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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문을 열고 나가자 허리에 검을 찬 병사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벨로크는 대충 화답해줬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통로 저편에서 화린이 나타났다.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껑충껑충 뛰어오고 있었다.
“어? 벨로크 씨. 어디 가세요?”
“때가 됐소.”
벨로크는 주변의 시선을 생각해 짧게 말했다. 웃고 있던 화린의 얼굴이 굳었다.
“아···”
그녀는 짧게 탄식하더니 벨로크의 옆에 붙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일단 배부터 채울 생각이었다. 그때. 벨로크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어디로 가셨는데요?
-말해줄 수 없다.
-그렇다면 저희들 좀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벨로크 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요.
-지금 같이 어수선한 시기에 너희들 같은 야만인들을 들일 수는 없다.
-우리들은 베로니카 님의 호위도 맡았었고, 환자들도 돌보았어요. 함께 싸운 전우라고요.
-알지.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을 내쫓지 않고, 이렇게 말로 타이르는 거잖나? 돌아가라. 아니면 편지를 남기던지.
-그런···
경비와 실랑이를 하고 있던 아피아가 눈을 크게 떴다. 성 안에서 벨로크와 화린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피아! 리쿠씨!”
“벨로크 님! 화린 언니!”
“음! 이렇게 만날 줄은.”
“오랜만이오.”
초승달 섬에서 만난 옛 인연들이었다. 분명 자신한테 진 은혜를 갚겠다고 베로니카를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 후로는 정신이 없어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들의 얼굴이나 소식도 못 들었었고, 왜 그렇게 된 건지 알 것 같군.
“어떻게 된 일이지?”
벨로크가 경비를 보며 물었다. 경비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답했다.
“그것이··· 현재 도시가 내외부로 많이 어지럽다고 성의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경비대장께서 엄포를 놓으셔서.”
윗사람한테 괜히 트집잡히기 싫어서 이렇게 행동한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벨로크의 눈가가 가늘어지자 아피아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벨로크 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무시를 당했다면 한 번쯤은 화가 날 법도 한데. 참 착한 친구들이라니까. 네 사람은 성 대신. 도시 안에 있는 주점으로 향했다.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곳 인 듯. 내부는 밝았으며 바깥에는 테라스 역시 있었다. 무슨 카페 같은 느낌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벨로크의 얼굴을 알아본 주인이 귀한 술이며, 과자, 케이크 같은 것들을 내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피아와 리쿠가 허겁지겁 그것들을 먹었다. 잘 먹네. 밥도 안 먹이고 부렸나? 벨로크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떠난 줄 알았소.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거든.”
화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피아는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흝으며 말했다.
“벨로크 님을 처음 본 것은 후작군과의 전투가 막 끝났을 때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떨어지시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었죠. 하지만 당신을 뵈러 찾아가니 병사들과 기사들이 저희를 막아서더군요. 도시가 함락됐을 때도 그랬고, 성으로 들어가셨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예 밑선에서 차단시켜버렸다고? 벨로크가 혀를 찼다.
“베로니카가 그랬나?”
아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선 지시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그분은··· 우리가 벨로크님의 동료라고 얘기하며 찾아오자 아주 잘 대해주셨어요. 편의도 여러모로 봐주셨고, 로벤에서는 저희 이름으로 된 집과 재물까지 주셨거든요.”
“신용 있는 귀족이었다. 나쁜 여자 아니다.”
리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오해가 있었겠지요.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다 보면 으레 일어나는 일이니까.”
베로니카를 두둔한 아피아가 이번에는 케이크를 집어먹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듯했다. 하긴 이 시대에서 단맛을 느끼는 건 쉽지 않았다. 귀족과 부호들의 전유물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났으니 된 것 아니겠습니까?”
“뭐 당신들이 괜찮다면야. 그래서 나를 찾아온 연유가 무엇이오? 한두 번은 아닌 듯한데.”
“벨로크 님께서 이곳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요정 왕국에서의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으로 봐도 되겠지요?”
“그렇소.”
