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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벨로크에게는 모르겠지만, 나름 훈훈하다고도 할 수 있던 막사 안은 난리가 났다. 베로니카는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고, 진정되었던 눈가가 다시 붉어진 아델은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소리치며 벨로크를 다그쳤다. 냉정을 잃은 카라는 제 머리를 마구 헤집다가 손톱을 까득 물었다. 쉴 틈 없이 다리도 떨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네? 벨로크니임!”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제, 제사라도 올려야 하는 게냐?”
“다들 조용히 좀 해봐! 상대는 신이야! 그것도 이 세상의 주신들보다 한층 더 격이 높은 존재라고!”
당사자인 나보다 너희들이 왜 더 난리야? 벨로크는 아델과 베로니카에 의해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여인들의 확장된 동공, 흐르는 식은땀, 맥동하는 심장 소리까지.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걱정해준다는 것이, 파도처럼 몰아치는 이 마음들이 못내 기분 좋았다. 따스했다. 그래도 이곳에 떨어져서 마냥 인생을 헛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 어?! 네가 죽는다는데···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게 그렇게 웃겨?!”
카라는 벨로크에게 핀잔을 주며 씩씩거렸다. 벨로크는 아델과 베로니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카라의 앞으로 가서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뭐가 문젠데?”
“으, 응?”
“내가 이기면, 아니, 우리가 이기면 되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그게 말처럼 쉬워? 상대는 이 모든 혼란을 초래한 그야말로 괴물이잖아. 대악마도 천상신도, 고대신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진정한 초월자.”
굳은살 박힌 손이 새하얀 얼굴을 연신 쓸었다. 그때 마다 붉은 머리 여인의 화려한 얼굴은 쉴 틈 없이 그 표정을 바꾸었다.
“언제는 우리가 쉽게 살아왔나? 지하감옥, 악마들이 넘쳐나는 왕궁, 사막의 모래 수렁, 탐욕스러운 귀족과 도적들까지. 그것들 모두가 실재하는 위험이었다.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어.”
카라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다. 죽지 않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거다. 놈도 그 과정에 마주친, 그저 그런 장애물 중에 하나일 뿐이야.”
벨로크의 말은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궤변이었다. 분명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은 일행이 상대했던 괴물, 악마 그 어떤 존재들보다 강대한, 그야말로 끔찍한 존재였다. 벨로크가 한 말은 그냥 낙관적인 희망론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초조함과 절망은 사라지고, 결의와 각오가 서서히 서리기 시작했다.
“진짜··· 신을 상대한다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야.”
카라의 눈가가 휘고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것보단 낫지. 아무튼 이렇게 된 이야기다. 이제 너희들 얘기를 좀 해봐라. 이건 무슨 일이지? 전쟁이 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그게···”
베로니카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아델이 나섰다.
“벨로크님과 이자벨이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저와 카라는 주문의 힘을 빌려 벨로크 님의 흔적을 쫓았습니다. 로벤으로 이어지더군요. 저희는 그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베로니카 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직후 두 사람은 베로니카로부터 벨로크가 자신을 도와주고 요정왕국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뒤를 쫓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게오르그가 보낸 암살자가 베로니카의 목을 노렸단다. 하지만 카라와 아델 덕분에 그녀는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베로니카는 아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느꼈다. 이 혼란한 전장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 나 스스로를 지키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고. 어떻게든 세력을 일구어야 한다고.”
그래서 베로니카는 카라와 아델의 도움을 받아 인근 영지인 베이츠와 칸티오를 함락시키고, 남부군을 결성했다. 그렇게 점점 세력 불려가다가 종래에는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처음에는 벨로크 님의 뒤를 따를까 생각했지만, 거리 차이가 너무 나더군요. 길이 엇갈릴까 염려되어 베로니카 공을 도와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들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게오르그 공작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요.”
아델이 벨로크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검은 눈이 반짝거렸다. 건틀릿을 낀 양손은 꼼지락거렸고, 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를 보는 모양새였다. 벨로크는 몇 달 만에 보는 어린 종자, 아니, 이제는 완숙한 처녀가 되어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키가 좀 큰 것 같은데?”
“흣. 벼, 별거 아닙니다! 주인을 보필하는 것이 기사 된 자의 의무 아닙니까! 저, 저는 벨로크 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아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특히나 베로니카를 힐끔거렸다.)이윽고 결심이라도 한 듯. 벨로크를 끌어안았다. 꾸우욱. 보통 사람이라면 척추가 반으로 접힐 정도의 힘이었다. 여기사는 어색한 포옹으로 버둥거렸고, 벨로크는 마치 애를 달래듯 아델을 토닥거렸다.
