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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지 못한 일
남부군의 진영 속에서 기수 둘이 튀어나왔다. 한 명은 베로니카였고, 다른 한 명은 백기를 든 젊은 기사. 데비안이었다. 두 사람은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 멈춰섰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높이 치켜들어 후작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루텐버그 후작!”
“피에 굶주린 여백작···”
후작은 소리치지 않았기에 베로니카는 이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애초에 상대의 의중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제 할 말을 했다.
“그대에게 제안할 것이 있소!”
‘제안?’ 중얼거린 성주가 곧 그녀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내 심처까지 칼을 들이민 주제에 제안이라니? 그 제안이라는 것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인가?!”
베로니카는 태양 빛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웃었다. 망원 렌즈 사이로 그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그렇소. 항복하고 남부군의 깃발 아래로 합류하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권리와 명예는 존중받을 것이오.”
분명 턱없이 불리한 쪽은 남부군이었다. 아직 후작에게는 수천의 병사와 마법사단, 잘 건축된 성벽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여유롭게 말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기가 찼다. 이는 곧 분노가 되었다.
“무슨 이런 무도한 자가 다 있나! 내 땅을 함부로 침입하고, 내 아우를 죽인 폭도들 주제에! 진정 나를 위한다고? 내 명예를 지켜줘?!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인가?”
“그 말은 거절이라고 봐도 되겠소?”
“그래! 거절이다! 이 악마에게 따먹힌 창녀야! 화살받이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라!”
귀족에게 있어서 명예와 위신은 곧 생명. 이는 유악한 성격의 후작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었다. 후작의 폭언에도 베로니카는 덤덤했다.
“그렇게 피를 보고 싶다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군대로 돌아갔다. 이윽고 벨로크에게 말했다.
“선전포고는 끝마쳤으니. 이제 나서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할 셈이냐? 성벽을 오를 셈이야? 병사들을 밀어 넣을까?”
베로니카가 물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 카라와 아델, 이자벨과 화린 등. 모두가 웃었다. 참모진들과 데비안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저··· 다들 무엇이 그리 웃기십니까?”
데비안이 대표로 말했다. 그래, 저 친구들이야 그렇다 쳐도.
벨로크는 베로니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그녀가 자신이 가진 힘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웃었다. 확실히 베로니카가 본 것이라고는 무슨 환상 마법 같은 신들의 각축전과 로벤에서의 전투, 그가 대악마를 죽였네. 하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래서 투석기며 공성추며 이렇게 요란하게 준비한 것이리라.
내가 용맹한 기사처럼 선봉장 역할을 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군.
“말 몇 마디보다는 그냥 보여주는 게 더 낫겠죠? 후작의 성이 아틸란타의 성벽보다 삼엄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후드를 쓴 이자벨이 미소 지었다.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들을 해치고 군대의 최선두로 나갔다. 참모진들과 주변 사람들 역시 우루루 따라왔다.
남부군은 저곳을 거점 삼아 새로운 교두보를 만들어야 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때리면 성벽은 무너뜨리지 않고, 성문만 부술 수 있을까? 벨로크가 고개를 까딱거릴 때. 아델이 다가왔다.
“벨로크님. 이거···”
잠깐 주춤거린 그녀가 파양 무늬가 새겨진 장창을 건넸다. 이건 또 오랜만이네. 벨로크는 왕의 장창을 받아들여서 살폈다. 아리안에서의 사투 이후로도 아델에 의해 이리저리 굴렀는지. 창에는 무수히 많은 흠집이 나 있었다. 하지만 창날은 번들거렸고, 손잡이에는 때 역시 보이지 않았다. 관리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허락도 없이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그것이···”
고개를 푹 숙인 아델이 꼼지락거렸다. 처음에는 여정 도중 무기가 부러졌기에, 살기 위해 휘둘렀었다. 나중에 가서는 벨로크를 떠올리기 위해, 그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부적 삼아 휘둘렀다. 그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다. 진작에 수리를 한 후 보관해뒀어야 했는데. 이런 멍청이.
아델의 고개가 점점 내려갈 때. 벨로크가 그녀의 손에 장창을 쥐여주었다.
