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심상세계
눈앞의 모든 것이 흐물 녹아내리며 여러 가지 색채로 뒤섞였다. 한없이 곤두서있던 정신은 어딘가로 쑥 가라앉으며 아득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대로 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영혼만 남아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사지가 분해돼 제 동료들에 의해 봉인된 녀석 또한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
그렇다고 해도 놈이 저지른 패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 내가 행하려는 일 역시 세계를 지킨다는 거창한 대의보다도 복수심이 더 크니까. 엿 같은 새끼. 기다려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미지의 주문에 대한 공포, 그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남은 단단한 결의와 분노.
감각의 혼돈을 느끼던 벨로크는 슬쩍 눈을 떴다.
초록 잎사귀가 쨍한 태양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근처에서는 산새와 풀벌레들이 아우성쳤다. 코로 와닿는 녹음.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이제는 고향에서는 느끼기 힘들 생명의 향기.
“어떻게 된 거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회색 도시가 아니다. 그가 요근래 살아 숨셨던, 이제는 퍽 익숙한 야만의 땅이었다. 그 순간. 목걸이가 부르르 떨리며 노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은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가 좀 생겼다.]
벨로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숲이었다. 동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몇 가지 악재가 겹쳤기에 일어난 사고다. 일단 너와 절대신이 가진 강한 운명에 세 사람의 영혼이 한데 묶여 있었다는 것. 우리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놈이 중간에 수를 쓴 것. 그로 인해 너의 의식 세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의식으로 들어온 것...]
그러니까 이곳은 아델이나 카라, 이자벨 셋 중 한 사람의 심상 세계란 거지? 말을 하던 노르드가 작게 덧붙였다.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다. 정말 미안···]
“사과는 됐다. 세 사람은 무사한가?”
[그래. 정확한 상태까지는 모르지만, 무사하다. 그들의 강인한 영혼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다행이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흩어졌다면 다시 모여야겠지. 우선 이 세상의 주인을 찾거라. 너와 강한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네가 가야할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문을 열겠다.]
미아 찾기로군. 벨로크는 눈을 감았다. 양손에 실을 매달고 팽팽히 당기듯.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쪽인가? 벨로크는 이끌림을 따라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주변을 가로막은 나뭇가지가 투둑 부러지고, 수풀이 제 몸을 비켰다. 얼마 걷지도 않았건만 그는 금세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대로변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변화가 너무 빠르잖아. 확실히 정상적인 세상은 아닌 듯한데. 곧 길을 걸어가던 그가 멈춰섰다. 대로 옆에 나 있는 평평한 돌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거 뉘슈?”
입을 연 자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머리는 정수리가 다 벗겨져 외곽만 드러내고 있었고, 누렇게 때탄 옷은 옷이라기 보다는 누더기로 불러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눈을 감고 고개만 돌린 것이 장님인 듯했다.
떠돌이 맹인 늙은이와 자갈과 모래가 가득한 시골길. 저 멀리 보이는 양치기와 양들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별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벨로크는 어째선지 과거를 회상했다. 분명···
“거 누구냐고 묻지 않소? 말이 없는 걸 보니 도적인가?”
그 순간. 노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철그럭 거리는 쇳소리를 들은 듯했다. 벨로크가 말이 없자 그가 다시 말했다.
“클클클. 이 늙다리한테서 가져갈 거라고는 한 줌 남은 비루한 삶뿐이오. 굳이···”
“손에 피를 더 묻히고 싶다면야 나야 아쉬울 것 없지.”
“으응?”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벨로크가 내뱉자 노인이 당황했다. 그 모습에서 벨로크는 자신이 누구의 의식 세계로 왔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뭐 하나만 묻겠소.”
“그러시구랴. 마법사 나리.”
“이곳이 검은 탄광 마을이 맞소?”
“아아··· 나리께서도 황금이 탐나서 이곳으로 오셨나? 그렇소. 이곳이 바로 검은 탄광 마을이오. 한때는 금은보화들이 쏟아져 나왔던 꿈과 희망의 땅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조금 바뀌었소.”
