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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96화 (19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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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가 대체 뭘 보는 거지···?”

남부군의 진영 내부에서는 한창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장의 학살자, 떠오르는 태양의 재림, 기병대의 대장이자 남부군의 실세 중의 실세인 카리스마 넘치는 여기사. 아델 경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꼴사납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오랜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새색시처럼 보였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 일 텐데···

“벨로크··· 너는 진짜! 이··· 바보 멍청이가! 흐으읍···”

불꽃의 마녀라 불리우는, 강대한 주문으로 적군에게는 악몽을, 아군에게는 그 끝모를 지식과 신비로 조언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현자. 카라 역시 화려한 얼굴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한 사내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저 도도한 여인네들이 이런 행동을?

몰아치는

“수, 술이 많이 됐나?”

병사들은 느닷없이 하늘에서 사람들이 떨어졌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지금의 광경에 맥을 못 췄다. 곧이어 그 소란이 지휘부에게까지 알려졌는지. 데비안을 위시로 한 잘 차려입은 기사들 몇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침입자들에게 오히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들을 정중하게 모셔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현재 군영 내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막사. 베로니카의 거처였다.

“시부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병사들은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속으로는 저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너무나도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였기에 저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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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주를 벗고 얇은 드레스로 환복한 베로니카는 옅은 화장까지 끝마친 채,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기다렸는 줄 아느냐? 넌 정말 매정한 사내다. 여인네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천하의 바람둥이로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왔으니 되었다. 난 그걸로 되었어.”

베로니카는 물기 가득한 푸른 눈을 감았다 뜨며, 느릿하게 벨로크의 얼굴을 매만졌다. 악마인 이자벨을 비롯해 주변에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있어도 개의치 않다는 태도였다.

아델 역시 여전히 붉어진 눈가로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가락과 팔을 꼼지락거리는 게 그녀가 스스로를 얼마나 억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자벨··· 무사해서 다행이야.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얼마나 걱정이 되었던지.”

“고향에서 벨로크를 만났어요. 덕분에 나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것들을 털어낼 수 있었죠. 카라와 아델도 건강하게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이자벨은 아델과 한 번 포옹했다가, 다시금 카라를 끌어안았다. 카라는 이자벨의 등을 토닥거려 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내린 여인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더니. 벨로크와 베로니카를 힐끔거렸다. 그 옆에는 이자벨처럼 머리에 뿔이 달리고, 귀가 길쭉한 녹색 머리칼의 여인이 시큰둥한 얼굴로 서 있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얘는 전쟁을 막으러 간다더니. 웬 여자들을 더 꼬셔왔어? 더군다나 이자벨과는 한층 더 관계가 깊어진 것 같은데?

카라는 샐쭉한 표정으로 벨로크를 노려봤다가 손뼉을 짝 쳤다.

“자, 해후는 여기까지 하고, 좀 더 건설적인 얘기들을 해볼까? 우선 저분들부터 소개해줄래?”

카라가 화린과 아낙스를 고갯짓했다. 벨로크는 안고 있던 베로니카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은 화린. 요정족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나스 밀림으로 향하던 중. 만난 동료다.”

화린은 동료라는 말에 움찔했지만, 이내 양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화린이라고 합니다. 강철의 사원의 수행자이자 이제는 계승자죠. 벨로크 씨에게는 여러모로 신세를 졌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동행을 자처했습니다. 다들 잘 부탁드려요.”

아델은 화린의 단련된 육체를 보며 감탄했다. 카라는 이자벨을 툭 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표정에는 저 말 곧이곧대로 믿어야 되는 건 아니지? 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사심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인 건 확실해요. 벨로크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아.

-그게 바로 내가 우려했던 거잖아. 여기서 경쟁자가 더···

속삭이던 카라가 입을 헙 다물었다.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온, 초록 머리의 여인이 했던 말 때문이다.

“구원자의 동료들아. 다들 반갑다. 나는 아낙스. 귀 큰 아이들의 수호자이자, 달밤을 가로지르는 날개, 여신의 맹우이자 오래 산 용이다. 나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많다만 그냥 아낙스라 불러 다오.”

