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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94화 (19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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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갑작스러운 명령이었다. 하지만 궁수들은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곧바로 시위를 당겼다. 투두두. 줄대가 튕겨지며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쏘아진 화살 비가 당황한 후작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퍽. 끄르르. 어떤 이는 눈, 어떤 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 숫자는 소수였다. 두 진영 사이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쓰러진 자들은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의 징집병들이었다. 존엄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인간의 목숨이 가축만도 못한 시대. 농민들을 고기 방패로 내세우는 것 역시 흔했다. 남부군의 진영 역시 그랬으니까.

“쏴-라!”

당황도 잠시. 맞은편에서도 화살을 쏘며 대항했다. 특히나 전열에 나와 있는 아델과 베로니카에게 그 공격들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옆에는 어느새. 붉은 로브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드리워진 음영 사이로 갈색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여리한 손이 허공을 휘젓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쏘아지던 화살들이 부르르 떨리더니, 휙 고개를 돌려 다시금 반대편으로 날아든 것이다. 후작군은 또다시 화살 세례를 맞았다. 그들 사이에서 동요가 치솟고, 지휘관들이 소속된 마법사들을 닦달할 때. 베로니카가 소리쳤다.

“진-격! 진격하라!”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남부군은 열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보병들은 사선 대형으로, 후방에 있던 기병들은 옆으로 빠져나와 정렬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델과 카라와 함께 전열에서 빠져나온 베로니카가 상대 진영을 살폈다.

그들은 흐트러졌던 전열을 어느새 정비한 상태였다. 독전관들이 징집병들의 등에 칼을 박아대고 악을 써댐으로써 만들어낸 결과였다.

덕택에 사기는 실시간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는 기사단장의 목이 바닥을 구름으로써 이미 일어나고 있던 현상이었다. 후작군은 좀 더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지금 밀리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걸.

“대응이 빠르구나. 병력 간의 숫자도 엇비슷하고. 이전처럼 쉽게는 안 될 것 같은데.”

뿌-우우우!

반대쪽에서도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결과적으로 후작군은 동요를 걷어내고, 남부군을 향해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기마대 역시 따로 빼내어 보병들의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쪽 역시 기병들을 따로 뺐습니다. 게다가 우리들보다 숫자가 더 많군요. 곧 들이닥칠 겁니다.”

아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은 평야 지대였다. 시야를 가릴 장애물도 없었고,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조차 튼튼했다. 기병들이 활약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를 막아내는 방법은 둘. 창을 든 보병들의 밀집대형으로 버티거나. 이쪽도 같이 기병들을 출동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담력과 뼈를 깎는 훈련이 없으면, 보병들은 기병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닥쳐드는 전투마의 흉성과 중무장한 기사의 창날을 보는 것만으로 다리의 힘이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훈련이 되어있다고 한들. 측면과 후방이 취약하다는 점 역시 명백했다.

이 말은 곧 겉으로 보기에는 위풍당당한 군세처럼 보이나. 실상 병력 대부분이 덩치 큰 농부, 제압한 영주들로부터 긁어모은 패잔병으로 구성된 남부군으로서는 자칫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수가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침착했다.

베로니카는 여전히 부대의 최후방에서 참모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카라는 보호막을 두르고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상대 마법사들의 주문을 봉쇄하거나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아델은 남부군의 기병대 쪽으로 가서 그들의 최선두에 섰다. 상대 기마병들이 출격한다면 이쪽 역시 마주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경. 정말 대단한 무용이십니다. 휴고는 리트린 지방 내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한 기사인데··· 이렇게도 쉽게···”

면갑을 올린 기사가 말했다. 아델을 바라보는 잘생긴 얼굴에는 존경, 흠모가 가득했다. 장창을 어깨에 걸친 아델은 그를 힐끔 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데비안. 베로니카 공을 보필하러 가는 게 낫지 않겠소? 이번 전투는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다르오, 까딱하면 죽을 거요.”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하십니까! 우리 측 기병 전력이 상대보다 열세잖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한 손 거들어야지요!”

“그렇다고 부관이 자리를 비우는 건···”

젊은 기사의 당찬 포부에 아델은 입을 도로 닫았다. 한 손이라도 더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곧 말을 달리는 그녀의 귓가로 쇠 부딪치는 소음과 누군가의 고함, 비명, 악다구니 등이 들려왔다.

“죽어라아!”

소리친 병사가 창을 뻗었다. 제 키만큼이나 길고 튼튼한 이 날붙이는 주인의 의지에 감연히 답했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전사의 가슴팍을 꿰뚫고, 입에서 피를 토해내게 만든 것이다.