“대륙을 불태울 뻔한 화마를 막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업적입니다. 대지 모신께서 당신의 앞날을 축복 하실 거예요.”
벨로크를 추켜세운 아피아가 눈동자를 빛냈다. 이제 본래의 목적을 얘기하려는 듯했다.
“벨로크 님. 저희들이 요정 왕국으로 가려고 했던 이유를 기억하시나요?”
벨로크는 이들이 왜 대륙을 떠돌았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분명 부족에서 반란이 일어나 도망쳐왔다고 했다. 그리고 차기 대족장을 죽이고 마을을 차지한 그들을 단죄하기 위해.
“나스 밀림에서 수행하고 있을 대전사를 찾아간다고 했었지?”
“맞습니다. 대설산의 위대한 늑대. 아둔 리메르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죠. 하지만 부덕한 저 때문에 임무는 실패했고, 저희는 여기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벨로크씨와 화린씨는 그곳으로 향하셨죠. 혹시 그분에 대한 소식을 들으셨나요?”
벨로크와 화린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 들은 게 없어.”
“Um···”
아피아와 리쿠는 실망한 듯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던 듯. 금방 덤덤한 얼굴이 되었다. 아피아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벨로크 님. 저희들은 이제 떠나도 되겠습니까?”
“내가 가지 말라면 안 갈 생각이었소?”
“물론입니다. 은인께서 만족하실 만큼의 봉사를 하기 전까지는 저희는 당신의 말을 따를 생각입니다.”
아피아와 리쿠의 눈에는 조급함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그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제 가족과 지인들보다 은혜와 의리를 더 중시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 마음이 갸륵해서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언제든지 떠나도 좋소. 오히려 내가 당신들을 못 도와줘서 미안하군. 시급한 일이 있어서.”
“고맙다. 명예 아는 전사.”
고개를 꾸벅 숙인 리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그는 두툼한 털옷에 탁자 위에 있던 술들을 챙겼다. 지금 바로 갈 생각인 듯했다. 아마 자신들의 고향 하이랜드로 되돌아가겠지.
“감사합니다. 벨로크 님. 그리고 화린 언니. 이 일이 마무리되면 꼭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아피아가 탁자 위에 있던 과자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는 화린과 포옹한 후. 주점에서 나갔다. 이렇게 과거의 인연 하나를 떠나보냈다.
다시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화린이 걱정스레 말했다.
“지금 같은 전쟁통에 단둘이서 어떻게 하이랜드까지 가려는 걸까요? 그리고 도착한다 해도 문제에요. 리쿠씨의 부족은 이미 반란자의 손에 넘어갔다면서요.”
“잊었소? 두 사람은 이미 하이랜드를 넘어 이곳까지 왔었소. 게다가 부족으로 되돌아간 것 역시 그들의 선택이요. 동료였다고는 하나 외부인인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소.”
“그래도···”
냉정해 보이는 벨로크의 말투에 화린이 입술을 삐죽였다. 벨로크는 그녀를 잠깐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번 일이 마무리된다면 친구로서 작은 도움 정도는 줄 수 있겠지.”
“벨로크 씨···”
감동한 화린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요 한 달간 같이 땀을 흘리고 주먹을 맞대서 그런가. 두 사람은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벨로크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대낮이건만 사람들의 가게의 문이 닫혀있는 곳이 몇 보였다. 좌판도 그 숫자가 적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으며, 도시를 순찰하는 경비들의 숫자 역시 많았다.
“도시가 어수선하군.”
그는 요 한 달 동안 거의 폐관 수련을 했기에 주변의 정세에 대해서 무지했다. 이를 알아차렸는지 화린이 말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전쟁이 날 것 같다고 했어요. 서부의 군벌들이 신성 왕국의 군대에 의해 초토화됐다더군요. 베로니카 씨도 그것 때문에 정신이 없나 봐요.”
하필 지금 타이밍에? 벨로크는 미약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곧 그것을 털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샹들리에와 융단, 은촛대가 깔린 화려한 장소에서 스테이크를 썰었다. 일류 요리사가 만든 고기는 살살 녹았다. 게다가 하인과 하녀들이 정중히 수발을 들어주었다.
