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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95화 (19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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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크고 넓은 천막 안.

커다란 탁자 위에는 리트린 지방의 상황을 요약한 지도가 놓여져 있었다. 상석에는 베로니카가 앉아있고, 그녀 주변으로는 남부군의 참모들, 각 부대의 지휘관, 협력하는 귀족까지. 군 내에서 힘 좀 있다 하는 자들은 다 몰려 있었다.

“잔당들은 드높은 성으로 후퇴.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게볼트 남작을 죽이고 리트머스 자작, 하비에르 남작을 사로잡았으니. 그야말로 대승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베로니카 공!”

주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승리를 기뻐하며 베로니카를 찬양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고운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고, 푸른 눈은 호선을 그리기보다 가라앉아있었다. 베로니카는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탁자를 두드렸다.

“지금 우리가 가진 병력으로 드높은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까?”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참모들은 웃던 얼굴을 슬쩍 굳혔다. 이윽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투가 끝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일을 도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뒤를 돌아보는 여유 역시 필요합니다.”

“드높은 성은 루텐버그 가문의 심처가 아닙니까? 아무리 저희가 큰 피해를 줬다 한들···”

“그래, 그곳은 후작의 본거지이며, 성벽은 이중에 석벽의 두께는 세 배는 된다지. 게다가 도망친 패잔병들이 합류했으니. 최소 네 자릿수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 터. 지금 우리 군으로서는 함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타당하겠지.”

베로니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곧 눈을 부라리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들 우리 군단의 목적을 잊은 것이냐? 진정한 남부의 통일. 나아가서는 왕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히히덕거리고 있을 때인가?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까딱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잃을 수가 있단 말이다!”

후작군에게 큰 피해를 줬다고 한들. 드높은 성안에 있을 후작은 여전히 건재했다.

게다가 그들은 방금 전의 전투로 인해. 남부군의 저력을 똑똑히 확인했을 터. 앞으로는 성문을 걸어 잠근 채, 더욱 수비적으로 나설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남부군을 몰아내기 위해. 서부나 동부의 군벌과도 손을 잡을 수도, 최악은 게오르그 공작과도 손잡을 수도 있었다. 이래저래 남부군단으로서는 방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쿠웅.

푸른 눈을 이글거린 베로니카가 탁자를 쳤다. 참모들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침을 꿀꺽 삼킨 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녀의 옆에 시립해있던 사람이 나섰다. 붉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갸름한 턱선만을 노출시킨 여인이었다.

“베로니카 공. 너무 흥분하셨네요. 그래도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닙니까? 진정하시죠.”

“하지만!”

“지금 이러시는 건 좋지 않아요. 당신의 위치를 자각하세요.”

카라가 베로니카의 어깨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베로니카는 카라와 눈을 마주쳤다가 후 한숨을 내쉬고는 참모들에게 손짓했다.

“부관과 아델 경, 고문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다들 나가보도록.”

참모들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밖으로 나갔다. 이제 넓은 천막 안에는 베로니카와 데비안, 카라, 아델. 네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카라는 로브의 후드 자락을 걷은 후.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변으로 빛무리가 퍼져나가며 천막을 감쌌다. 방음 주문이었다. 베로니카는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구 신경질을 부렸다.

“멍청한 것들이!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그녀를 바라보던 카라는 헝클어졌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탐스럽게 살랑거렸다.

“베로니카 공. 답답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 공의 행동 또한 옳다고 볼 수 없어요. 계속해서 저희들만 가까이 두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한다면 군단의 유대감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카라는 몇몇 참모들의 눈초리가 좋지 않았던 것을 상기했다.

“게다가··· 저들의 주장 또한 틀린 것은 아니에요. 우리 군은 지금껏 계속 달려왔습니다.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죠. 지금으로서는 드높은 성을 함락시킬 방법 또한 요원하구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지 않느냐. 자칫 하다가는 양측에서 공격받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전멸이야.”