그때. 이자벨이 나섰다.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벨로크를 보는 그녀의 표정은 퍽 여유로웠다. 이미 서열정리가 끝난 짐승 같은 모양새였다.
“정리하자면 세 사람은 후작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다는 말이네요.”
“전투는 사실상 우리들의 승리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베로니카는 남부군을 둘러싼 주변 상황을 말했다. 후작군은 성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고, 홀로 고립된 남부군을 동부와 서부, 중앙이 노리고 있다고.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고.
“이쪽이나 저쪽이나 문제가 많긴 하군요. 그렇다면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죠. 음. 지금으로서는 하이로드의 성을 차지하는 것이 그나마 제일 나은 방법이군요. 내가 해요?”
마치 물이나 한잔 하자는 듯. 이자벨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카라는 두 사람이 가진 힘을 상기하고는 손뼉을 쳤다. 아델도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두 사람이 나선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겠네. 그렇다면 벨로크가 나서는 게 맞다고 생각해.”
“왜?”
벨로크가 되물었다. 화린도 있고, 이자벨도 있는데. 왜 나야?
“그야 넌 남부군을 이끄는 지휘관. 베로니카 공의 약혼자잖아? 명목상이지만.”
카라는 명목상이라는 말에 힘을 준 후 말을 이었다.
“로벤에서부터 함께 해왔던 자들이 아닌 이상. 병사들은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네가 누군지. 궁금해 하고들 있어. 이러한 상황에서 네가 나서서 실력을 보여준다면? 넌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전사야. 그리고 지금은 전시지. 수많은 사람들이 너의 무력에 매료될 거야. 베로니카 공은 더 튼튼한 지지기반을 얻게 될 테고, 너는 남부군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거지. 지휘관의 약혼자로서. 아니, 새로운 지휘관으로서.”
베로니카는 새로운 지휘관이라는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크는 영 내키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요정 왕국에서의 그 개판이 떠올랐던 탓이다.
“나보고 병사들을 끌어모아 군벌이 되라는 얘기인가?”
곧 있을 절대신과의 대결만 생각했지. 이런 쪽은 생각 못했던 벨로크가 되물었다. 카라가 피식 웃었다.
“이미 되고 있어. 베로니카 공의 밑에는 열 개의 가문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오천 오백 명의 병사들이 있으니까. 게다가 공은 네 말이라면 심장이라도 뽑아서 줄 기세니. 사실상 이들의 주인은 너야. 벨로크.”
“···”
막사 밖에 있는 사람들, 웃고 떠들고, 코를 골며 자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울던 그 수 많은 사람들의 삶. 내가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다고? 벨로크가 말이 없자 카라는 입술을 핥았다.
“우리가 게오르그 공작에게 당했던 때를 생각해? 그때 우리에게 없었던 게 뭘까? 힘? 지식? 능력? 아니야. 그건 바로 세력과 권력이었어. 그때 우리 말을 들어줄, 아니 손발을 맞춰줄 사람들만 몇 있었어도. 우리는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이자벨도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겠지.”
벨로크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카라가 그의 양손을 잡으며 설득했다.
“하물며 지금은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야. 네가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어줄까? 아니, 개소리하지 말라며 칼부터 뽑을걸? 그럼 결과적으로 더 많은 피가 흐를 거야. 하지만 네가 범접할 수 없는 세력의 우두머리라면? 냅다 머리부터 조아리겠지. 비정하지만 그게 현실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야. 우리는 세력이 필요해! 앞으로의 움직임에 제약을 받지 않기 위해서든, 무얼 하기 위해서든!”
카라의 갈색 눈이 이글거리는 안광을 토해냈다. 그녀가 지금껏 당해왔던 핍박, 간단하게는 성문 경비의 무시부터 시작해서, 말을 안 듣는다고 칼을 뽑아 든 영주에 대한 원망, 마녀로 몰려 당한 고문. 그 모든 감정들이 절절히 전해져왔다.
“물론 너한테만 맡겨둘 생각은 없어. 넌 절대신과의 전투를 준비해야 하니까. 자잘한 건 나와 주변 사람들한테 맡겨. 넌 그냥 한 번씩 나서서 싸워주기만 하면 돼. 단 몇 분이면 돼. 그렇다면 넌 명예를 얻을 거고, 위신을 세울 거야. 그리고···”
“왕이 되는 거야.”
“왕이 되는 거다.”
“왕이 되시는 겁니다.”
세 여인은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동시에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화린은 또다시 불거진 세속적인 다툼에 입을 벌렸다. 이자벨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편안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녀의 녹색 안광은 불처럼 이글거렸다.
