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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창문으로 투과해온 달빛이 쓰러진 다섯을 비추었다. 그들 주변으로는 금줄이 쳐져 있고, 동서남북 방위로 반짝이는 구슬들이 박혀있었다. 의식을 치르는 동안 정신을 잃은 다섯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어린아이 손에 칼 하나만 쥐여줘도 그들을 죽일 수 있기에 카라가 쳐놓은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경비를 더 강화할까?”
베로니카는 벨로크의 머리에 베개를 끼워주고, 이불까지 덮어주며 말했다. 질린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화린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습격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전쟁이라도 난다면 모를까.”
이곳은 내성의 꼭대기 층에 있는 첨탑이었다. 계단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그들은 내성을 빙 둘러싼 채,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바깥에는 두꺼운 성곽마저 있었으니. 화린의 말마따나 적들이 하늘을 날아오거나 도시가 함락되지 않는 이상. 이곳은 영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전쟁이라···”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베로니카의 표정에 미약한 불안감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는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곳과 심상 세계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고는 하나··· 어찌 됐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군. 나는 가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겠다. 이곳의 보호는 화린 너한테 맡기마. 뭐 필요한 것이 있느냐?”
베로니카가 그렇게 말한 순간. 첨탑의 문이 부서질 듯이 쿵쿵거렸다.
“영주님! 영주님!”
“내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거늘!”
베로니카가 이를 으득거렸다. 데비안이 눈만 슬쩍 보일 정도로 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창백해진 안색의 병사가 서 있었다.
“스, 습격입니다! 신성 왕국의 군대가 코앞까지 당도했습니다!”
“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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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대신 갑주를 챙겨입고 허리에 검을 찬 베로니카가 다급히 외성으로 향했다. 그녀는 참모들로부터 주변 상황을 전해 들으며 생각했다.
요 몇 주간. 신성 왕국의 군대에 의해 서부가 쑥대밭이 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실제로 국경에 있는 영주들로부터 서부의 귀족들이 재산과 병사들을 이끌고 몸을 의탁하러 왔다고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의 불길이 그 잠깐 사이. 이곳까지 닿을 줄은 몰랐다.
놈들이 정말 신성 왕국의 군대가 맞나? 다른 세력들이 위장했을 가능성은? 하지만 포위당한 채 수도에 틀어박힌 중앙은 여력이 없고, 동부는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아리안 때문에 뒤통수가 근질거려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북부 역시 갑작스럽게 대설산을 넘어와 남하를 시작하는 야만인들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정말 신성 왕국의 군대이며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의 진군 속도로 이곳까지 당도했다는 건데. 그게 말이 되나? 국경에 있던 영주들과 첩자들 전부가 변절한 것이 아니라면야···
바쁘게 돌아가던 베로니카의 머리가 굳었다. 그녀는 막 돌계단을 넘어 성벽 위에 올라선 상황이었다.
“음···”
태양과 달이 교차되어 있고, 그 위로 십자가가 새겨진 깃발들이 펄럭거렸다. 하지만 깃발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에 있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구를 깊게 눌러 쓰거나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은 수천의 인파가 온몸에 피를 흠뻑 묻힌 채,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방금전 까지 전투를 치르고 온 흉병들처럼 보였다. 진한 피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영주님!”
서쪽 문의 방비를 맡고 있던 수비대장이 다가왔다. 지글거리는 횃불로 인해 주황색 음영이 진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있었다. 베로니카가 소리쳤다.
“이만한 숫자가 올 때까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그 눈깔은 장식인가?”
“죄, 죄송합니다!”
냅다 고개부터 숙인 경비대장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관측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원에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더니 느닷없이 저들이 나타났단다.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지금 시각은 자정이 넘어간다. 어떤 지휘관이 어둠을 휘장 삼아 수천의 병사들을 성벽 앞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실로 미친 짓거리였으니. 누굴 탓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시기도 너무 공교롭군. 하필 그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들이닥치다니···’
아무리 따져봐도 이상했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였다. 베로니카는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철갑을 입은 기사들이 구령을 외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곧 견장을 찬 하사관들에게 전달되었고,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적들의 공세에 대응하고자 했다. 여기저기 뜯어 모은 패잔병들에 불과하던 남부군은 실전과 훈련을 거쳐 점점 하나의 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는 쏘지 마라.”
