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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01화 (201/222)

201

결의

“무슨 수작질이지?”

아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자벨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답했다.

“수작질이라니··· 못 본 새에 말투가 다시 거칠어졌네요. 나. 상처받아요?”

“나보고 동료를 살해하라는 황당한 요구를 해놓고서 고운 말이 나올 거라 생각한 건가?”

“흐음···”

이자벨은 다리를 꼰 채, 한쪽 팔로 턱을 괬다. 그리고 가만히 아델을 주시했다. 초조, 불안, 질투.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담긴 끈적한 감정들. 이자벨이 슬쩍 눈을 감으며 말했다.

“과연 그것 때문인가요?”

“뭐?”

“저한테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오시는 이유, 지금까지 저와 별다른 이야기도 하지 않은 이유가 정말 그것 때문이냐고요.”

“쓸데없는 문답은 그만하고 아까 했던 말이나···”

“아니잖아.”

그녀의 단호한 말에 아델의 눈이 흔들렸다. 이자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코가 맞닿을 정도로 접근한 다음 진득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벨로크랑 몸을 섞었다고, 그의 옆자리를 꿰찼다고 지금 질투하는 거잖아.”

탁. 아델이 이자벨을 밀쳤다.

“이, 이이···”

그녀는 말문이 막힌 것인지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눈가 역시 파르르 떨렸다. 이자벨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네. 사람이 왜 이렇게 솔직하지를 못해요?”

짝. 이자벨의 뺨이 부어오르며 그녀의 고개가 팍 돌아갔다.

“이 더러···”

아델은 이자벨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하려다가 흠칫 망설였다.

“시바알!”

대신에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후.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이자벨이 어깨를 잡자 무산되었다.

“어디 가요?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놔...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마. 지금 이대로라면 난 널···”

아델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는 악마의 살결을 불태우며 뼈를 녹아내리게 했다. 하지만 이자벨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분한 거 이해해. 날 증오하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난 당신 이대로 못 보내. 이대로 가다가는 서로에게 안 좋은 미래만 닥칠 거니까. 그러니 우리 대화를 좀 나눠봐요. 응? ”

아델은 거절의 의미로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자벨의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연기는 커져만 갔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

결국 아델은 고개를 팍 숙인 채, 다시 몸을 돌렸다. 이자벨은 싱긋 웃으며 제 손을 매만졌다. 그러자 뼈가 재생되고 살이 차올랐다. 그녀가 아델을 이끌고 침대로 갔다. 이윽고 푹신한 쿠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각각 마음속에 담아왔던 비밀들, 제 사정들. 아무튼 평소에는 입 밖으로 내기 힘들었던 것들.

아델은 씩씩거리며 분노하다가 울었다. 끝에 가서는 조금 진정이 된 듯. 차분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아까 말한 목을 쳐달라는 이야기는 뭐지?”

한쪽 뺨이 부어오른 이자벨이 마석을 들어 올렸다.

“내가 폭주하면 죽여달라는 얘기였어요. 당신 아니면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돌, 악마, 아델은 상황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 그런 극단적인 짓을··· 게다가 네가 폭주한다면 벨로크 님을 부르면 되는 것 아니냐? 그분 이라면 분명···”

“아뇨, 그는 지금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있어요. 괜히 마음 흐트러지게 하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건 제 나름의 의지의 표명이었어요. 언제까지 스스로의 정신 하나 못 추스른 채, 그한테만 맡겨두고 있을 순 없어요. 목숨을 걸고 이 안에 담긴 힘을 흡수하겠다는 결단이죠.”

아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나보고 악역을 자처하라고? 내가 널 죽이면 그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란 건데? 벨로크 님께서 슬퍼하실 거다. 카라도 그렇고, 나도···”

“내가 죽으면 당신한텐 더 좋은 거 아니에요? 좀 더 사랑받을 수 있을 텐데···”

이자벨이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델이 발끈했다.

“나를 어떻게 보고!”

“농담이에요. 난 죽을 생각 같은 거 없어. 그냥 마음을 다잡고 싶어서 그랬어요.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될 거 같아서. 그리고 그게 당신이었으면 했거든.”

아델은 말을 아꼈다. 이자벨은 방문을 잠근 후.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는 손에 들린 마석을 꾹 쥐었다.

“하아.”

아델은 한숨을 쉬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스르릉. 칼 뽑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은 검을 양손으로 쥐고는 비스듬히 늘어트린 채, 말했다.

“내가 이 칼을 쓰게 만들면 용서 안 할 거다.”

“걱정마요. 당신한테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안 죽을 테니까.”

피식 웃은 이자벨이 마석을 제 심장에 박아넣었다. 범접할 수 없는 어둠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

의식이 폭포처럼 추락했다. 어둡기만 했던 세상이 밝혀지고 그 풍경이 뒤바뀌었다. 모든 것이 회색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도시.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없고, 희뿌연 연기가 하늘을 가득 채웠으며. 별의 위상이라고는 한없이 낮은 인간 중심의 세상.

그런 도시 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도저히 그 특징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잠시 후. 풍경이 뒤바뀌었다. 인간과 요정, 난쟁이, 거인들이 핍박받고, 괴물들이 날뛰는 세계.

창공을 가르는 새, 대륙을 등에 업은 거북이, 수천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 활보하는 척박한 대지 위. 역시나 그곳에서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복장은 좀 달랐지만, 그 특징적인 모습은 벨로크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사내는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건만 그의 눈은 굳건한 의지로 환하게 빛났다. 완연한 영웅의 풍모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또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열기로 가득 찬 땅 아리안,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척박한 산 하이랜드, 십자가 건물들이 줄지어서 세워진 신성 왕국, 그 모든 땅들의 틈바구니에 낀 중앙 왕국 아드리아, 마지막으로 귀 큰 인종들이 사는 요정왕국까지.