창을 내지른 병사의 옆과 그 옆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차가운 날붙이가 으르렁거리며 살갗을 가르고, 뼈를 으깨버렸다. 내장이 흘러내린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희열에 찬 괴성을 질렀다.

“어, 엄마아···”

“흐하하하!”

맞부딪힌 양쪽 군대는 빠르게 뒤섞였다.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어떠한 격식도, 전략도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뿐이었다.

시체에 꽂힌 창대가 툭 부러졌다. 병사들은 창 대신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칼날을 들이밀었다. 서로 간에 발이 어지럽게 얽히고, 어깨가 부딪혔다. 그 사이로 번뜩이는 검광들이 쉴 틈 없이 오고 갔다.

채앵. 마침내 이 빠진 검이 상대의 목을 훑었다. 그는 끄르륵 소리를 내며 목을 부여잡다가 쓰러졌다. 칼을 휘두른 전사는 다른 목표물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이며 전사의 사고가 정지했다. 방패에 부딪힌 그의 머리는 망치에 가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함몰되어 있었다.

“크흐흐.”

거친 숨을 내뱉은 중장병이 쓰러진 병사의 머리를 툭 밟았다. 이윽고 건틀릿 낀 손으로 오른쪽 귀를 뜯어내 허리춤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이름은 아문. 대가리 분쇄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용병이었다.

남부군이 약속한 보수에 혹해 이쪽 진영에 합류한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두터운 네모꼴 방패가 휘둘러졌다. 거대한 추가 달린 쇠도리깨도 연신 춤을 췄다. 사방에서 피가 터져나가고, 내장과 뇌수가 흐를 때마다. 그의 주머니는 풍족해져만 갔다.

아문은 생각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번 것 같다. 이제 슬슬 뒤쪽으로 빠져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관음이나 할까? 아니면 이대로 쓰러져서 죽은 척을···

콰앙. 그의 중장 갑옷이 우그러졌다. 아문은 고개를 돌렸다. 웬 죽도 못 얻어먹은 홀쭉이 하나가 몽둥이로 자신을 후려치고 있었다. 농민병이었다. 열댓 살도 안 된 것 같은 코흘리개였다.

“좆도 아닌 새끼가··· 끅.”

철퇴를 들어 올린 그가 울컥 피를 쏟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추레한 몰골의 사내 여럿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 놈은 갑옷의 틈새에 단검을 찔러넣고 있었고, 다른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문이 주춤한 틈을 타. 갑옷 이음새에 연신 날붙이들을 찔렀다. 그렇게 베테랑 용병 아문은 창든 농부들에게 죽었다. 그리고 지금껏 모아온 재산들을 강탈당했다.

손에 피를 묻힌 농부들은 웃었다. 아니, 그들은 이제 농부가 아니었다. 피에 젖은 금화 맞을 알아버린 칼잡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음영이 졌다.

“더-러운 마녀의 쫄다구들! 죽어라! 죽어!”

거대한 도끼를 든 전사는 붉어진 눈으로 두툼한 손을 움직였다.

“자, 잠깐! 우리는 같은 후작군-컥!”

휘둘러진 쌍날 도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차가운 날붙이는 자비 없이 그들의 목을 수확했다. 죽어서까지 억울함을 담은 머리통들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전사는 킁 콧방귀를 끼고는 다시금 후작군이든 남부군이든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그리고 광전사 역시 곧 탐욕과 전공이 눈이 먼 병사들의 손에 의해 무참히 죽었다.

그런 일이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리트린 평야의 녹색 땅은 붉게 물들어만 갔다. 수초마다 수십 년 인생의 불꽃들이 부질없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전장의 한 편에서는 수백 마리의 기마들이 흙먼지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거창!”

아델의 외침에 기병들은 제 나름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통짜 쇠로 이루어진 세모꼴의 두툼한 랜스, 끝부분만 송곳처럼 날카로운 창, 벼락을 뿜어내는 칼날 등. 그 종류도 다양했으며, 통일성이라고는 없었다.

말 좀 탈 줄 아는 자들을 모아서 급조해낸 남부군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합지졸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의 기세는 진짜였다. 들고 있는 날붙이 또한 진짜였다. 찔리면 살점이 짓뭉개지고, 말발굽에 의해 골통마저 깨지리라.

아델은 강철로 된 면갑 사이. 줄줄이 가로막힌 시야로 상대 기병들을 살폈다. 그들 역시 무정한 살해자의 기색을 마구 뿜으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흔들리는 대지가 흡사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만 같다. 두 집단은 곧 맞부딪칠 것이며, 서로 간에 피를 뿌릴 것이었다.