그 말에 수긍한다는 듯 카라는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곧 영주의 조언자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자신마저 우왕좌왕한다면 지금 이 아가씨를 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었다. 카라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니 무언가 다른 수를 짜내야죠. 그걸 위해서 저희들이 있고, 병법을 공부하고, 병사들을 지휘하던 참모진들이 있는 것 아닙니까? 잠깐만 머리를 식히시죠. 그리고 다시 회의를 진행하는 겁니다. 머리가 여러 개 모이면 그중에서 하나쯤은 쓸만한 계획이 나올 겁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베로니카는 의자에 힘없이 기대었다.

“하아···”

지금 이 자리에 전장에서 소리높여 군대를 통솔하던 여장부는 없었다. 참모들에게 살기를 내뿜으며 그들을 다그치던 지휘관도 없었다. 그저 수천 명 사람들의 목숨을 짊어진, 책임감에 짓눌리고 있는 여인네만이 있을 뿐이었다.

“각오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들이닥치니 너무도 힘들구나. 그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벨로크··· 벨로크가 보고 싶다··· 내 약혼자...”

얼굴을 감싸 쥔 베로니카가 흐느꼈다.

“아가씨···”

데비안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델은 굳은 얼굴로 베로니카를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공.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은 남부군의 지휘관입니다. 윗사람이 흐트러지면 아래에 있는 자들은 불안함을 느낍니다. 자연스레 기강 역시 사라지겠죠. 그렇게 된다면 공께서 하셨던 약조 역시 못 지키게 되는 겁니다.”

아델의 말은 아랫사람의 첨언에 가까웠다. 하지만 말투는 삐딱하며 냉정했다. 마치 질투하는 여인네의 그것처럼 보였다. 베로니카는 이를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냥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래, 그럴 수는 없지. 난 벨로크를 왕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고귀한 여성이 되어야 해.”

베로니카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은 후. 코를 흥 풀었다. 카라의 도움을 받아 냉찜질을 이용해 부어오른 눈가도 가라앉혔다.

이윽고 스스로를 추스른 그녀는 참모들을 불렀다. 서류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여러 목소리가 오갔다.

-후작군이 성이라는 이점을 버리고, 굳이 평야에서 회전을 벌인 것은 저희들을 얕잡아본 이유도 있겠지만, 추수철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휘하에 있는 다른 영주들 또한 하이로드와 뜻을 같이할 테니. 주인 없는 곡창지대와 성 밖에 있는 마을들은 이제 저희 것 입니다. 이것들을 마구 약탈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다음은?

-이를 바탕으로 벌어들인 재화를 이용해 오히려 저희가 서부군이나 동부와 동맹을 맺는 겁니다.

-너무 근시안적인 대안이군. 우리들은 남부의 해방, 남부의 진정한 통일과 이 나라의 혼란을 종식시킨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소. 외세를 끌어들였다간 남부의 이름을 잇는다는 선전을 할 수 없을 것이요. 수없이 많은 탈주자들이 생길 것이외다.

-들리는 얘기로는 서부는 지금 새로운 전란에 휩싸인 모양입니다. 신성 왕국이 침입해 왔다는군요. 하지만 그 행색이 무척이나 기이하고 꺼림칙한 것이 흡사 괴물을 닮았다는 소문이···

-그렇다면 차라리 후작과 조약을 맺는 것은 어떻습니까? 녀석들도 저희들의 저력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서로 간에 조금만 양보한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죽은 게볼트 남작이 후작의 동생인 것을 잊었소? 게다가 후작 역시 시간을 끌면 자기들한테 유리한 걸 알 텐데. 퍽이나 원수와 조약을 맺겠군.

-그렇다면 어쩌자는 겝니까? 전 병력을 모아 드높은 성을 함락시키러 출진이라도 해야 된 단 겁니까? 수성하는 측에 비해 공성 측은 기본적으로 3배의 병력은 더 필요합니다. 성공한다 해도 피해가 클 테니 우리들은 주변의 하이에나들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실패한다면 그대로 끝입니다.