“너 써라.”
“네?! 어찌···”
“지금껏 선물 하나 못 챙겨준 게 미안해서 그렇다. 다음엔 중고품이 아닌, 더 좋은 걸로 주마.”
“저, 전 이걸로 충분합니다. 과분합니다! 아니, 그보다 벨로크 님. 대검도 부서지셨는데. 이것마저 없으시면 성문을 어떻게 부시려고 하십니까?”
얼굴에 홍조를 띄웠던 아델이 당황했다. 그녀의 시선은 벨로크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얄팍한 장검으로 향해있었다.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꾸욱 쥐어 보였다.
“이걸로.”
그는 혼자서 성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참모들과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웬 미친놈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데비안이 소리쳤다.
“경? 벨로크 경?!”
“자, 잠깐 벨로크! 혼자서 뭘 어쩌려고?!”
“쉿. 그냥 보고 있기만 해요. 우리 어린 영주님.”
달려가려는 베로니카를 이자벨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베로니카는 흣 신음을 흘리더니 못 박힌 인형처럼 제 자리에 우뚝 섰다. 화린이 흠칫했다. 이자벨은 이제 이 행동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남부군의 소란은 성 위에 있는 후작군에게 아주 잘 보였다.
“뭐지? 저 기사 놈은? 왜 혼자서 이곳으로 오는 건가?”
“대장전을 신청하려나 봅니다. 절대 받아들이시면 안··· 어?”
장군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새하얀 갑주를 입은 기사가 이미 화살과 주문이 닿는 범위를 지나쳐 계속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발사하겠다!”
벨로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싼 수천의 병사들, 콧대 높은 귀족과 야전 지휘관, 살인 무술의 달인인 기사들과 신비를 부리는 마법사들까지. 그들더러 똑똑히 보라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큼직한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그 기세에 혹은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장군이 손짓했다.
“미쳤나? 쏴라!”
활줄이 퉁 튕기며 화살을 밀어냈다. 냉혹한 쇠붙이들이 청량한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었다. 사이사이마다 간격이라고는 손가락 한 뼘도 되지 않았으니. 사내는 금세 고슴도치가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그의 주변으로 무형의 기운이 터져나갔다. 화살들은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에 짓눌린 듯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억?”
양측 병사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장군이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마, 마법사다!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해!”
성벽에 대기 중이던 마법사들이 나섰다. 몇몇은 입술을 달싹이며 벨로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의식 세계에 침범함으로써, 주문의 표출 자체가 불가능하게 뒤흔들어 놓을 속셈이었다. 또 다른 몇은 양손에 불과 얼음, 벼락을 띄워냈다. 그 순간. 벨로크에게 손을 뻗고 있던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주, 주문이 아닙니다! 이건··· 컥.”
손을 뻗었던 마법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다른 마법사들은 놀랐지만, 곧 파괴적인 원소들을 쏘아냈다. 소용없었다. 그 빛무리들은 벨로크의 몸에 닿기 전. 아무런 전조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이제 병사들은 당황을 넘어 경악했다. 후작이 몸을 떨었다.
“뭐, 뭐냐?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
“로드리! 어떻게 된 건가!”
장군이 고용된 마법사를 다그친 순간. 벨로크는 해자를 뛰어넘어 성문 앞에 도달해있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기름먹인 나무에 강철을 덧대어 보강한 이 거대한 구조물은 무척이나 두터웠다.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과 미세한 홈들이 그 견고함을 더욱더 증명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듯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꾸우욱. 정오의 태양이 솟아오른 핏줄을 한층 더 선명하게 비추었다. 거칠고 매마든, 단련된 사내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들이 지은 요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주먹이 행한 일은 놀라웠다. 벨로크는 산책이라도 나가듯.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쿠우우우. 폭풍이 휘몰아치며, 성벽이 흔들렸다. 성문은 우지끈 비명을 지르며 조각났다.
