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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05화 (205/222)

205

심상세계

빛으로 이루어진 알갱이가 점차 커져갔다. 이윽고 그 빛은 하나의 형체를 이루다가 스르르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벨로크 님···”

은색으로 번쩍거리는 갑주를 입은 성기사. 아델이 그를 올려다봤다.

“정신이 좀 드나?”

벨로크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아델이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뒤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당신 누구야! 대체 누군데 부모자식 간의 일에 끼어드는 거야?”

벨로크가 몸을 돌렸다. 시커먼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촌부가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두건을 쓴 초췌한 인상의 중년 여인도 손짓했다.

“아델! 어서 이리로 오렴!”

벨로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저들 입장에서는 느닷없이 작은 소녀가 다 큰 처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여전히 아델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현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현실이 아닌 세상. 무언가가 비틀린···

“···닥쳐.”

그가 생각할 때. 아델이 중얼거렸다. 저들은 이를 못 들은 것 같았다. 두 부모가 다시 말했다.

“아델! 이리 오래도!”

“이건 훈육이요. 외부인은 끼어들지 말고 가···”

“아-가-리! 닥치라고!”

스르릉. 발작하듯이 소리친 아델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벨로크를 지나쳐 제 아비라는 작자를 베었다.

“끄아악!”

가슴께가 깊게 베인 중년인이 털썩 쓰러졌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피 묻은 옷 사이로 새하얀 뼈까지 보일 정도의 중상이었다. 중년 여인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멍하니 굳어있다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아, 아델! 아버지한테 이게 무슨···”

“닥치라고 했지! 네년도 똑같아! 아니! 더 악질이지!”

아델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허리띠에는 작은 원통형의 기둥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집어 들자 철컥 소리가 울리며 작은 창날이 생겨났다. 아델은 그것을 빛살처럼 투척했다.

“윽···”

빛살은 무정한 창날이 되었고, 그것은 제 어미의 배를 관통했다. 결과적으로 부부는 움찔움찔 경련하며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려댔다.

“하아, 하아. 하아···”

얼굴이 시뻘게진 아델이 제 무릎을 잡은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현실이 아니라고는 하나. 아무리 부모 같지 않은 인간들이라고 하나. 한때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는 했던 혈육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다. 벨로크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아델의 숨소리가 가라앉았을 때. 이번에는 울음소리가 터졌다.

“누나. 어째서··· 어째서 엄마 아빠를···”

“준···”

채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작은 아이의 모습은 보호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델 역시 그런 듯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몸을 떨었다. 이번만큼은 손을 쓰기가 힘든 모양이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벨로크가 말하려는 찰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작은 아이의 머리칼과 눈동자는 아델처럼 시커먼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그 눈을 자세히 살펴보니 동공 한가운데서 빛이 번뜩였다. 먹물 같은 눈동자 색보다도 더 진한··· 좀 더 끈적한 무언가···

그가 생각하던 찰나. 칼날이 번뜩였다. 다가오던 아이의 머리가 퍽 바닥을 굴렀다. 아델은 무심한 눈동자로 칼에 묻은 피를 휙 털었다. 그리고 장창을 불러들여 허리춤에 끼우고는 말했다.

“준은 제가 다섯 살이 되던 날. 역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아. 그래? 다음에는 참고하도록 하지.

대답한 것은 바닥을 굴러다니던 아이의 머리통이었다. 씨익 웃은 녀석은 쇠 긁는 소리를 내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며 제 본모습을 드러냈다.

꿈틀꿈틀.

머리칼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수백 개의 촉수들이 흐늘거렸다. 그 끝에는 좌우로 동공을 굴리고 있는 눈알들이 심지처럼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각질 일어난 피부 위로 거대한 외눈이 번뜩였다. 벨로크가 보기에 저건 날아다니는 눈깔 괴물이었다.

일어나라 과거의 악몽들아.

기괴한 행색의 괴물이 톱니 이빨을 딱딱거렸다. 이에 맞춰 쓰러져 있던 아델의 부모들 역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그들의 목이 360도로 돌아가며 비비꼬이기 시작했다.

“아데에에엘! 너어어어! 계속 그따구로 행동하면 노예로 팔아버릴테다아!”

“아데에에엘! 우리가아아아 참아야아한단다아아아! 아버지도오오 진심으으으은 아니었을꺼야아아!”