-차라리 약탈만 하고 본진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피는 것은···

수없이 많은 의견이 오고 갔다. 그중에서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도 있었고, 그냥 의미 없는 말다툼도 있었다. 하지만 천막에 모인 자들은 베로니카가 거르고 거른, 제 나름대로의 능력을 입증해낸 정예들이었다. 시간이 흐른다면 분명히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결말을 내지 못한 회의가 끝나고, 아델과 카라는 막사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걸···”

카라는 리트린 지방의 차가운 기온이 적응 안 되는지. 어깨를 감싸 쥐며 입김을 내뱉었다. 아델이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오래도록 함께 여행하고, 네 사람에서 이제는 서로밖에 안 남은 두 사람은 현재 가족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로브 아래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고마워. 아델.”

아델은 마주 웃어주려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벨로크 님께서는 대체 어디에 계신 걸까?”

“안 그래도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주문을 써볼 생각이야. 무사해야 할 텐데···”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군영 내부를 걸었다. 높으신 분들께서는 다들 골머리를 썩고 있겠지만, 병사들은 아니었다.

“마셔라! 마셔라!”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가서 에시앙에게 고백할 거고, 그녀의 푸짐한 엉덩이를 마음껏 만져줄 생각이지.”

“지랄. 그때까지 네가 살아있을 것 같냐?”

“손가락 몇 개 없는 너보다야 내가 더 확률이 높겠지.”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크크크.”

요란스럽게 웃은 병사들이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투명한 액체가 흘러넘치며 바지춤을 적셨다. 이윽고 까무잡잡한 턱수염 안으로 들어갔다. 군영 안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차가운 흙바닥 위에서는 모닥불이 군데군데 피어올랐고,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잊게 해줄 술과 고기, 밀빵과 건더기가 듬뿍 든 스프가 김을 모락모락 흘리며 여기저기 오갔다. 하지만 그 따뜻한 열기도 카라와 아델의 굳은 얼굴을 풀어버릴 수는 없었다.

“저들의 목숨이, 저들과 연관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이제는 우리 손에 달려있어··· 베로니카 공의 마음이 이해는 돼. 나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한 번씩은 지금의 상황이 버겁다고 느껴.”

“···잘 해낼 거다. 아니, 해내야 해. 벨로크 님과 이자벨이 돌아올 보금자리를 우리 손으로 일궈내는 거다.”

카라는 안쓰러운 눈으로 여기사를 바라보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멍청이가 이런 네 마음을... 아니, 우리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걸어가던 두 사람 앞을 누군가가 불쑥 막았다. 얼굴에는 기이한 문신을 새겼고, 맨살이 드러나는 몸에 짐승 가죽을 걸친 남녀. 북부 하이랜드의 야만인들이었다. 카라가 말했다.

“리쿠? 아피아?”

리쿠는 이미 술을 여러 잔 걸쳤는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회의. 끝났나?”

카라는 짧은 문답에 담긴 내용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결론은 안 났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장담할 수 없어.”

“그 말은··· 이 전쟁이 계속될 거란 얘기군요···”

아피아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두 사람은 벨로크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현재 베로니카의 아래에서 종군 중이었다. 하지만 생명체의 헛된 살상을 금하는 대지모신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아피아는 주술을 이용해 병자들을 치유했고, 리쿠는 한 번씩 베로니카의 경호를 맡았다. 그럼에도 게오르그의 암살자들을 몇 퇴치했기에 두 사람은 제 밥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카라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응. 이 땅의 배당이 모두에게 돌아갈 때까지. 아니면 누구 하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왕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전까지. 전쟁은 계속될 거야. 이걸 물어보려고 온 거야?”

아피아가 제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군영의 외곽을 가리켰다.

“그것도 있었고, 제 주술력도 돌아왔으니. 이제 슬슬 다친 사람들을 돌보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혹시 두 분도?”

“맞아. 부질 없이 꺼지는 것처럼 보여도. 생명은 하나 하나가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니까.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지.”

네 사람은 병자들이 모여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고통과 비명, 울부짖음, 피 냄새와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베로니카에 의해 강제로 징집된 치유술을 쓸 줄 아는 사제도 있었고, 돌팔이가 아닌 제대로 된 의술을 배운 의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명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저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위대하신 광명자여··· 당신의 은총을, 그 손길을 부디 이 미천한 종에게 내려주소서.”