노인은 연극배우처럼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텅 비어버린 탄광에서 과거의 영광을 찾는 한량들이 모인 곳. 제 애미애비를 갖다 버리는 패륜아들이 모인 곳. 배 아파 낳은 자식새끼들마저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곳이 바로 저곳이요. 뭐,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별로 특별한 것도 없다만 나는 그래도 저곳으로 가는 걸 추천하고 싶지는 않소. 더러운 꼴을 많이 볼 거요. 그쪽이든 마을 쪽이든.”
노인은 숨이 찬지 켈륵거리며 기침했다. 찌그러진 눈가와 입가 주름. 송골송골 피어오르는 땀은 이 세상이 정녕 현실처럼 느껴지게 했다. 뭐, 현실이기는 하지. 그 아이의 기억 속에 있던 곳이니까.
“고맙소.”
벨로크는 죽어가는 떠돌이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마을 내부의 질척한 흙길 위로는 인분과 짐승 똥들이 굴러다녔다. 냄새가 고약했다. 도로가 이 모양이니. 주거 환경 역시 엉망이었다.
담장도 없이 얇은 나무로만 지어진 판잣집들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위에 얹어져 있던 밀짚들은 이미 썩어서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구멍 숭숭 뚫린 옷에 때가 탄 얼굴,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낸 주민들이 서 있었다. 아이, 노인, 중년, 청년 할 것 없이 그들은 핏발선 눈으로 벨로크를 보며 중얼거렸다.
“기사가 왜 이곳에 온 거야?”
“세금은 냈잖아? 배까지 곯아가며 냈다고!”
“쉿. 목소리 낮추지 못해? 한스 가족처럼 벌거벗겨진 채, 개처럼 끌려가다 죽고 싶은 게냐?”
공포, 경외, 증오. 하나같이 음습한 감정들이 피부 위로 전해져 왔다. 평생토록 부림만 당하는 자들의 절절한 한이었다.
몇 년 만이지? 얼추 십 년은 지난 거 같은데. 벨로크는 주민들이 뭐라 지껄이든 말든 마을을 가로질러 언덕길을 올랐다. 어차피 실제가 아닌 공상 속 존재들이었다. 괜히 일일이 반응해줄 필요 없었다. 그때. 노르드가 말했다.
[실체 없는 존재들이라고는 하나. 조심해야 한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곧 현실에서의 죽음과도 동일하니까.]
아직 놈의 영역으로 가지도 않았건만, 노르드가 경고했다. 그래,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이함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 정보가 더 필요했다.
“이 요상한 세계에 대해 좀 더 설명해봐라.”
[그 사람의 가장 강렬했던 기억들. 아름다운 추억, 혹은 트라우마를 일으킬 만큼의 악몽 등. 한 존재가 겪어왔던 모든 삶의 굴곡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곳. 심상 세계다.]
벨로크는 악몽이란 단어에 주목했다. 확실히 이 기억은 그 아이한테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르드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또한 이 세계는 단순히 개인의 상상력과 과거 경험들에 의해 짜여진 곳이 아니다. 일종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릇?”
[기억은 곧 마음의 저장고이며, 그것은 곧 영혼을 의미한다. 즉 이 세상은 영혼을 담는 매개체. 너희들은 혼만 남은 채, 이 세상을 방문한 이방인인 것이야.]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벨로크는 현대인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았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 사람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인가?”
[그래, 자칫 큰 소란을 일으켰다간 그 주인에게도 영향이 갈 것이다. 마음이 부서진 사람은 살아있되. 산 것이 아니게 되니까.]
벨로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평소였다면 그렇게 큰일은 없었을 것이다. 네 동료들의 영혼은 고된 시련으로 단련되어 그 깊이가 남다르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지. 우리가 지금 누구의 장난질 때문에 이곳에 떨어졌는지. 그리고 놈이 무슨 짓을 할 수 있을지.]
“녀석이 공격해온다는 건가?”
