녀를 슬쩍 바라본 벨로크가 목걸이를 툭툭 쳤다. 그러자 목걸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일행의 눈앞에 파란색 포탈이 하나 생겨났다. 무사해야 할 텐데. 세 사람은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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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에게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받던 기억을, 카라에게는 패턴을 바꿔 불행했던 기억을 행복했던 기억으로 뒤틀어 보여줌으로써 악몽에 묶어두려고 했다.
그렇다면 이자벨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일단 이 악몽이 그 사람에게 있어 가장 끔찍했던 트라우마를 보여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자벨은 그때의 광경을 상기시키고 있을 것이다.
대악마의 마력에 침식되고 동료들과 떨어져 홀로 죽어가던 그때. 웬 미치광이 마녀 집단에게 납치당해 실험체가 되었던 그 순간.
이 엿 같은 새끼들이. 벨로크는 이를 으득 갈며 푸른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눈앞에서 그녀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걸 본다면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가 무색하게 꾀꼬리 같은 미성이 앞에서 들려왔다.
“왔어요?”
벨로크는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눅눅하고 곰팡이 핀 냄새가 나는 어두운 석실 안. 한쪽에서는 녹색빛이 감도는 플라스크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쇠창살로 된 감옥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큰 것까지 인간들의 두개골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사악한 흑마법사의 비밀 실험실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실의 중앙. 날카로운 송곳이며, 손톱 뽑는 집게, 구불거리는 칼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바닥 위로. 쇠로 된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도 양팔과 다리 쪽에는 구속구까지 달려있는 채로. 이자벨은 그 쇠침대 위에 앉은 채, 태연하게 발목을 꼰 상태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벨?”
벨로크는 드물게 당황했다. 곧이어 포탈을 빠져나온 카라와 아델 또한 지금 상황을 살피고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엥?”
“어?”
이자벨은 피딱지가 굳어있는 쇠침대에서 슬며시 일어나더니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카라의 것과 똑같은 만티코어로 만든 가죽 갑옷을 입고, 허리춤에는 마법 단검과 우레우스의 쌍날검, 등에는 요정왕국에서 얻었던 마궁까지 매고 있는 중무장 상태였다.
벨로크는 검집에 손을 얹었다. 눈앞에 있는 저 여자가 진짜 이자벨이 아니라. 그녀로 의태한 절대신의 하수인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가 점점 더 다가옴에 따라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체취. 호선 짓고 있는 입. 눈동자 속에 담긴 뜨거움까지. 그 모든 것을 느낀 그는 검집에서 손을 뗐다. 이윽고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자벨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오더니 벨로크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있던 자리. 어둠 속에 잠겨있던 쇠침대의 구석에는 토막 나고 썩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이자벨은 마치 칭찬해달라는 듯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말했다.
“기다리느라 지쳤어요. 다들 뭐 하다 이제 온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