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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07화 (207/222)

207

심상세계

부모와 애인을 담보로 한 양자택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카라는 태연한 얼굴로 꺼림칙한 수수께끼를 던졌다. 좌중은 숨죽인 듯 침묵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이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잠깐만 시간을 다오.]

노르드는 한 방 먹었다는 목소리였고, 아델은 어린 카라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저였다면 망설임 없이 애인을 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수도 있겠지요. 애초에 문제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음.”

아델의 말이 맞다. 살아온 환경에 따라. 개개인의 가치관은 틀린 법이다. 만일 부모를 버리고 애인을 구하겠다고 해도 그것을 도의적으로 지탄할 순 있겠으나. 틀렸다고 단언할 순 없다. 당사자들밖에 모르는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런 문제에 딱 부러지는 답은 없는 것 같은데. 양자택일? 카라의 취향에 맞는 대답을 하란 건가? 그가 생각할 때. 부채를 든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선수를 빼앗겼군.

“정답.”

“말씀하세요.”

“모순이지만 한 명을 구한 후. 다른 한 명을 구한다. 라는 뻔한 답변은 아니겠지요?”

카라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선택. 이게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규칙은 지켜주셔야 해요.”

선택? 규칙을 지킨다? 그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순간. 벨로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건 그가 이 세계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이기에, 다양한 문물과 미디어 온갖 정보의 바다를 겪어왔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이를 느낀 건지 노르드가 말했다.

[무언가 알아냈느냐?]

“내 생각이 맞다면 이게 답이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부채를 든 여인이 카라의 앞에 선 채, 입을 열고 있었다.

“이 모호한 문제에 대한 답은 정해진 게 없죠.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는 답을 원하셨습니다. 그건 곧 아가씨의 취향에 맞는 정답을 고르면 된다는 뜻이겠죠?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고, 가주이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애인은 아직 없으시죠. 그렇다면 정답은 부모. 즉 어머니입니다.”

말을 마친 여인이 부채를 촤륵 펼치며 입가를 가렸다. 눈이 호선을 짓고 있는 게 퍽 자신만만해 보였다. 주변에서도 그럴 듯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움직일까요?”

굳은 표정의 아델이 허리춤의 검집을 꾸욱 쥐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네? 그렇다면···”

아델이 시선을 돌렸을 때. 카라가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뗐다.

“땡. 틀렸어요.”

“···틀렸다고?”

여인은 순간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입가가 찢어지고 눈이 가늘어진 것이 사악한 자들의 모양새였다. 하지만 곧 부채로 제 입가를 툭툭 치며 그것을 갈무리하고는 카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흐음. 그럼 다음 기회를 노려볼까요?”

그녀는 벨로크를 지나치면서 눈가를 흘겼는데. 벨로크는 저 면상에 대고 엿이나 먹으라고, 너희들은 이제 뒤졌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낸 답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혹여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놈들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냥 덤덤한 표정으로 카라의 앞에 섰다.

“정답을 말하겠소.”

“좋아요.”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은···”

벨로크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굳건히 닫힌 입매가 일자를 그렸다. 시계 초침이 몇 초가 흐르고, 이제는 몇십초가 지났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을 고수했다.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래?”

“베, 벨로크 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델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카라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벨로크 경? 그래서 답은요? 애인을 구할 건가요? 아니면 어머니를 구할 건가요?”

“···”

벨로크의 입은 굳건한 자물쇠처럼 여전히 침묵을 고수했다. 마침내 일 분이 지났다.

“그만, 아무래도 머리가 텅 비어서 말이 안 나오는 것 같은데. 제가···”

부채 든 여인이 나선 그 순간.

“정답이에요. 벨로크 경.”

카라의 애매한 입가가 말려 올라가며 진한 호선을 그렸다.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정답이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부채 든 여인이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잔뜩 당황한 눈치였다. 카라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마지막에 벨로크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맞아요.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다니. 말도 안 되는 행동이죠. 하지만 애초에 내가 던졌던 문제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에요.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들의 목숨을 저울질하라는 거니까.”

여전히 멍하니 있는 관중들을 향해 ‘말했잖아요? 이번 대회에는 내 사심이 듬뿍 들어갔다고.’ 라고 말한 카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하하. 정말이지 앙큼한 속임수로군. 그야말로 마법사다운 말장난이로다.]