대롱거리는 목은 길게 늘어진 탓에 마치 거인처럼 하늘 위로 솟았고, 때가 탄 손톱은 단검마냥 두툼하고 날카롭게 돋아났다. 반면에 피부는 투명한 회색빛을 띠고 있어 몸 안의 혈관과 장기가 꿈틀거리는 게 두 눈으로 다 보일 정도였다.

이거 간만에 보는 역한 놈인데. 꿈에 나올까 봐 두렵군. 생각하던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이 기괴한 세상이 꿈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이곳에서의 죽음이 현실에서의 죽음과 똑같다는 것만 뺀다면 뭐 틀릴 것도 없었다.

그아아아아!

눈앞에서는 괴물이 된 아델의 부모가 덮쳐오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외눈 괴물이 눈동자 끝에서 광선을 쏘아냈다. 하지만 벨로크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죽는 것은 저들이었다. 우리가 아니라.

“아델. 저 눈깔 녀석을 맡아라.”

“네.”

사이한 광선이 흙바닥을 덮쳤다. 피다만 싹들과 꿈틀거리던 벌레들이 돌이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땅을 박찬 뒤였다. 스르릉. 벨로크는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요정식 장검이 이계의 석양빛을 받아 붉은빛으로 번들거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칼을 휘둘러 쏘아지던 괴물의 팔다리를 토막 냈다. 이윽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한 놈의 목을 베어버리고, 버둥거리던 다른 놈의 목을 잡아챘다.

“끄어어. 아데에엘. 나는 네 아비다. 그딴 눈빛으로 날 보지 마··· 조금 더 날 존경하라-악!”

끝까지 아델만을 바라보던 괴물의 목이 뿌드득 뜯겨나갔다. 벨로크는 피 묻은 손을 휙 털며 고개를 돌렸다.

공중에 있던 눈깔 괴물이 사특한 마안을 번뜩이고 있었다. 놈은 흐느적거리는 수백 개의 촉수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흙먼지가 와르르 솟으며, 돌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 포화 속에 있던 아델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기도문을 외우며 연신 장창을 휘둘렀다.

키아아악!

창날에 서린 불꽃이 풍차처럼 돌아가며 하나의 벽이 되었다. 괴물의 촉수는 이를 뚫지 못하고 지글거리며 녹았다. 놈은 괴성을 지르며 외눈을 번뜩였다. 초록 광선이 번뜩였다.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힘이었다. 아델은 육중한 갑주를 걸친 채, 재빨리 움직였다. 하지만 빛은 괴물의 시선을 따라서 계속 움직였고, 그녀는 곧 그것에 휩싸일 것 같았다. 도와줘야 되나?

그 순간. 달싹이던 아델의 입술이 꾹 닫혔다. 이윽고 마지막 한 구절을 힘주어 말했다.

“타올라라.”

그녀의 왼손에서 불로 이루어진 십자가 낙인이 떠올랐다. 그러자 낙인은 괴물의 몸에도 떠올랐고, 곧 녀석의 주위로 지글거리는 불꽃이 소용돌이쳤다.

끄아아아!

생살이 녹아드는 고통에 괴물은 발버둥 쳤다. 뿜어지던 광선 또한 미러홀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철컥. 아델의 건틀릿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쏘아진 장창이 타오르던 괴물을 꼬치처럼 꿰뚫어버렸다. 놈은 푸스스 재를 흩날리며 한 마디 내뱉었다.

너희들의 눈에는 내가 약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약한 건 너희들이다. 멍청하기 때문이지. 감히 그분을 거스르려 하다니. 키키키. 기다려라··· 그분의 그릇과 배신자의 종년아. 곧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가··· 오롯이···

“뭐라는 거야. 괴물 새끼가.”

중얼거린 아델이 손을 꾹 쥐었다. 그러자 낙인이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며 뻥 폭발을 일으켰다. 그녀는 머리칼을 한 번 쓸어올리고는 몸을 돌렸다. 벨로크가 그 자리에 있었다.

“벨로크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

두 사람은 엉망이 된 논밭을 뒤로한 채, 언덕길을 올랐다. 벨로크는 걸어가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이를 받아들였다.

“벨로크 님께서 저를 깨우셨을 때부터 이곳이 현실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속 세상이었을 줄은···”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언덕길이 끝났다. 저 멀리 떨어지고 있던 해가 산등성이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내리쬐는 황혼이 앙상하게 마른 나무와 걸려있던 그네를 붉게 물들였다.