[다른 사람의 의식에 침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에 자신을 간섭시키는 일. 그 사람의 세상 자체를 적으로 돌려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막대한 위험부담이 존재하지. 놈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모든 것을 잃었었던 망령은 제 영역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릴 것이야.]
노르드의 말대로라면 시스템 창. 이방인 신을 상대하러 회색 도시로 진입한다면 그곳에 있는 모든 존재가 적이 된다는 뜻이었다. 일행은 퍽 불리한 격전을 치르게 되리라. 하지만 벨로크는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한 걱정 대신 현재를 바라봤다.
“어찌 됐든 세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건 분명하군.”
[그렇다. 놈이 직접 오지는 못해도 제 하수인··· 지지지직. 너희들의 유대를 해치···$%&* 아무리 견고한 영혼이라도 약간의 틈 생긴다··· 치명적···*#$%]
노르드의 목소리에 잡음이 끼어들었다. 목걸이가 부르르 떨리다가 피식 빛을 잃고 꺼져버렸다.
그는 목걸이를 쥔 채, 살피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둔덕 위로 올라서자 넓고 평평한 땅이 그를 맞이했다. 옆에는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 한 그루가 놓여 있었고, 가지 위로 밧줄과 판자로 만든 조잡한 그네가 매여져 있었다.
“아델! 이 멍청한 년아! 어서 움직이지 못해!”
“네, 네. 아버지.”
벨로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개간이 될까 싶을 정도로 엉망인 상태의 논밭 하나와 초라한 집 한 채가 보였다. 밭 위에는 네 명의 인영이 있었는데. 부부로 보이는 중년인들과 아이들이었다. 여자아이 한 명, 그보다 작은 남자아이 한 명. 그들 모두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덕을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네 사람은 그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지 계속해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천을 둘러쓴 수척한 인상의 중년 여인은 허리를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했고, 아이들은 고사리만 한 손으로 돌을 골라냈다. 중년 남성은 쟁기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허리춤의 술을 꿀꺽댔다. 중간중간 여인과 소녀에게 손찌검과 욕설을 하는 것도 예사였다.
“뭐 하고 있어! 며칠 안에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다 굶어 죽고 싶어? 아니면 노예로 팔려 갈래?”
침까지 튀기며 윽박지른 중년 사내가 발길질을 했다.
“꺅.”
이를 얻어맞은 소녀가 흙바닥을 굴렀다. 고통스러운지 그녀는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끙끙댔다. 하지만 도와주는 이 하나 없었다. 눈이 시퍼렇게 멍든 어미는 남편을 보며 뭐라 입을 떠듬거리다가 그가 노려보자 히익.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동생뻘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공포심에 짓눌린 저들은 제 남편이자 애비가 내보이는 방종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벨로크는 자연과 맞서 싸우며 수확을 얻어내는 직업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적어도 메마르고 갈라진 저 땅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비틀거리고 있는 저 중년인이 제대로 된 농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술독에 빠진 건달과 손찌검 받는 아내. 그 아래에서 태어나 학대받는 아이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흔해빠진 이야기이자 별것 아닌 비극이었다. 그리고 제가 아끼던 아이의 끔찍했던 과거사이기도 했다.
터벅. 마침내 벨로크의 발걸음이 멈췄다. 중년인은 막 쓰러진 아델한테 손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가 그 손목을 잡았다.
“이년이··· 너도 또 맞고 싶···”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번쩍거리는 판금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가 제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벨로크는 손아귀에 힘을 슬쩍 주었다. 중년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사내를 휙 던져버린 후. 쪼그려 앉았다.
먼지투성이에 흙투성이가 된 소녀가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려서 그런지 젖살이 덜 빠진 통통한 얼굴에 여전히 제 특징을 자랑하듯.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 인상만큼이나 날렵한 붉은 입술. 목 언저리까지 오는 단발머리.
내가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부터 늘 함께 해왔었던 아이. 언제나 제 자신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주며 본인을 희생해왔었던 아이. 내 소중한···
벨로크는 아델을 조심스레 일으켜주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
그 순간. 소녀로부터 범접할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