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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지 못한 일
잘려 나간 죄인의 목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눈은 탁한 회백색이었고, 입가는 비틀려 있었다. 그 표정에서 그가 죽었을 때. 느꼈을 원망, 고통, 후회 등의 감정이 절절히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런 머리통 수십 개가 루텐버그시의 광장을 굴러다녔다.
줄줄 흘러내리는 피가 회색 판석을 붉게 물들이다가 배수로로 흘러 들어갔다. 간만의 유흥을 즐기기 위해, 혹은 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사람들의 신발이 그 위를 차지했다.
어수선한 상황 속. 갈색 부츠 하나가 그 끈적한 늪지에 슬며시 끼어들며 발자취를 남겼다.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우리 목에 비수를 꽂을 놈들이다. 후작에 대한 과잉 충성, 남부군과의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자, 제 권리를 뺏긴 것에 대한 분풀이 등. 이유는 다양하지.
-그들이 모여서 반란을 모의했습니까? 그렇다면 체포해서 재판을 받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적은 없다. 이렇다 할 움직임도 없어. 이건 그저 내가 심어놓은 간자들과 도시의 지역유지들로부터 얻은 명부로 그들의 배경을 보고 내린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면 확실하지도 않은 일들로 그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합니까? 죄도 없는 사람들을···
-그렇기에 죽여야지. 진짜 작당을 모의하고 있는 녀석들이 죽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설령 억울한 자였다고 한들. 그들 덕분에 다른 녀석들은 공포에 굴종하게 될 테니까.
암살, 정적의 제거, 제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한 발판. 뭐라 불러도 좋을, 기사도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더러운 일.
베로니카의 말을 상기한 데비안은 얼굴을 굳혔다. 평상시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기사라기보다는 어딘가의 옆집 청년 같았던 그의 얼굴은 지금 석상 같았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으며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표정은 지금 주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물품. 은하수 망토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였다면 되게 신기하다며 감탄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툭. 데비안과 어깨를 부딪친 사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길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류트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악에 물든 왕? 그 누가 물리치나? 뿔 달린 악마? 그 누가 물리치나? 아-아! 바로 그라네! 바로 그라네!”
악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주변 시민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누군가는 호감을 누군가는 분노 담긴 시선을 보내왔다. 악사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줄을 튕기며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흐르는 숲의 마-녀! 아나리크의 괴물 사-자! 그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지! 그는 요정 숲의 구원자! 그는 메마른 땅의 구원자! 오-오! 위대한 전-사! 오-오! 위대한 기-사!”
지나가던 병사들이 그 노래를 듣고 주먹을 꾹 쥐며 소리쳤다.
“벨로크-!”
“벨로크! 벨로크! 남부의 평화를-! 왕국의 평화를-! 이루게 해줄 우리의 영-웅!”
악사는 양팔을 벌리며 마치 연극 단원처럼 소리쳤다. 이윽고 한 손을 배에 붙이며 허리를 크게 숙였다. 노래의 끝을 알린 것이다. 병사들은 와하하 웃으며 박수를 쳐댔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동전들을 휙휙 던져댔다. 악사의 모자가 삽시간에 구릿빛으로 가득 찼으니. 그 액수가 보통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도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하나같이 벨로크와 베로니카. 남부군을 찬양했다. 일종의 우상화였다. 이것이 남부군의 방식이었다. 압도적인 폭력을 보여줌으로써 지배계층은 포섭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처형한다. 시민들에게는 유화적으로 나선다.
병사들은 영지를 점령 후. 절대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그러는 놈들은 목이 달아났다. 영민들 입장에서야 비슷한 놈들한테 혹사당하는 것뿐이었으니. 그럴 바에야 치안을 책임져주고, 세금마저 감면해주는 남부군에게 호감을 품기에 충분했다. 악사나 만담꾼을 이용해 남부군에게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 또한 영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물론 남부군에게 가족을 잃은 자들은 원망을 품겠지만··· 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세상의 법칙상 힘없는 소수의 의견은 언제나 묵살되거나 제거되었다. 베로니카는 이렇게 남부군과 그 점령지들을 꾸려왔다. 그리고 이제 거기서 정적에 대한 은밀한 제거가 포함되었고, 이를 맡은 책임자는 데비안이 되었다.
데비안은 터덜터덜 걸어 도시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저택의 담장을 넘어 지붕 위로 올라섰다. 커튼이 쳐져 있는 저택의 창문 틈 사이로. 목표물들이 보였다.
“아버지!”
“하하. 그래, 킨들. 잘 있었느냐.”
“손부터 씻고 와요. 밥부터 먹게.”
벽난로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식탁에 앉은 사람들. 외눈 안경을 쓴 중년 사내와 여인, 열 살 짜리 아이가 있는 가정은 퍽 화목해 보였다.
철컥. 허리춤의 검집을 움켜쥔 데비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상념들이 지나갔다.
언제 어디서든 부정과 악에 맞서 정의를 관철하며, 약자를 존중하고 지킨다. 베로니카 아가씨가 나락에 빠졌을 때. 그녀를 위해 검을 든 그 순간. 그는 그렇게 맹세했더랬다.
