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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00화 (200/222)

200

다툼

“네. 알겠습니다.”

화린은 두 주먹을 꾹 쥐며 왼손은 앞으로 비스듬히 오른손은 허리에 붙였다. 무릎을 낮추고 벌린 다리 역시 그녀의 몸을 단단히 지탱하며 중심을 잡게 했다.

당당하고 패기 넘치는 자세. 그녀가 평소 무술을 수련할 때 혹은 악귀들의 머리를 깨부술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반대편에 있던 벨로크 역시 화린과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치솟는 흙먼지.

두 사람의 손과 발이 쉴 틈 없이 움직이며 잔상을 피워냈다. 막고, 찌르고, 흘리고. 올려 치고, 내려찍고. 찰나의 시간 동안. 수십 번이 넘는 난타가 서로를 향해 오고 갔다.

“흡!”

한 바퀴 몸을 회전시킨 화린이 돌려차기를 날렸다. 공기가 펑 터져나갔다. 마치 칼날이 번뜩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숙인 것으로 이를 피해냈다. 그리고 훤히 빈 그녀의 턱으로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공기를 가르며 맹렬히 나아가다가 무언가에 막힌 듯 턱 걸려버렸다.

화린의 오른발이 그의 손을 후려치고 있었다. 일부러 유도한 것이다.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반동을 이용해 벨로크의 가슴을 밀었다. 쭉 모은 다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강력한 각력이 그를 후려쳤다. 쿵. 이윽고 파동이 뿜어져 나가며 그를 한 번 더 강타했다.

대기가 지르르 울리며 연무장의 모래가 깊은 고랑을 그렸다. 양손을 모아 상체를 보호한 벨로크가 주르르 밀려났다. 그녀의 수준에 맞게 신체 능력을 조절한 그는 혀를 내둘렀다. 화린의 움직임은 부드러웠으며 날카로웠다. 마치 먹이를 쫓는 뱀과 같았다. 허투루 어릴 때부터 신체를 단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벨로크가 이 대련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휘리릭 돌리며 지면으로 착지하고 있는 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던 그녀는 다급히 허공에서 손발을 내질렀다. 역시나 공기가 일그러지며 무형의 힘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벨로크는 피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면의 새로운 힘. 기를 끌어올렸다. 그는 주먹을 휘둘러 쏘아져 오는 충격파들을 파훼시켰다. 이윽고 화린의 텅 빈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화린은 무릎을 치켜올리며 이를 막고, 반격하려고 했다. 그 순간. 벨로크의 자세가 바뀌었다. 주먹은 쫙 펴져서 손바닥을 드러냈고, 어깨는 벌려져 있었다.

“앗?”

쏘아진 무릎이 벨로크의 턱을 스치며 피를 뿜어내게 했다. 그 대가로 화린은 숨이 턱 막히며 온몸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 악문 화린이 벨로크의 어깨를 붙잡으며 버텨내려고 했지만, 자세가 너무 좋지 않았다. 결국 벨로크는 그녀의 허리를 붙들고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촤아악. 흙바닥이 파도처럼 갈라졌다. 이후 화린을 깔고 앉은 벨로크가 두 주먹을 휘둘렀다. 갈색 동공 위로. 두툼한 바위들이 연달아 떨어졌다.

“읍! 끄으!”

그녀는 입가가 찢어지고, 눈에 피멍이 든 와중에도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무릎을 올려 벨로크의 등을 찍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마구 주먹을 올려 쳤다. 하지만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공격은, 통상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공격보다 약했다. 몇 대는 맞아주고, 맞은 것보다 더 많이 때리고.

벨로크는 화린의 주먹을 흘리며 제 주먹을 연신 내려찍었다. 결국 화린의 저항은 약해지고, 그녀의 입에서는 악에 받친 고함 대신 신음이 흘러나왔다. 주먹을 우뚝 멈춘 벨로크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산발이 된 머리칼에 함몰된 광대, 입가와 뺨 역시 다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여인네 한 명이 보였다. 아무리 실전 같은 대련이라고 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포션을 들이붓고, 사제의 치유 기도를 받아야 할 정도의 중상이었다.