화린은 체할 것 같았지만 이를 억지로 참아냈다. 벨로크는 천천히 입 안에서 녹는 고기의 육질을 음미했다. 수십 년 묵은 포도주로 입도 헹궜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배를 채우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상념은 곧 분노와 증오, 결의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는 오래 산 그 망령 녀석을 처리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괴물을 죽이듯 머리통을 박살 내서 영혼마저 찢어놓으리라.
식사를 끝마친 두 사람은 베로니카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앞에는 데비안이 시립해 있었다. 청년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윽고 똑똑 노크하더니.
“영주님. 벨로크 경께서 오셨습니다.”
얼굴만큼이나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얘는 또 왜 이래?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
“들라하라.”
안쪽에서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서류와 씨름 중이었다. 베로니카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벨로크? 수련은 다 끝난 것이냐?”
“그렇소. 그리고 할 말이 있소. 카라와 아델, 이자벨, 아낙스를 이곳으로 불러주시오.”
“···때가 된 것이냐? 알았다.”
서류를 치운 베로니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아델을 비롯한 일행들이 들어왔다. 아델의 안색은 파리했다. 식은땀도 흘렸고, 무언가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카라는 눈동자의 안광이 한층 더 진해져 있었다. 요 한 달간 아낙스에게서 주문을 배웠다더니.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 같았다. 이자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한층 더 끈적하고 탁한 빛을 뿌려댔다. 몸 주위에서는 기이한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벨로크는 그녀가 마석의 힘을 흡수했음을 알아챘다.
“수련은 끝난 거에요?”
이자벨이 물었다.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 명이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아낙스는?”
“내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자 더 이상 가르쳐줄 게 없다면서 떠났어. 멍청한 자기 제자를 보러 간다던데?”
카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녀로부터 받을 건 다 받았으니까. 그는 주변을 둘러싼 제 연인들. 그리고 동료들을 보면서 말했다.
“오늘 밤 자정. 놈과의 결판을 내겠다.”
“너의 의식 세계로 들어가 내면에 기생하고 있을 놈을 끝장내겠다는 말이지?”
카라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금 질문했다.
“방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최대 몇 명이서 갈 수 있어?”
“따라올 셈인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참. 벨로크가 머리를 긁적일 때.
목걸이가 빛나며 노르드가 나타났다. 일행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전직 신에게 인사했다.
“미안하지만 벨로크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세 명이다.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인연들. 그렇기에 그와 같이 영혼마저 저당 잡힌 자들.”
노르드는 퍽 피곤한 얼굴로 아델, 카라, 이자벨 셋을 바라보았다.
“의식을 치르는 순간. 너희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둘과 함께 그곳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야.”
세 사람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바라고 있었다는 듯 했다.
"그걸 위해서 강해진 거라구요."
"머리에 쥐가 날 때 까지 공식을 외웠지."
"주군을 따르는 것은 기사로서의 의무."
벨로크는 자신이 내면 속 세계로 들어갔을 때. 회색 도시에서 점멸하는 모니터를 봤을 때. 스스로를 포함한 그녀들의 능력치가 숫자와 문자로 표기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놈의 의지에 따라 제 동료들이 고통을 받았던 것도.
떼어놓고 갈랬는데. 화린이 물었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무얼 할 수 있죠? 그냥 네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 손 녻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요?”
“그럴 리가. 단련하는 자, 그리고 어린 지배자야. 의식을 치르는 데 있어서 너희 두 사람의 역할 또한 무척이나 중요하단다.”
노르드는 베로니카와 화린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우리들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
잠시 후. 하늘에서 떨어진 칠흑의 장막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차가운 회색 요새에서는 횃불들이 피어올랐고,
성안에 비치되어 있는 괘종시계의 금박추가 하늘로 치솟았다. 자정이 된 것이다.
하이캐슬에서도 가장 깊숙하며 은밀한 곳. 벨로크와 아델, 카라와 이자벨이 한곳에 모였다. 노르드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로 신비로운 주문을 외웠다. 다섯은 끈 풀린 인형처럼 털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