난데없이 자신이 용이란다. 아델과 카라, 베로니카 등.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벨로크가 허언을 할 사내는 아니니까.

“자, 잠깐 아낙스? 수 백 년 전. 세상의 한 획을 긋고 사라진 요정족 출신의 대마도사? 그 사람은 분명 승천했다며? 아니, 그보다 그 정체가 실은 용이라고?”

당황했는지 카라는 와다다 말을 쏟아냈다. 용은 그 반응을 즐기는 것인지 으흠. 헛기침을 하며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낙스라면··· 흐르는 숲에서 발견했었던 비밀 던전의 주인이 아닙니까? 분명 그곳에서 대마법 보호막에 대한 주문을 발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델은 저 여인이 용이라는 말을 믿는지. 아니면 별 상관이 없는지. 다른 점을 꼬집었다.

그래, 분명 그런 일이 있었지. 한동안 주문 막이 갑옷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고, 이자벨을 처음 만났던 곳도 그곳이었어.

“잊혀진 구시대의 잔재를 발견했던 사람들이 너희들이었구나. 그 주문은 미완성이었다. 마법진이 손상되면 효과가 반감되고, 아군의 주문 역시 막는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불완전했지. 이거 부끄럽군.”

아낙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뺨을 긁적였다. 카라는 갈색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허리춤의 룬북. 갈드라보크를 꺼내 들었다.

“정말··· 정말 당신이 그 대마도사 인가요? 그렇다면 여기 새겨져 있는 이 주문들은···?

“오. 이건 또 오랜만에 보는군. 그래, 맞다. 이것 역시 내가 저술한 것이다. 아무리 용이라고 한들. 망각의 저주는 피해 갈 수 없기에 일기 삼아 써놓은 것이지. 어떠냐? 제법 괜찮은 주문들이 많지?”

아낙스는 룬북을 쓰다듬으며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오래된 일기장을 들춰본 어른의 모습이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이건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희대의 역작이라고요. 그 책의 저술자가 내 앞에 있다니··· 헬레나 맙소사···”

카라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낙스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녀에게 주춤 손을 뻗으려다가 망설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거의 숭배하는 신을 만난 신도의 모양새였다.

아낙스 또한 싱글싱글 웃으며 카라의 반응을 즐겼다. 고대신과 대악마, 인간을 초월한 전사의 틈에서 핍박받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인간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원래 남들의 숭배를 먹고 사는 생물이었으니까. 아낙스는 카라의 손목을 슬쩍 잡더니. 카라가 그간 쌓아 올린 주문들을 관음했다.

“오호. 인간치고는 훌륭하군. 거의 엘가르와 비견될만한 재능이로다. 이 정도라면 가르치는 맛이···”

아낙스가 카라를 보며 눈을 빛낼 때. 벨로크가 끼어들었다.

“아무튼 저 여자는 용이 맞다. 어떻게 된 거냐면···”

벨로크는 자신이 그동안 겪어왔던 일들을 말했다. 로벤을 떠나고, 해신을 만나고 나스 밀림으로 가. 대악마를 죽이고,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음모를 분쇄하고, 종래에는 저 용을 만나 공간이동 주문을 사용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공간이동 주문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물질 세상에 혼재해 있는 불안정함을, 어쩔 수 없는 좌표의 누락을 극복했단 말이야? 이 사실이 공표된다면 학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질거야···역시 용의 주문인가?”

카라가 또다시 놀랐다.

“그래서 하늘에서 떨어지셨던 겁니까? 정말이지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아델이 병사들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툴툴거렸다.

“어인과 고대신에 관한 얘기는 리쿠와 아피아로부터 들었도다. 하지만 용과 대악마라니. 그야말로 전설적인 업적이로다. 너는 대체 얼마나 드높은 존재가 되려고···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구나. 몸은 괜찮은 게냐?”