로벤을 둘러싸고 있던 적들은 그의 기사도에 충분히 위배되는 악당들이었다. 전쟁도 그랬다. 적들은 하나같이 돈, 혹은 일신의 출세를 위해. 사람을 죽이기 위해 전쟁터로 나온 칼잡이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거침없이 검을 뽑아 들고,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저들은 아니지 않은가? 저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저 도시 내에서 힘 좀 있는 권력자. 그 잠재력 때문에 혹은 앞으로 일어날 혼란을 막기 위해. 희생시켜야 할 제물들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이들을 죽이는 것이 정녕 옳은 일인가? 물론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 또한 기사의 덕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내 기사도에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아가씨가 지금 그런 사람인가? 제 권력을 위해. 일신상의 영위를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그분이 정녕 내 기사도에 맞는···
흠칫 놀란 데비안이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이 과했다. 이건 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옆을 지켰던 종자로써. 친구로서 가져야 할 감정도 아니었다.
그 사이에 단란했던 식사 자리는 끝나 있었다. 중년인은 아들의 입에 묻은 스튜 자국을 훔쳐주고, 아이의 뺨에 키스했다. 이윽고 부인에게도 입맞춤을 하더니. 제 방으로 올라갔다.
중년인은 양초불을 키고 의자에 앉았다. 그가 막 깃펜을 들어 올렸을 때. 닫혀 있던 창문이 끼이익 열렸다. 중년인이 고개를 돌렸다. 짙은 회색빛을 띠는 구름들이 꾸물꾸물 몰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들은 바람과 빗물로 바스라져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군. 물이 새면 안 되는데.”
중년인은 얼른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 그 잠깐 사이에 방안에는 빗물이 흥건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른 바닥과 만나. 낯선 자의 발자국을 만들어냈다.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던 중년인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하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튀어나온 억센 손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케엑. 켁.”
중년인은 멱살 잡은 손을 양손으로 붙들은 채, 발버둥 쳤다. 데비안의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망토 자락은 벗겨져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내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사내가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복장과 침입한 의도로 봐서 절대 좋은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스릉.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데비안은 칼을 뽑았다. 미약한 양초불 사이로 단검의 칼날이 번들거렸다.
“읍! 으읍!”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도 중년인은 생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버둥거리고, 고개까지 흔들어댔다. 데비안이 단검을 들어 올린 그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궁금한 게 생겨서 그런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두 사람은 흠칫했다. 데비안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중년인은 제 아이에게 들이닥칠 악몽 때문이었다.
읍읍. 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팔다리도 추욱 늘어졌고, 눈동자에는 간절한 빛이 떠올랐다. 문가를 연신 힐끔거리는 게 제 가족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보였다.
“아버지? 주무시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뚜벅뚜벅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중년인은 안도했다. 그리고는 자기를 죽이러 온 데비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 아들을 살려주어서 고맙다는 듯했다. 실로 눈물겨운 부성애였다. 데비안은 내면 속에서 솟아오르는 역겨움에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손에 들린 단검을 내질렀다.
“끕!”
중년인의 눈이 고통으로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안도가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셔츠의 옆구리 부분이 붉게 물들었다. 급소는 아니었다. 치료받는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데비안은 마치 처음 살생을 해본 사람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리고는 단검과 중년인에게서 손을 뗀 후.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칼날이 살을 찢을 때의 그 뭉클거리는 감촉, 뼈를 깎아낼 때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한 단단함. 산 자의 비명, 핏발선 눈, 떨리는 몸과 저 사내가 죽음으로써 과부가 될 부인과 아버지를 잃은 아이의 미래. 그리고 무고한 사람을 해친 자신.
속에서 구역질이 나왔다. 데비안은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더러운 일이었다. 왜 영주님이 명령이 아닌, 부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이걸 경솔하게 받아들였으면 안 됐다. 몇날 며칠을 고뇌하고, 심사숙고 했어야 했다.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 했다.
“흐으읍. 흐으으···”
벽에 기대어 입을 틀어막은 채, 비명을 삼키는 중년인을 보며 데비안은 몸을 돌렸다. 이 끔찍한 현장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는 지금 그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창문이 끼이익 열리더니. 복면을 쓴 사내가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사내는 차가운 눈으로 데비안을 바라보더니 그를 지나쳐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윽고 촤악 소리가 들리더니. 끄르르. 숨넘어가는 소리 역시 들렸다.
“···!”
“주군께서는 이 일을 기억하실 것이오.”
복면 사내는 그 말 만을 남긴 채,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계단 내려가는 소리. 이윽고 들려오는 여인과 아이의 비명. 자신을 원망한다는 듯. 눈을 부릅뜬 피투성이 중년인의 시체...
데비안은 따뜻한 온기 대신 피비린내가 가득한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터덜터덜 걸었다.
“하, 하하하···”
얼굴로 빗물이 타고 흘렀다. 차갑고 끈적했으며 짭짤했다. 마치 그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데비안은 찡그려진 얼굴로 계속해서 걸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노점을 걷는 사람들, 웃옷을 벗어 머리에 쓰고 가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빗방울을 퉁기며 어딘가로 가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차가운 도시를 가로지르는 사람은 이제 데비안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저 위로 높게 솟은 성이 보였다. 익숙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창가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망막 위로 새겨진 빗방울이 아른아른 시선을 가렸지만, 저 특징적인 푸른 머리칼은 가릴 수가 없었다.
데비안은 우두커니 서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 모습이 흡사 그녀의 마음처럼 보였다.
데비안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걸었다.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뒷골목으로 갔다. 그리고는 온갖 오물이 혼재해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흐, 흐흐···”
엉망이 된 기사는 끅끅거리며 울었다. 그는 그것이 변해버린 제 주군에 대한 탄식인지. 아니면 그녀와의 맹세를 이행하지 못한 제 한심함에 대한 한탄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권력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피와 원망, 절규로 쌓은 성탑과도 같았다. 이건 비극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