“으아아아!”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이는 성벽 위에 있던 후작과 장군,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두둑. 쏟아지는 흙먼지 안에 시커먼 인영 하나가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인간들은 숨소리조차 멈춘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람들의 두 눈은 미동조차 없이 이 초월적인 현상을 똑똑히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 고요한 침묵 속에서 벨로크는 손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바닥을 쿵 찍으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다면 항복하라.”
전사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수 천 개의 창칼이 일제히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그 속에는 장군과 후작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후작군은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그렇게 남부군은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하이로드의 영지를 점령했다. 벨로크라는 이름 석 자가 왕국 전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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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린 지방을 다스리던 대군주가 항복하니 그 휘하 영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남부군 아래로 들어왔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성문을 걸어 잠갔으니. 굶어 죽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터였다.
요 며칠 동안 베로니카는 바쁘게 움직였다. 말을 듣지 않는 기사들과 도시 내 권력자들을 처형하고, 이번에 새롭게 합류하게 된 병사들을 정신 개조 시키고, 영주들의 아들딸들을 볼모로 삼아 그들의 목줄을 채웠다.
“후우.”
한숨을 쉰 베로니카는 본래라면 후작의 집무실이었을,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잔을 들어 올렸다.
황금과 루비로 치장된 잔 안에는 술이 담겨 있었다. 현재 도시 내에서 흐르고 있는 선혈처럼, 아주 새빨간 적포도주였다. 그녀의 얇은 입술이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끄아아아!
때마침 죄수가 처형당하고 있는지. 창밖으로는 섬뜩한 비명이 울렸다. 그녀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린 잔을 흔들었다.
리트린 지방의 광활한 땅과 재산, 병장기들과 전투마들이 손에 들어왔다. 게다가 벨로크가 가진 압도적인 무력을 주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고, 남부군이 이 남부의 진정한 패자임을 증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서부와 동부, 북부와 힘을 합쳐 중앙을 치거나. 그들을 다 잡아먹거나. 아니면 남부군이 먼저 중앙을 차지하고 남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는 것이었다.
“후후후.”
피에 굶주린 여백작이 아닌, 대영주 베로니카. 아니, 이제는 왕의 부인, 하늘 아래 제일 높은 자의 배우자가 될 자신. 베로니카는 기분 좋게 웃었다.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을 찬양했다. 선남선녀라는 칭송이 자자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명 따위, 패배자들의 넋두리 따위.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자신은 든든한 동아줄을 잡았고, 이 땅의 권력자로서, 최강의 전사의 옆을 지킬 아내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일을 해야 했다.
때마침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짧은 갈색 머리를 멋들어지게 넘긴 사내. 데비안이었다. 그토록 모진 전장을 겪었지만, 그는 아직 앳돼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너는 내가 영주님이라고 부르라고···”
베로니카는 술잔을 든 손에 힘을 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잔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데비안보고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그가 다가오자 베로니카는 몸을 돌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얇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맨발이었다. 햇살에 비치는 새하얀 살결과 손질된 발톱이 못내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 아가씨? 왜 부르셨···”
“주물러.”
“네?”
“발. 주무르라고.”
베로니카는 제 발을 내밀며 턱짓했다.
데비안은 멈칫했다. 벨로크가 돌아오기 전. 그와 베로니카 둘만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그녀를 안마해주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그녀는 남편 될 사람이 있는 레이디였다. 정숙한 아가씨. 정숙해야 될 아가씨.
“저, 제가 아가씨의 옥체를 건드렸다가는 벨로크 경이 저를 죽일···”
“벨로크는 바빠. 앞으로의 격전을 위해 수련도 해야 하고, 그 요정인지 악마인지 하는 여자하고 붙어먹고 있거든.”
이자벨씨를 말하는 건가? 능력도 좋으시군.
“그렇다고 해도 아가씨. 그게 외간 남자의 손길을 허락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내가 너하고 무슨 몸을 섞었니? 시끄럽고 발이나 주물러!”
신경질적으로 외친 베로니카가 오른발을 휘둘렀다. 이를 얻어맞은 데비안이 투덜거리며 얼굴을 매만졌다. 그는 그 후로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베로니카의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고된 일과 때문인지 많이 뭉쳐있었다.
“음, 으흠··· 하아. 그 사람이 이렇게 내 발을 주물러주면 얼마나 좋을까?”