맞아떨어져서 다행이군. 긴가민가했는데 말이야. 노르드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카라가 다가왔다.

“정답은 없지만, 선택은 해야되는 문제. 정답이 없는 질문에는 마찬가지로 똑같이 응수한다. 훌륭했어요. 경. 그야말로 용맹과 지혜마저 두루 갖추신 분이로군요. 이번 대회의 우승은 경입니다. 원하시는 소원이 뭐죠?”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까치발을 든 채, 벨로크를 올려다봤다. 벨로크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쪼그려 앉으며 눈을 마주했다.

햇빛을 못 받았는지 창백해 보이는 흰 피부. 아델과는 달리 옆으로 길게 빠진 눈매. 도톰한 입술. 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 얘도 어릴 때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게 없네. 피식 웃은 그가 카라의 머리에 딱밤을 먹였다.

“윽?”

“이쯤 고생했으면 충분하니까 이제 돌아와라.”

소녀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네? 그게 무슨···”

“돌아와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우리와 함께 나아가야 할 현재로.”

벨로크의 말이 끝난 순간. 카라의 두 눈이 확 트였다. 이윽고 아델이 그랬을 때처럼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화려한 얼굴을 한 미녀가 있었다. 만티코어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 갈색으로 번들거렸고, 그 위에는 붉은 로브가 펄럭거렸다. 허리춤에는 사막 왕국에서 산 레이피어까지 차고 있었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카라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나는지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의 틈으로 벨로크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알긴 아는군.

“정신을 차렸군!”

아델이 입을 연 그 순간.

속박이 풀렸다! 죽여!

부채 쓴 여자의 입이 귀까지 찢어지며 주변에 있던 절대신의 하수인들이 제 본모습을 드러냈다.

전갈 집게와 수십 쌍의 갑각류 다리를 버둥거리며 인간의 상체를 가진 놈. 머리 넷에 팔 여섯 개가 달린 거인. 눈에서 검은 불길을 이글거리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기를 든 놈들까지. 전의 그 눈깔 괴물처럼 하나같이 그 외향이 기괴하며 독특했다.

너. 이 새끼들 잘 걸렸다. 벨로크가 괴물 못지않은 흉흉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아델 역시 왕의 장창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러나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 카라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내가 이렇게 행복한 유년 시절을 맞이했을 리가 없지.”

새하얀 손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피어오른 순간. 바닥이 꿀렁 흐물거리더니 마치 용수철이 튀기듯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한순간에 수십 개의 가시들이 마치 비늘처럼 돋아난 것이다.

끄어어···

이에 걸린 하수인들은 내장을 파고드는 격통에 그물 섞인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정말이지 최악의 악몽이었어. 이건 그 답례로 내가 주는 선물이야.”

차갑게 중얼거린 카라가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러자 가시들이 부르르 떨리더니 일시에 폭발했다. 쾅. 돌조각과 살점들. 붉은 피와 내장들. 마지막으로 새하얀 뼛조각들이 뒤섞여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일행은 반투명한 역장 안에 몸을 숨긴 채, 그 혼란스러운 파도를 관음했다.

카라가 다시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보호막이 사라졌다. 일행은 시체와 조각난 식탁, 깨진 포도주와 음식물들이 뒤섞인 복잡한 융단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일행 말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존재가 한 명 더 있었다.

캬악··· 크륵.

한 여인이 상체만 남아 장기를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격통으로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아까 전 카라의 소원권을 두고 그와 다투던 부채든 여인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죽이라고 소리친. 인간의 상체에 전갈의 하체를 가진 괴물이기도 했다. 세 사람이 놈을 향해 다가갔다.

“인간의 기억을 멋대로 주무르고, 과거를 기만하며 현재를 농락하려 한 벌이야. 맛이 어때?”

카라가 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하수인을 내려다봤다. 벨로크가 덧붙였다.

“나한테 얼토당토않는 퀴즈를 풀게 한 대가이기도 하지.”

무게 잡고 있던 카라가 발을 삐끗했다.

“너, 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꼭··· 그리고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잖아!”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벨로크를 노려볼 때.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빌어먹을 사생아 년이. 용의 주문 몇 개를 주워 먹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군.“

사생아라고?