시위를 당긴 궁수들의 아래에는 화살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소집을 받은 일꾼들은 끓는 기름통들을 쉴 틈 없이 성벽 위로 날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성 왕국의 군대는 성벽을 향해 전진해오고 있었다. 아무리 오늘 밤이 만월이라고는 하나. 횃불도 없건만, 낙오하는 이 하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눈깔이야?”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장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벤토!”
수염 기른 마법사가 주문을 외웠다. 베로니카는 그의 도움을 받아 큰 목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나는 루텐버그의 성주이자 스물일곱 깃발의 주인, 남부군의 총지휘관 베로니카다. 네놈들은 대체 뭐 하는 무뢰배들이기에 야음을 틈타 이 땅을 침공한 것이냐!”
야밤의 기습. 의도는 명확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구태여 소리쳤다.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다. 저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관습과 명예 따위는 던져버린 걸까? 십자가를 등에 업은 병사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쿵쿵쿵. 발 디디는 소리가 나중에 가서는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지진으로 바뀌었다. 남부군은 눈을 부릅떴다. 저들은 그냥 달려오고 있었다. 공성 장비도 사다리도 없이 그냥 들개처럼 덤벼들고 있었다.
“쏴라!”
베로니카가 소리치고, 경비대장이 신호했다. 궁수들이 손을 놓자 활줄이 퉁. 튕기며 검은비들이 쏟아졌다. 맞은 것도 있고 그냥 발밑에 꽂힌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갑옷을 뚫지 못하고 툭 부러졌다. 그러나 적어도 수백은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저 멍청이들은 화살꽂이가 되어 차디찬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그때. 성벽 위로 흰 수염을 기른 노인과 십자가 무늬가 새겨진 갑주를 입은 기사가 올라왔다. 신성 왕국 출신의 성직자. 성자 가우덴시아와 저스틴이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들은 평범한 병사들이 아니에요!”
“평범한 병사들이 아니라고?”
베로니카는 곧 두 사람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분명 쓰러졌었던 신성 왕국 군 병사 하나가 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온몸에 화살깃이 잔뜩 돋아나 있었는데.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채, 성벽 위에 있는 인간들을 노려보며 괴성을 질렀다.
으캬아아아악!
놈이 고개를 하늘 높이 젖혔기에 쓰고 있던 투구가 벗겨졌다. 그 바람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나병 환자처럼 녹아내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냥 병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세 갈래로 갈라진 혓바닥으로 땅을 쓸지도 않았고, 눈동자도 붉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네발로 기어 오며 성벽에 제 손톱을 박지도 않았다.
“괴, 괴물!”
그렇게 갑옷을 찢으며 제 본 모습을 드러낸 괴물들만 수천이었다. 즉 눈앞에 있는 신성 왕국의 군대 전부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화살을 쏘던 남부군 병사들은 큰 혼란과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주민들의 부탁을 받고 작은 뒷동산의 악귀나 괴물을 죽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태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소요일 뿐이었다. 괴물 하나 대 수십 명 인간들의 싸움이었으며, 어디까지나 남부군의 주된 적은 같은 동포들이었다. 경험의 부재가 주는 차이는 컸다.
-그 행색이 실로 기이하며 달려드는 모습이 흡사 악귀와도 같다.
베로니카는 서편에 적혀있던 신성 왕국 군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삿된 마력과 시체들을 기워 만든 키메라들과 악마의 저주받은 피를 이용해 만들어낸 악귀병들입니다! 창칼로는 잘 죽지 않아요!”
소리친 가우덴시아가 다급히 기도문을 외웠다. 그를 중심으로 광휘가 퍼져나가며 병사들의 떨리던 심장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깐의 망설임은 치명적이었다. 이미 악귀병들은 개미가 과자를 갉아먹듯 성벽으로 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드높은 성은 보통의 성들보다 훨씬 더 견고하며 높은 성곽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렇게 달라붙어서야 별 소용이 없을 듯 보였다. 수비대장보다도 빨리 정신을 수습한 베로니카가 소리쳤다.
“기름을 부어라! 마법사! 주문을 써!”
병사들은 끓어오르던 기름통들을 아래로 부었다. 몇몇은 너무 겁에 질려 그만 손을 놓아버렸기에 제 몸에 그것을 덮어썼다.
끄아아악!
으라라라악!