그는 피 섞인 침을 퉤 뱉은 후. 움찔거리고 있는 화린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생사결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솜씨 좋은 치료사가 옆에 있었다.

“벨로크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치료를···”

그가 신호하자 뒤편에서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아델이 달려왔다.

“화린부터 부탁한다.”

“아뇨. 벨로크님이 먼저입니다. 상처가 더 심하시지 않습니까?”

벨로크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누가 봐도 중상자는 이쪽이잖아. 하지만 아델은 단호했다. 얘는 바뀐 게 없네. 벨로크는 제 친한 사람들한테만 그나마 인간 같이 대하던 아델의 성격과 그녀가 언제나 최우선시 하는 것이 자신인 것을 떠올렸다.

“후우.”

벨로크는 아델과 구태여 입씨름을 하는 대신 억압해두었던 힘을 되돌렸다. 그러자 불의 거인의 심장, 혈관을 타고 흐르는 용의 피가 용솟음쳤다. 찢어졌던 그의 피부와 근육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아델은 순식간에 멀쩡해진 벨로크를 보며 당황했다. 아니, 정확히는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아델. 어서.”

벨로크가 재촉하자 입을 삐죽 내민 아델이 기도문을 외웠다. 샛노란 빛의 광채가 아델의 손에 맺히고, 그 손이 화린의 신체를 쓸자 그녀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아···”

끅끅거리던 화린이 정신을 차렸다.

“괜찮소?”

편해진 표정으로 제 상처를 쓸던 화린은 지근거리에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버둥거렸다.

“네, 네! 괜찮아요! 내려주세요!”

벨로크가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주었다. 화린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델에게 우선 고개를 숙였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델 씨.”

“흥.”

아델은 콧방귀를 뀐 것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성기사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호승심이 엿보였다. 두 사람의 대련을 보고 생각나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둘을 붙여놔도 좋은 승부가 되겠는데. 서로 배울 건 배우고, 같이 땀을 흘리면 친해지기도 할 테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화린과 대련을 하는 이유는 기의 사용법을 다루고, 동방의 비전의 숙련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는 곧 있을 절대신과의 격전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더 정진시키기 위해서였다. 숨겨진 칼날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으니까. 벨로크가 다시금 화린에게 고갯짓했다.

“다시 시작해도 괜찮겠소?”

“네.”

아무리 상처가 치유되었다고는 하나.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법도 하거늘. 화린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전사였다. 강자와의 목숨을 건 대련. 그로 인한 스스로의 발전은 언제나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벨로크였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쿠웅. 연무장 바닥이 원을 그리며 깨져나갔다. 두 사람은 다시금 치고받으며 싸웠다. 기의 사용은 최소한으로, 오직 육체의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난타전을 벌였다. 역시나 화린의 패배였다.

그녀가 아무리 숙련된 무투가라 한들. 벨로크 역시 기사로서 전사로서 사선을 넘나들며 배워온 것들이 있었다. 거기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은 화린과 손과 발을 맞댈 때마다. 그녀의 미묘한 손동작이나 육체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포착해. 제 것으로 흡수했다.

그 짧은 사이. 그녀가 수십 년에 걸쳐서 쌓아온 맨손무투를 습득한 것이다. 또한 2미터에 가까운 그의 거구. 이에서 오는 신체적인 이점은, 화린에게 있어 치명적인 체급차를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화린은 벨로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우··· 수십 년 인생이 무상하네요. 지금껏 수많은 수련생들과 사범님들. 난다긴다하는 천재들과 합을 겨뤄봤지만 이렇게 빨리 배우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아델에게 치유를 받던 화린이 허무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경악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운 일들만 연달아 겪으면 이에 적응해버리는 것이다. 벨로크는 방금 전까지의 대련을 곱씹다가 답했다.

“맨손무투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소. 이제 다른 걸 해보고 싶은데.”

“비전의 사용법을 배우고 싶으신 거죠?”