말을 하던 베로니카는 갑작스레 벨로크의 팔짱을 꼈다. 얇은 드레스 하나만을 입고 있었기에 온기며 부드러운 살덩이의 감촉이 아주 잘 전해져왔다. 어째 애정 표현이 더 강렬해진 것 같은데?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벨로크가 슬쩍 옆을 돌아봤다. 베로니카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가슴을 비비적거리며 막사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순간. 벨로크의 괴물 같은 오감은 막사 내의 온도가 한층 더 낮아진 것을 감지했다. 으드득. 누군가가 이를 악물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발을 쿵 찍었다. 그 사이로 소름 끼치는 안광도 느껴졌다.

“응? 왜 말이 없느냐? 아, 피로가 쌓인 것이냐? 그렇다면 내가 이를 달래주어야겠구나. 사내의 지친 영혼과 육신을 쉬게 하기에는 여인의 품만 한 것이 없으니까. 이것 또한 약혼녀로서의 도리겠지. 걱정말거라. 와이번의 가죽으로 만든 이 막사는 방음이 아주 잘 된단다.”

벨로크는 베로니카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막사 내에 모인 벨로크의 동료, 혹은 애인 될 자들의 앞에서 눈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나는 인간들의 관습법상 이 사내의 약혼녀다. 몸도 섞었고, 법으로 묵인 관계다. 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건 베로니카의 내면 속 불안감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벨로크의 주변에 있는 여인네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능력들을 지녔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영주로써의 직함과 푸른 피가 흐른다는 것을 빼면 자신은 가진 것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스스로를 어필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답지 않게 치기 어린, 아이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다들 살기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으니까.

“흐흥.”

베로니카는 콧방귀를 끼었고, 벨로크는 바짝 굳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발. 이걸 어찌한단 말인가? 다 자신이 뿌린 업보였다. 그가 나서서 뭘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개개인의 감정을 그가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잘못하면 사이에 끼어서 죽겠는데? 그는 지금 이 순간. 혼돈의 존재와 마주했을 때보다. 고대신인 노르드와 처음 마주했을 때 보다 더한 생명의 위기감을 느꼈다.

그 모습이 눈꼴 시려웠는지. 아니면 진정 궁금한 게 생겨났는지 두 사람의 팔을 턱 잡은 카라가 그사이를 갈라놓으며 소리쳤다.

“잠깐!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했잖아! 어째서 우리 앞에서 멋대로 사라졌던 거야? 어째서 우리만 남겨두고 로벤으로 떠났던 거냐고!”

아델 역시 이게 궁금했다는 듯. 벨로크를 또렷이 직시했다. 그래, 이자벨과 화린도 알고 있으니. 너희들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세 사람에게도 진실을 밝혀야 했다. 그녀들 역시 지금의 사태에 깊게 관련되어 있으니까.

벨로크는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목걸이가 빛나며 푸른 빛무리가 한곳으로 모이더니. 노르드가 나타났다.

“사공이 모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 게다가 입으로 전해지는 말은 때때로 오해를 부르는 법. 내가 도와주마.”

“또 뭐야?! 또 여자야? 너! 벨로크! 이 바람둥이가! 이건 또 뭐···”

이제는 제 머리칼만큼이나 얼굴이 시뻘게진 카라가 와락 소리쳤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입을 헙 다물었다. 다가온 노르드가 그녀와 이마를 맞대었기 때문이다.

카라의 갈색 눈이 멍해졌다. 그녀의 동공 위로 천상신들과 고대신, 절대신들의 비화와 벨로크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들이 파도처럼 지나갔다.

“카라? 벨로크 님! 이게 무슨··· 어?”

노르드는 어리둥절해하던 아델과 베로니카에게도 다가가 기억을 공유했다. 그리고는 벨로크를 보며 싱긋 웃더니.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후. 목걸이 속으로 사라졌다.

거 존나게 편리하네. 무슨 저장장치냐? 캠코더야? 그의 생각이 맞다는 듯. 혹은 웃기다는 듯. 목걸이가 웅웅 울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카라는 혼란을 수습했는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벨로크 네가··· 그, 절대신이라는 존재한테 몸을 빼앗긴다고? 자칫하다가는 세상이 멸망해?”

충격적인 비화를 들은 그녀의 갈색 눈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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