수염이 성성하게 센 노인이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주변으로 강대한 성력이 휘몰아치며 그 광채를 뿌렸다. 배에 구멍이 뚫려 내장이 흘러나와 있던 병사의 얼굴이 활기를 되찾았다.

옆에 있던 판금 갑주를 입은 기사 또한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노인의 치유술보다는 미약했지만, 역시나 환자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열정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윽고 천막을 젖히고 들어온 아델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성녀님!”

“성녀시여! 부디 저희들의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신성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걷어주실 분은 당신뿐···”

“내 말하지 않았소? 나는 모시는 분이 따로 있소. 그분의 허락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단 말이오.”

“하오나···”

“반론은 받지 않겠소. 난 분명 떠나라고 말했고, 그분의 허락 없이는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말했소. 하지만 남은 것은 당신들이오.”

아델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환자들을 보살폈다. 신성 왕국에서 이름 높다는 성자와 그의 호위 기사. 저스틴은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아델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라미화 잎은 피를 맑게 해주죠. 그걸 물에 타서 좀 먹고, 잠 잘 자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세요. 그럼 금방 나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카라가 마지막으로 본 환자를 끝으로 치료가 끝났다. 아피아는 핼쑥하지만 뿌듯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고, 피투성이가 된 리쿠는 허리춤의 술을 마셨다.

성자와 저스틴이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할 때. 아델은 카라와 함께 재빨리 천막 밖으로 나갔다. 하늘을 보자 어느새 날이 져 있었다. 땅거미 진 어스름이 그녀의 얼굴을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병자들의 고통이, 주변 사람들의 환호가 아델의 마음속에 파란을 일으켰다. 고독했다. 지치는 기분이었다.

“벨로크 님···”

그녀는 남몰래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군영 내부를 걸었다. 얼큰하게 취한 병사들이 그런 아델을 보고 속삭였다.

“저 여자.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무슨 개소리야? 여전히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오게 생겼구먼.”

“그래? 내가 보기엔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인데.”

스스로가 눈치가 좋다고 생각하는 병사. 존슨이 말했다. 다른 병사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좀 취한 것 같군. 저 여자가 얼마나 무자비한 여인네인 줄 알잖아? 산 채로 사람을 불태우고, 채찍으로 상대측 기사들을 고문하고, 군기를 다스린단 명목으로 아랫사람들의 손발을 자르던 여자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말을 하고 나서 흠칫했는지. 병사가 목소리를 줄였다. 하지만 여전히 시뻘게진 얼굴의 존슨은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우리 그럼 내기할까?”

“무슨 내기?”

“태양의 성녀라고 불리우는 저 고귀한 여인네도 눈물을 흘릴까. 안 흘릴까? 난 흘린다에 은화 세 닢 걸지.”

“대체 그딴 의미 없는 짓을 왜···”

“쫄았냐?”

존슨의 말에 병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은화를 있는 대로 꺼냈다.

“난 안 운다에 가진 재산 전부를 걸지. 기한은 이번 전쟁이 끝날 때 까지다.”

“좋아. 그러면··· 어?”

말을 하던 존슨의 얼굴이 하늘로 향했다. 느닷없이 하늘이 반짝거렸고, 그 위에서 새카만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쿠웅. 곧이어 떨어진 무언가가 흙먼지를 나풀거렸다. 안으로 음영 네 개가 일렁거렸다.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막사는 난리가 났다.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병사들은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곧 그 흙먼지가 걷혔을 때. 병사들은 또 다른 의미로 놀랐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차가운 인상의 여인. 고양이처럼 솟아 올라간 눈매에 헬레나의 재림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기사. 아델이 한 사내의 품에 안겨 쉴 틈 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 벨로··· 벨로크··· 벨로크니이이이임! 흐어어엉···”

“늦어서 미안.”

벨로크는 울먹이는 아델을 끌어안은 채, 그녀를 토닥거렸다. 존슨은 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옆에 있던 병사를 툭 쳤다. 그리고는 그가 가진 은화를 갈취했다. 병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상은 미지와 신비로 가득 차 있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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