“아···”

그 목가적인 풍경이. 혹은 제 기억 속에 남아있었을 몇 안 되는 좋은 추억이 아델의 심금을 울린 것 같았다. 뚜벅뚜벅 걸어가던 아델은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윽고 초라한 나무와 그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벨로크가 말했다.

“밀어줄까?”

아델이 화들짝 놀랐다.

“네, 네?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카라와 이자벨을 찾으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너 못지않게 다들 강한 여자들이다. 게다가 노르드로부터 반응이 없어서 어차피 바로 가지도 못해.”

“···그럼”

아델은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그네 위로 올라섰다. 꽤나 잘 만들어진 건지. 아니면 이 환상 속에서는 물리법칙도 다르게 적용되는지. 그네는 끼이익 비명을 질렀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벨로크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밀었다.

아델의 검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녀는 처음에는 발을 오므리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는 양발을 하늘 높이 뻗었다. 그 소음 사이로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마을은 무척이나 가난한 촌락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번성했었다고 들었는데. 제가 태어났을 때쯤에는 광산도 농지도 없는, 그야말로 메마른 땅이었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묵묵히 경청했다.

“있는 건 없는데. 뜯어가는 건 너무도 많았습니다. 인두세며 토지세, 통행세와 결혼세는 기본에 창문세. 우물세. 심지어는 우리 손으로 만든 식기를 쓰는 것에까지 세금을 먹이더군요”

엿 같은 세상이지. 지배계층은 어떻게 하면 이들을 수탈할까 하는 생각뿐. 적어도 내가 본 귀족들은 다 그랬어.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점점 웃음이 사라져 갔습니다. 더 이상 이웃에게 인사하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빌려주거나 아이를 맡아주지도 않았죠. 그저 제 가족을 위해서. 나중에 가서는 제 안위만을 지키기 위해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아델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점점 술을 입에 대는 일이 많아지시더니 종래에 가서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취하기만 했죠. 나중에 가서는 하나뿐인 딸을 노예상에게 팔아버릴 정도로···”

그네가 지르는 비명이 점차 커져갔다. 벨로크는 손의 힘을 조절했다.

“이 그네는 아버지가 정녕 아버지라고 불릴만한 사람일 때. 그 사람이 나한테 조금이나마 다정하게 대해줬을 때. 만들어주었던 물건입니다. 전 이걸 타는 게 좋았습니다. 고된 농사일로 손발이 부르터도, 매 맞은 상처가 욱신거려도 이걸 타는 순간만큼은 그 고통을 잊을 수 있었거든요.”

뿌드득. 그네가 툭 부서졌다. 아델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조각난 그네의 파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살아가면서 깨닫게 됐습니다. 그 빛바랜 추억에 안주한다면 당시에는 행복하겠지만, 결코 나의 불행한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요.”

그녀의 앞으로 움직인 벨로크는 아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서 천천히 일으켜주었다. 아델은 벨로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악착같이 발버둥 치던 그때. 하지만 끝내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던 그때 당신이 나타나셨던 겁니다.”

벨로크 역시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오후의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종자도 아니었고, 성기사도 아니었다. 아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벨로크 님··· 전··· 당신을···”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인의 얼굴을 슬며시 감싼 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델은 움찔 놀랐지만,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양팔을 벌려 조심스레 그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심상 세계가 요동쳤다. 불타고 토막 나 있던 괴물의 사체와 엉망이 된 논밭, 음울한 마을의 광경들이 누가 붓으로 칠한 듯 스르르 사라졌다. 이윽고 그곳을 가득 채운 것은 따스한 광채와 흩날리는 꽃들의 향연이었다. 그 안온한 온기는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쌌다. 맞대고 있던 입술만큼이나 따스하며 향기로웠다.

잠시 후. 푸른 원반으로 된 포탈이 열렸다. 그것은 곧 크기를 키우더니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포탈을 넘나드는 기분은 썩 기이했다. 부유감, 토기, 멍함. 형용할 수 없는 온갖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뇌에 쿡쿡 박히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그 포탈은 두 사람을 퉤 뱉어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 융단이 깔린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아가씨의 생일 파티에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턱시도를 곱게 차려입은 하인이 경쾌한 목소리로 그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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