현재 벨로크가 살고 있는 땅 위에도 방금 전의 사내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내는 벨로크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지로 빛나던 눈동자는 꺼멓게 죽어 탁한 빛깔을 흘렸고, 입매는 비틀려 있었다. 분명 같은 얼굴이건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와 벨로크의 눈이 마주쳤다. 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가 손을 흔들자 세상이 불타올랐다. 대륙 전체가 화마에 휩싸여서 잿더미가 되기 시작했다.

———!

터져 나오는 비명,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씹어 삼키며 끔찍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괴물들, 지하의 악귀들. 하지만 모든 것을 불태우는 맹렬한 겁화는 이내 뿔 달린 괴물들마저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불길이 잦아들고 악마와 괴물들, 모든 지성 생명체들이 사라진 땅.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을 밝히는 태양도 어스름을 비추는 달도,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던 그림자도 없었다.

모든 것이 허무로 된 세상 속. 황폐화된 대지 위에 서 있던 사내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건만 그가 가진 증오, 분노, 아무튼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박살 내고 싶다는 사악한 의지가 절절히 전해져 왔다. 사내는 고개를 기이한 각도로 꺾으며 벨로크와 눈을 마주했다.

“이제 곧 이다.”

필름이 꺼지듯 멀어지는 빛 사이에서 사내는 고개를 젖혀가며 웃었다. 벨로크의 의식이 현실 세계로 부상했다.

#

가슴이 뜨거웠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고, 제 안에 있는 어떠한 존재가 알을 깨고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발.

벨로크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돌로 된 천장이었다. 등은 까슬했으며 공기는 탁했다. 벨로크는 자신이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다가 그대로 잠든 것을 깨달았다.

근 한달 동안 화린과 대련을 하고, 새벽녘이 되면 자신 혼자 이곳에 남아 명상, 몸을 움직였다. 깜빡 정신을 잃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괴물들을 썰어대도 멀쩡한 체력을 가진 전사였다. 그렇다면 이건···

[그래, 네 생각이 맞다. 이제는 때가 된 것이다.]

목걸이가 반짝거리며 노르드의 의지가 전해져왔다. 벨로크는 그녀가 힘에 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갈 건가?”

[아니, 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너와 네 동료들한테도 여러모로 준비가 필요하겠지.]

방금 전에 봤었던 그 광경이 현실이 된다면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이다. 놈의 고향인 회색 도시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적어도 이 대륙만은, 자신에게 고통만을 안겨준 이 땅의 생명체들만은 모조리 다 파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제 고향으로 되돌아갔는데. 상황이 놈의 뜻대로 안 풀린다면 그곳 역시 파괴할 지도 모르지.

그것은 곧 벨로크가 이 세상에서 쌓아왔던 모든 인연들.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친구라 부를 만한 자들의 삶이 다 바스러지는 것을 뜻한다.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긴 하지만 또 하나의 고향이 불타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걸 막으러 갈 것이다. 동료들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니 결전은 오늘 밤 자정에 이루어 질 것이다. 어둠이 모든 것을 뒤덮었을 때. 허나 새하얀 달빛이 찬란히 그 광채를 뽐낼 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악의 순환고리를 끊으러 가자꾸나.]

노르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벨로크는 바지를 털며 창가로 다가갔다. 아침 해가 막 떴는지. 밖에서는 새들이 짹짹거렸다. 바구니를 짊어진 사람들, 좌판을 까는 사람들, 교대근무를 하러 가는 병사, 부모 일을 돕는 아이들까지.

시민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오늘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별거 아닌 풍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지겹도록 똑같은 쳇바퀴 같은 삶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끔찍할 것이다.

그는 이 일상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영원히 투쟁하는 것이 삶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그것이 힘에 겨워 지치게 될지라도, 이 수레바퀴를 계속해서 돌리고 싶었다.

벨로크는 떨어지는 태양 빛을 뒤로한 채, 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그의 양손에서 오색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동방의 비전. 철금강을 극한까지 쌓아 올렸기에 나타난 또 다른 힘. 금강불괴였다.

그는 번쩍이는 주먹을 꾹 쥐며 한 번 휘둘렀다. 이윽고 두 번, 세 번, 수십만 번을 휘둘렀다. 기, 다음은 신성, 마지막으로는 본연의 육체였다.

그는 텅 빈 연무장안에서 끝없이 자신을 단련했다. 주먹질, 칼질, 혹은 명상. 이것들은 사실상 마음을 다잡는, 잡념을 털어낸다는 행위에 가까웠다.

“후우.”

잠시 후. 땀을 뻘뻘 흘린 벨로크는 옆에 준비되어있는 두레박을 끼얹었다. 찬물이 몸의 열기를 식히고 정신을 일깨웠다. 태양이 드높게 떠 있는 걸 보니 정오였다. 체감상 몇 년은 움직인 것 같은데. 시간은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는 이것이 고도의 집중력이 빚어낸 기이한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극한으로 집중된 그의 감각들이, 인위적인 시간의 감속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밤이 늦을 때까지 감각을 끌어올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분명 미약하나마 효과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머리를 털며 연무장 밖으로 나왔다.

남은 시간은 12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벨로크가 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 관계를 맺은 인연들. 연인, 혹은 친구들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것에는 퍽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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