인간과 괴물의 비명이 뒤섞여서 울렸고, 살타는 냄새가 고약하게 풍겼다. 온몸이 시커멓게 변한 악귀병들이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놈들은 잠시 경련하는 듯싶더니 다시금 벌떡 일어나 벽을 기어올랐다. 실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아-필리오!”
그 순간. 하늘이 번쩍이며 푸른 벼락이 짓 쳐들었다. 이윽고 시뻘건 불덩이, 보랏빛을 띤 광선이 그사이를 수놓았다. 마법사들의 주문이었다.
다행히 그 파괴적인 원소의 행렬은 악귀병들의 몸을 잿더미로 만들고, 사지를 토막 냈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숫자는 소수였고, 그들에게는 정신을 집중한 시간과 주문을 외울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악귀병 하나가 성벽 위에 그 족적을 남겼다.
그르르르르
놈은 몸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크고 기다란 팔을 추욱 내려놓고 있었다. 입안에는 톱니 이빨이 가득했고, 한쪽 안구 역시 툭 삐져나와 시신경을 덜렁거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달빛과 근처에 세워져 있던 횃불 빛이 괴물의 모습을 한층 더 끔찍하게 보이게 했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겁에 질려 벌벌 떨어댔다. 먼저 창칼을 들이밀면 놈이 자신부터 먹잇감으로 삼을 것 같았기에 나타난 방어기제였다. 그 틈에 약삭빠른 괴물은 씨익 웃으며 행동에 나섰다. 놈의 길쭉한 팔이 마치 채찍처럼 가까이 있던 병사에게 뻗어왔다.
“커억.”
병사는 가슴이 갈라지는 와중에도 창을 뻗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병사들 역시 창칼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악귀병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고통을 모르는 마비된 이성으로, 제 몸이 찢겨나가도 상관 않는 괴이함으로 손톱을 휘두르고, 이빨로 목을 물어뜯었다.
“끄아아아!”
삽시간에 하이캐슬의 성벽이 피와 살점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수백 마리의 악귀병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곧 인간과 한대 뒤섞여 끔찍한 혈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번쩍. 데비안이 휘두른 룬검이 악귀병의 팔을 갈라버리며 그 피를 쏟아내게 했다.
시커먼 검은 피였다. 하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이빨을 드러냈다. 딱. 데비안은 머리를 젖혀 이를 피하고는 룬검을 연신 휘둘렀다. 그의 중심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악귀병은 사지가 잘려 나가자 이를 딱딱거리다가 곧 추욱 눈을 감았다. 그가 소리쳤다.
“목을 노려라! 아니면 아예 토막을 내버려!”
이윽고 데비안을 위시로 한 특별한 비전을 지닌 기사들이 악귀병들을 토막 내기 시작했다.
“빛이 노래하길! 불손한 자들은 광명자의 진노 아래 쓰러지리라!”
성자 가우덴시아가 기도문을 외웠다. 그를 중심으로 샛노란 빛이 뻥 폭발했다. 그 빛은 악귀병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상처 입고 지친 병사들에게는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사라져라! 흉물아!”
그의 수호기사 저스틴 또한 성력으로 만들어낸 망치를 연신 휘두르며 괴물들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전사들은 소수였고, 일반적인 병사들은 여전히 괴물들에게 맥을 못 췄다.
점점 놈들이 점령하고 있는 성벽의 범위는 넓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것은 더 많은 괴물들을 불러일으켰고, 차가운 회색 무덤 위로 괴물과 인간의 발이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상황은 곧 난전이 되었다.
“각하를 모셔라!”
피투성이가 된 수비대장이 소리쳤다. 베로니카는 데비안을 위시로 한 친위 기사들의 손에 의해 내성으로 쫓기듯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생각했다.
화린을 불러다가 놈들을 막아야 하나? 그녀라면 필시 저 괴물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정신을 잃은 다섯을 지킬 사람이 없다. 안 된다. 그녀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일단 북문과 남문 동문의 모든 병사들을 집결시켜서···
“저, 저건···”
그때. 한 기사가 소리쳤다. 땀투성이가 된 베로니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새하얀 달빛 아래. 시커먼 점들이 벌떼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점들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곧 거대한 피막 날개들의 파도가 되었다. 미형의 얼굴을 가진 천사 대신 기괴한 얼굴을 가진 악마들이 지상에 강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끄에에에에!
이제 루텐버그는 완연한 혼란과 쏟아지는 피. 죽어나가는 병사들과 도망치는 시민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도시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