베로니카는 종아리로 와닿는 사내의 손길을 느끼며 얼굴을 상기시켰다. 데비안은 쪼그려 앉은 상태로 말했다.
“부탁해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벨로크 경은 강하시고 다정하신···”
“내가 어떻게 그러니? 철없는 어린애처럼 보일 거 아냐?”
“아가씨는 아직 어리신 게 맞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과분한 짐을 짊어지고 계신 것도 맞구요. 그러니 배우자에게라도 진심을 털어 넣고, 어리광 정도는 부리셔도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청년기사는 아리따운 여인의 맨살을 만지고 있음에도, 흑심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베로니카는 의자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기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어벙하지만 꼿꼿한, 정의감 넘치는 신인 기사. 때 묻지 않은 사내. 때로는 동생 같고, 때로는 오빠 같은...
“나이도 똑같은 주제에 어디서 훈계질이야?”
“나이라는 것이 꼭 현명함과 지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다섯 살배기 애한테서도 배울 것이 있다면···”
“네 명.”
“네?”
“벨로크의 옆에 있는 여인들 말이야. 네 명이라고. 아델 경, 카라, 이자벨, 그 화린이라는 아가씨까지. 네 명이야. 하이에나들 앞에서 내 살을 깎아 먹으라고?”
데비안은 아델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베로니카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 멈추지 말고 계속 주무르라는 뜻이었다.
“태양의 성녀, 불꽃의 마녀, 색기 넘치는 악마와 무술로 단련된 격투가까지. 하나하나가 대단한 인물들이야.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아가씨께서 뭐가 부족하시다는 겁니까? 영지를 다스리고, 아래 귀족들을 다스리고, 밤낮 없이 서류와 씨름 하는 것 역시 보통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진정 사랑한다면 능력 같은 건···”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너도 알잖아? 물론, 그는 그럴 사내가 아니야. 괜한 내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불안해.”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다고 해도 아가씨께서 갑자기 검술의 달인이나, 신의 간택, 악마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사람은 자기 주제에 맞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데비안은 종아리를 꾹꾹 누르다가 이제 그녀의 발가락을 마사지했다. 베로니카는 옅은 신음을 흘리다가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지. 내가 배워온 것. 보필, 내조, 다스리는 것.”
중얼거린 그녀가 갑작스레 상체를 확 숙였다. 여리한 손은 데비안의 얼굴을 턱 잡았고, 그녀의 푸른 눈은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맙구나. 데비안. 나의 친구이자 첫 번째 기사야. 덕분에 결심이 섰다.”
베로니카의 말투가 바뀌었다. 오만한 지배자의 그것이었다. 데비안은 흠칫 놀라며 그녀의 다리에서 손을 뗐다.
“아가씨?”
“내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부탁이요? 명령이 아니라?”
베로니카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 이건 너와 내가 아무리 주군과 신하된 관계라고 할지라도 꺼내기 힘든, 조금 조심스러운 얘기거든."
데비안은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이러십니까? 이야기라도 해주십시오."
“말 하지 않았느냐? 함부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라고,"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으며 뜸 들이다가 다시금 말했다.
"데비안. 맹세 하나만 해다오. 설령 너는 너의 기사도에 위배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위해. 너의 주군을 위해서 기꺼이 눈을 돌릴 수 있겠느냐?”
“그게 무슨···”
“거절해도 좋다. 다른 자들을 뽑으면 되니까. 하지만 난 네가 꼭 이 일을 맡아줬으면 좋겠구나. 넌 나와 같이 그간의 역경을 헤쳐온, 진흙밭에서 같이 굴렀었던 친우니까.”
그녀의 기세에 압도당한 데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로니카는 서랍을 열었다. 이윽고 그 안에서 꺼낸 물건들을 데비안의 앞으로 툭 던졌다. 날이 잘 서 있는 단검 하나와 별 무리가 촘촘히 박혀 있는 망토 하나였다.
"이건...?"
베로니카는 턱을 괸 채,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러운 일을 좀 해줘야겠다. 도시 내에 쓰레기들이 워낙 많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