“그렇소. 화린 당신 정도의 경지는 안 되어도 좋으니. 지금 내 수준에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성취를 이루고 싶소.”

“음. 확인을 좀 해볼게요. 우선 철금강부터 보여주세요.”

벨로크는 기를 끌어올렸다. 지하의 마력, 신의 부산물인 성력, 고대신의 권능인 신성과는 다른, 색다른 힘이 그의 신체 내부를 순환했다. 이윽고 그가 구결을 외우자 그의 주먹이 강철의 색으로 번들거렸다. 신체를 강철과도 같이 만드는 비전. 철금강이었다. 으흠. 고개를 끄덕인 화린이 말했다.

“이제 파동권을 한 번 사용해 보시겠어요? 전력으로요.”

벨로크는 기를 또 다른 형태로 변환시켰다. 철금강이 기를 한계까지 압축하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건 사출. 밀어내며 뿜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손바닥을 펼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쾅.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연무장의 벽에 쩍 금이 갔다.

효능은 마법사의 보이지 않는 힘. 주문과 비슷했다. 하지만 파동권의 장점은 그 범용성에 있었다. 주먹이 상대의 신체에 닿았을 때. 이를 사용한다면 일차적으로 외부에 충격을, 이차적으로 내부를 진탕 시킬 수 있었다. 경지가 높아진다면 한층 더 위력적으로 한층 더 효율적인 사용이 가능했다. 화린은 입맛을 다시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음. 일단 벨로크씨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임의대로 예시를 들어드릴게요. 비전의 성취를 일에서 구 단계까지로 나눈다면 지금 벨로크씨의 성취는 철금강이 사. 파동권이 삼 입니다.”

벨로크는 입가를 조금 비틀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영약을 먹고, 화린에게 비전을 배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스 밀림에서 시간을 쪼개가며 배운 성취가 이 정도였으니. 그는 만족했다.

이것은 온갖 문물을 접하며 살아온 현대인의 깨어있는 정신과 재능 넘치는 전사의 육체. 그 안에 깃든 절대신의 권능이 더해져서 이뤄낸 쾌거였다. 하지만 화린은 벨로크가 실망했다 생각했는지 그를 위로했다.

“대단한 재능이에요. 아무리 실전을 방불케 하는 사투로 비전을 단련하셨다고 한들. 십 년 이상을 수련한 수련생들 중에서도 벨로크씨의 경지를 넘어서는 자들은 몇 없었거든요. 저도 그랬고요.”

“그럼. 당연하지. 흐흠.”

뒤편에서 이를 보고 있던 아델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이 아이는 점점 더 감정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없던 사이 무언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사춘기가 끝나가는 걸지도 모르지. 나중에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는걸.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금칠은 여기까지 하고. 어떻게 하면 되겠소? 마법사들처럼 가부좌를 틀고 내면이라도 관조할까?”

“명상 또한 훌륭한 수련법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의 그릇됨을 바로잡는 것 역시 깨달음을 얻는 것에 있어서는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그보다도 더 좋은 방법이 있죠. 명상보다도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련법이.”

“더 좋은 방법?”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이 호선을 그렸다. 투쟁심 넘치는 미소였다. 어째선지 악동의 그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화린이 기운을 끌어올리자. 그녀 주위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오색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빛에 휩싸인 모습이 무슨 금강석을 보는 느낌이었다. 뒤편에서는 희끄무레한 안개 같은 것이 가부좌를 튼 채, 양손으로 합장을 하고 있었다.

금강불괴. 투신나찰. 벨로크가 모니터 바깥의 세상 속에서 관음했던, 무투가의 절기가 화린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경지를 이룬 무투가의 비전은 가히 마법과도 같다고 했나? 벨로크가 텍스트로 된 구절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을 때. 화린이 손짓했다.

“육체의 대화를 나누는 거죠. 일단은 몇 대 맞고 시작할까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제가 스승이니까.”

환영의 거대한 손바닥이 벨로크를 후려쳤다.