“왕이라···”
벨로크는 부정도 긍정도 안 한 채, 피식 웃었다. 그가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 이곳이 게임 세상이라고 믿었을 때. 아드리아의 재림의 엔딩을 보는 방법 중 하나가 플레이어가 왕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
만인지상. 천상신들의 아래.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
이게 이렇게 흘러가나?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천막 안이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을 때. 듣고 있던 아낙스가 고개를 저었다.
“구원자여. 나는 그대가 절대신을 비롯한 지하의 족속들을 물리치는 것에는 그 어떠한 조력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만, 인간들끼리의 다툼에 낄 생각은 없다. 나는 요정족의 수호자고, 셀레네의 이름을 등에 업은 위상이니까. 양해를 부탁한다.”
“물론이다. 너한테는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고. 그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다.”
벨로크는 카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순순히 수긍하자 아낙스가 덧붙였다.
“노파심에 한마디만 더 하겠다. 지성 종족끼리 피 흘려서 좋을 것은 없다. 이 땅에 많은 선혈이 흐를수록, 죽어 나간 사람들의 원혼이 쌓일수록, 지하의 족속들, 음침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 그 악의 종자들을 해방시킨 절대신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니까.”
“그래, 알지. 그렇기에 나도 최대한 유화적으로 행동할 생각이다.”
벨로크는 한층 더 피곤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세상사란 게, 사람 마음이란 게, 어떻게 생각한 대로만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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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쿵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사이로 발소리가 섞여들었다. 누군가의 것은 묵직했고, 누군가의 발디딤은 도둑처럼 얄팍했다. 하지만 그 특색있는 보폭들도 수천 개가 모인다면 그냥 하나의 폭력이 될 뿐이었다. 주변의 포식자들을 쫓아내고, 대지를 요동치게 할 뿐.
“손 조심해!”
나무를 엮어 만든 사다리, 거대한 바위를 쏘아 올릴 투석기, 늑대의 머리가 음각된 공성추까지. 튼튼히 쌓아 올린 석벽을 부수고, 적들의 심장을 먹어 치우기 위한 공성 병기들이 그 흉흉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놈들이 미쳤나? 기어이 끝을 보겠다고?”
루텐버그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화려한 갑옷을 차려입고, 성벽 위에 우두커니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작은 도열해 있는 병사들과 공성 병기들, 옆에 쌓인 바위, 그들 앞에서 소리치고 있는 푸른 머리칼의 여인을 보면서 땀을 삐질 흘렸다.
“장군. 성벽이 잘 버틸 수 있겠지?”
후작의 옆에 있던 사내. 판금 갑주를 차려입고, 콧수염을 기른 장군이라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록 저희들이 리트린 평야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회전과 공성전은 크나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다리와 공성 병기를 들고 달려들다가 죽어 나가는 것뿐입니다.”
장군이라는 사내가 옆을 고갯짓했다. 다른 성들보다 배는 두터운 성벽 위에는 끓는 기름과 화살 무더기,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후작은 안심이 되었다는 듯 표정을 풀다가도 혹시나 싶어서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그년이 이렇게 멍청한 년이었나? 이렇게 싸워봤자 서로에게 남는 것은 없어. 오히려 공멸할 수도 있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상해···”
장군은 후작을 안심시키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일군의 지휘관으로서 모시는 자의 불안감을 배제하는 것 또한 그가 할 일 이었다.
“여 백작의 나이는 스물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피가 끓어오를 나이지요. 그리고 그녀가 쌓아 올린 전공들 대부분이 태양의 성녀와 불꽃의 마녀가 행한 일 입니다. 아마 조바심을 느꼈을 겁니다. 그년이 가진 것이라고는 귀족이라는 직함뿐이니까요.”
“음··· 그래도.”
“게다가 첩자들에게 듣기로 며칠 전. 총사령관의 약혼자라는 놈이 대뜸 나타났답니다. 대단한 실력을 갖춘 기사라고 하더군요. 여 백작의 입장에서는 제 약혼자에게도 전공을 좀 몰아주고 싶었겠지요. 일단 두드려보고 안 되면 도망칠 겁니다. 주변 마을이나 좀 약탈한 후. 본인과 약혼자의 권위를 좀 세우고 끝내겠지요.”
세간에서는 겁쟁이라는 시선을, 주변 사람들에게는 신중함을 그 미덕으로 삼은 루텐버그 후작은 후우 한숨을 쉬었다. 장군의 말이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망원경을 들고 있는 그의 한쪽 눈이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