하수인은 피를 토하면서도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요약하자면 한 세계의 주인이 깨어난 이상. 그 세계의 침입자들은 큰 페널티를 받는다. 지금 자신들이 이렇게 일거에 쓸려나간 것도 그들의 세계가 아니었기에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해서 졌다는 나름의 변명이었다.

“우리가 왜 이토록 무모하게 달려들었을까? 그건 바로···”

“시간 끌기였다고? 그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다.”

벨로크가 검을 휘둘렀다. 하수인의 머리가 잘려 나가며 바닥을 툭 굴렀다.

“늦었다. 이미 시작됐으니··· 게다가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

하수인은 텅 비어버린 눈동자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보던 벨로크는 시선을 돌렸다. 짝. 경쾌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델이 카라의 엉덩이를 때리고 있었다. 저건 또 오랜만에 보네.

“악!”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나,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눈을 뜨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단 말이야!”

벨로크가 한 마디 뱉었다.

“아델. 너도 마찬가지였잖나. 그만 탓해라.”

눈물을 찔끔 흘리던 카라가 아델을 노려보았다.

“마찬가지? 그렇다면 아델 너도?”

“벨로크 님! 그건···! 저희 둘만의 비밀이잖습니까!”

아델이 배신당했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는 제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요 앙큼한 꼬맹이가!”

카라가 아델에게 달려들었다. 둘은 한동안 서로 볼을 꼬집고 깨물며 투닥거렸다. 못 본 사이 많이 친해졌구만, 그 꼴을 보고 있던 벨로크가 목걸이를 툭툭 쳤다. 포탈을 열란 뜻이었다. 어느 정도 힘을 회복했는지 노르드가 제 의지를 전해왔다.

[음. 문제가 좀 있군.]

“문제?”

[아직 이 세계에 포탈의 생성을 저해하는 방해자가 있다. 놈이 파장을 교묘하게 교란하고 있어. 녀석을 우선 처리해야 될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하지?”

[저 문 너머 우리가 왔던 곳으로 가보거라. 그곳에서 놈의 냄새가 난다.]

벨로크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하수인을 힐끔 살피다가 두 사람을 툭툭 쳤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전했다.

“내 심상 세계에 아직도 그런 기생충 같은 놈이 남아있다고?”

카라가 이를 갈며 로브 자락을 걷었다. 세 사람은 피와 살점으로 범벅된 융단을 터벅터벅 건너 저택의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발끝으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붉은색 융단이었다.

벨로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빛나는 샹들리에와 잘 차려진 식탁, 그리고 유리잔들까지. 아까 전에 봤었던 파티장의 광경이 일행을 맞이했다. 조금 전과 다른 것은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 대신. 어린애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들이 옷을 입은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라가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기억대로라면 분명 정원이 나와야 되는데?”

“지금 저택 문을 열었는데. 또다시 저택이 나온 겁니까?”

“우리가 아까전에 봤던 광경이군.”

그 순간. 끼이익 일행이 열고 들어왔던 저택 문이 저절로 닫혔다. 잠겼나? 벨로크가 다시 문고리를 돌렸다. 삼류 공포 영화를 떠올렸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문은 손쉽게 열렸다. 그리고 또다시 파티장의 광경이 나타났다. 피와 살점은 어느새 다 사라져 있었다.

“음?”

벨로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달라진 광경이 또 있었다. 어린아이만 했던 인형들의 크기가 훌쩍 커져 있었다. 거진 인간만 한 크기로 바뀐 것이다. 카라의 비명이 들렸다.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저택에 있던 인형들의 모습 역시 뒤쪽 문 너머로 보이는 저택의 것과 똑같이 바뀌어져 있었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살색 피부가 번들거렸다. 인형들은 하나같이 팔다리를 꺾은 채, 제각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 안에 감도는 이 기이한 기운. 지금껏 일행이 겪은 이 요상한 사태가 합쳐져 꽤나 꺼림칙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것에는 각 관절 부위마다 동그란 구체가 들어간 저들의 모습. 정성 들여 조각해놨다고는 하나 빛이 없는 탁한 눈동자. 인간과 똑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숨을 쉬지 않는,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는 저 무표정한 얼굴 등이 원인임이 틀림없었다.

일행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그 순간. 가가가가가각. 관절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인형들의 고개가 일시에 돌아갔다. 그리고는 눈은 멍한 상태로 미친 듯이 이빨을 달싹거렸다.

키키키키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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