#

성이라는 것은 본래 방호의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태양처럼 우뚝 솟아오른 이 건물은 겉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나. 실상 주거지로서의 능력은 최악이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울퉁불퉁한 돌들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에 갇혀있는 듯한 폐쇄된 기분을 들게 했다. 게다가 성의 틈새와 돌 자체에서는 시릴듯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으니. 아무리 횃불을 피우고 융단을 깔아도, 도자기와 석상, 아름답게 수놓아진 휘장을 걸어놓아도, 이 삭막하고 건조한 공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 살아가니 귀족들 중에서 성격파탄자들이 많은 것일까? 역시 성보다는 저택이지. 복도를 걸어가던 아델은 벨로크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의 상황 때문이었다.

벨로크와 화린의 피 튀기는 대련을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간간이 웃음이 피어났고, 화린은 때때로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게다가 그의 신체에 화린의 손과 가슴 등이 닿기도 했다.

결국 아델은 그 광경을 보다 못해 뛰쳐나왔다. 더 이상 화린을 치유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자벨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후우, 후우.”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델은 한층 더 힘을 줘서 복도를 걸어갔다. 원래 아델이 벨로크를 흠모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극성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벨로크와 떠나있던 사이. 들러붙은 또 다른 여자들, 카라로부터 들은 이자벨과 벨로크의···

생각하던 아델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어둠에 잠긴 복도 너머. 꼬리를 살랑거리는 횃불 빛 아래에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아델을 봤는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데비안 경. 꼴이 왜 그렇게 됐소? 임무를 나갔다 오신 거요?”

아델이 데비안을 살폈다. 머리칼은 흠뻑 젖어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었고, 가죽옷에는 오물이 잔뜩 묻어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세상의 풍파를 견디다 못해 꺾여버린, 지치다 못해 절망에 빠진 자가 내보이는 텅 비어버린 눈. 갈 때까지 간 길거리의 창녀나 마약쟁이들한테서 볼 법한 눈동자. 청년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델 경. 안녕하십니까.”

목소리 톤은 평상시의 그였다. 하지만 시체처럼 창백한 낯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 괴리감이 오히려 더 섬뜩한 느낌을 들게 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아델이 미간을 찌푸렸다.

“경? 괜찮소?”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아야죠. 그래요, 난 괜찮아요.”

데비안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보다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기도문을 외웠다. 그리고 데비안의 어깨를 턱 잡으며 제 힘을 불어넣었다. 효능은 단순했다. 식어버린 몸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데비안은 눈을 부릅뜨고는 아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힘내시오. 부관이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아랫것들의 기강이 어떻게 되겠소?”

“경. 그게··· 저···”

얼굴을 일그러트린 데비안이 아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델은 이미 그를 지나쳐 복도의 음영 속으로 몸을 파묻고 있었다. 기사로서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을 강조한 채, 떠난 것이다.

결국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제 정체성과 가치관에 대해서 고민하던 십 대 소년의 마음은 녹아내리는 듯하다가 다시금 굳어버렸다. 그는 아델이 사라진 복도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베로니카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아델은 성의 귀빈실 중에서도 구석에 있는, 하녀와 하인들도 출입을 금한 방으로 다가갔다. 금박으로 장식한 문고리를 끼릭 돌리자 기름칠이 잘 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왔어요?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무래도 내가 성을 돌아다니는 건 조금 그래서요.”

침대에 앉아있던 이자벨이 후드를 벗어 내렸다. 달빛 아래. 악마의 뿔과 문신 새겨진 회색 피부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요정의 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

아델은 답하지 않았다. 몇 달 만에 재회한 동료건만, 일이 바빠 그동안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눴건만, 이자벨을 바라보는 아델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아델은 문을 턱 닫고는 그곳에 기댔다. 이윽고 팔짱을 낀 채, 툭 내뱉었다.

“용건은?”

가시가 돋친 듯한 아델의 말투에 이자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 품을 뒤적거렸다.

가슴 사이에서 나온 것이 이자벨의 손에 턱 잡혔다.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투명하고도 검은 보석이었다. 이자벨은 혼돈의 존재의 부산물. 마석을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아델. 내 목을 좀 쳐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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