주먹을 꾸욱 쥐며, 긴장을 끌어올리던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상대측 기병들의 몸에서 휘광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피자 그 속에 마법사 한 명이 끼어있었다. 몸이 근육질로 되어있고, 칼을 들고 있어서 영락없이 전사인 줄 알았다.

그 기이한 행색의 요술쟁이가 뒤바꾼 판도는 컸다. 놈이 신기한 주문을 사용하자 상대측의 속도가 배는 빨라졌기 때문이다. 말들이 게거품을 뿜으며, 눈을 벌겋게 물들였다. 게다가 덩치마저 커진 게 무슨 괴물이 된 것 같았다. 이대로 맞부딪치면 그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겨, 경! 무언가 이상합니다!”

“놈들 중에 마법사가 끼어있습니다! 놈이 이상한 사술을!”

이를 눈치챈 남부군 기병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두 집단 사이의 거리는 잠시 후. 맞부딪칠 정도로 가까웠고, 방향을 선회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델은 침착했다. 그녀는 내면의 성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이 머저리 새끼들이!”

그 순간. 그녀의 몸 주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델은 입술을 쉴 틈 없이 달싹이며 기도문을 외웠다. 그럴수록 불꽃은 그 열기를 키워나갔고, 이는 주변에 있는 기병들의 무기와 몸에 들러붙었다. 그녀가 왕의 장창을 하늘 높이 들었다.

“나를 오롯이 비추는 여신이시여! 나에게 적들의 야욕을 분쇄할 수 있는 용맹을! 저들의 피마저 불태울 수 있는 광명을! 그리고 승리를!”

소리치는 그녀 주위로 빛이 폭발했다. 남부군 기병대의 몸속에서는 강대한 힘이 용솟음쳤다. 여신의 축복이었다. 더 이상 그들의 눈에는 겁에 질린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장은 강맹하게 뛰었고, 입으로는 고함을 질렀다. 이에 호응하듯 남부군 기마대의 주변으로 불꽃으로 된 벽이 만들어졌다.

“무슨···!”

믿기지 않는 기행에 후작군 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미 들러붙은 가속도는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 강철의 파도와 불꽃의 벽이 충돌했다.

지글거리는 화염이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살점이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그것들은 곧 고온에 녹아내며 치이익 수증기를 피워올렸다.

“뒈져라!”

아델은 미친 듯이 장창을 휘둘렀다. 빛이 불티를 꼬리처럼 흩날리며 번뜩였고, 녹아내리다 만 기사의 목을 잘라냈다. 이윽고 왕의 장창은 다시금 곧게 뻗어 나가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렸다.

그러자 후작군 측의 전열이 붕괴되었다. 그들의 돌격은 힘을 잃었고, 남부군 측은 여력이 남아있었다. 불꽃의 벽은 범접할 수 없는 불의 파도가 되어 후작군을 휩쓸었다.

“끄아아아!”

살아남은 자들은 녹아내리는 갑옷을 벗으려 발버둥 쳤다. 우드득. 고통에 겨워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자비 없이 말발굽이 들이닥쳤다. 돌진을 멈춘 자들에게는 남부군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그 순간.

“벤시의 숨결이여!”

아까 전에 봤던 근육질 마법사가 다급히 주문을 외웠다. 그의 배가 남산처럼 부풀어 오르고, 입에서는 냉기의 숨결이 토해졌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는 아군들에게는 안식을, 흡사 여신의 광전사처럼 보이는 저 괴물들에게는 죽음을 내려주기 위한 주문이었다.

“끅.”

하지만 마법사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파양 무늬가 새겨진 날붙이가 기이한 각도로 날아들더니 그의 배를 꿰뚫어버린 것이다.

마법사는 눈가를 부르르 떨다가 각하··· 한 마디만 남기고는 축 쓰러졌다. 덕분에 냉기의 숨결은 잠깐만 쏘아지며 그나마 남아있던 후작군 기병대를 휩쓸었을 뿐이었다.

“남은 놈들은 신경 쓰지 마! 본대를 타격한다!”

한 손을 척 들어 올려 장창을 회수한 아델이 소리쳤다.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도 도도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태양의 여신이 이 땅에 헌신한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불꽃의 성녀였다.

마치 홀린 듯이 이를 바라보고 있던 기병들은 피와 살점이 묻은 창들을 휙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용맹히 소리치며 칼을 뽑아 들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기사단을 잃어버린 후작 측 군대는 도망쳤고, 남부군은 승리했다. 전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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