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93화 (193/222)

193

몰아치는

———!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한 번이 아니라. 총 두 번에 걸쳐서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그러자 여자를 껴안고 뒹굴던 놈, 면도하다 제 입술을 깎아버린 놈, 빵을 우물거리던 놈까지.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하던 행동을 멈췄다. 이윽고 그들은 각자의 무기와 갑옷을 입은 채, 막사를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위치로!”

“움직여라! 지금 당장!”

견장을 단 하사관들, 망토와 철갑투구를 뒤집어쓴 기사들이 병사들 사이를 누비며 호통쳤다. 원래부터 병사 출신이었거나, 칼밥 좀 먹은 녀석들은 빠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징집병들, 칼과 창 대신 괭이나 쟁기를 만지던 농부들은 어김없이 엉덩이를 걷어차이거나. 말채찍을 얻어맞았다. 오직 종군 상인들과 창부만이 그 잔혹한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쇠와 쇠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거친 숨소리 역시 섞여 들 때 쯤. 수천 명의 병사들은 리트린 평야로 집결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간단했다. 마찬가지로 반대편에서 진을 치고 있는 적 군대. 루텐버그 후작군을 무찌르고 진정한 남부의 통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북부, 서부, 동부가 찬탈자의 목을 따기 전에. 남부군이 그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오랜 권력의 상징이었던 중앙의 노른자위 땅들과 왕성, 왕관을 위해!

뭐, 이건 높으신 분들의 사정이었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왕국의 평화를 되찾는다는 대의명분과 번쩍이는 금화, 독전관들의 창칼이면 충분했다.

각 영지에서 차출되어온 병사, 돈 받고 싸우러 나온 용병, 자의로 혹은 타의로 끌려온 농부까지. 투구를 쓰고 창을 든 그들 모두는 열을 맞춰 정렬했다. 그리고 그들 앞으로 때가 탄 갑주를 챙겨 입고, 말을 탄 여인이 나섰다. 높게 묶은 푸른 머리칼과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남부의 아들딸들아!”

와아아아아!

항구도시 로벤의 영주이자 베이츠와 칸티오의 야욕을 분쇄한 여장부. 끝내는 왕국 남부의 대부분을 먹어 치우고, 그 아래 영주들마저 복속시킨 푸른 피의 지배자. 베로니카가 소리치자 우레와도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하나 되어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는 그대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우리들의 목표가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왕국을, 우리들의 고향을 좀 먹고 있는 해충 같은 존재들을 타도하고 비로서! 새로운 광명의 시대를 여는 것 말이다!”

와아아아아!

수천 명의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함에 땅이 울렸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말고삐를 쥔 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병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환호가 잦아들 때쯤. 그녀는 말 머리를 돌려 상대편의 진영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거라.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음에도 바꿀 필요를 못 느꼈기에 침묵하고 있는 저 돼지들을 보란 말이다! 저들이 왕국에 새로운 혼란을 야기한 그 미치광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잘못됨을 바로잡지 않고, 오히려 이를 이용해 제 뱃속만 채우려 드는 저 행태는, 어쩌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는 그 광인의 만행보다도 그 죄가 무겁다!”

저 멀리 루텐버그 후작군에서도 마침 환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베로니카와 그녀의 군대를 온갖 참신한 말로 모욕하고 있었다. 부모 욕은 기본에, 그녀를 악마에게 따먹힌 창녀, 그 명령을 듣는 자들을 마녀에게 현혹된 머저리들이라고 소리쳤다. 남부군은 분노했지만, 베로니카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후작군을 턱짓했다.

“과연 비겁자들의 군대로다! 하는 행동도 일말의 품위와 격식조차 없으렷다! 묻겠다! 위대한 남부의 전사들아! 저들이 두려운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더 묻겠다! 부모의 치마폭에 쌓인 아이처럼 입으로만 쫑알대고 있는 저 머저리들이 그대들은 정녕 두려운가!”

“두렵지! 않습니다!”

눈이 시뻘게진 병사들은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창대로는 방패를 요란하게 쳐댔다. 스르릉. 베로니카는 칼을 뽑아 들어서 후작군을 겨누었다.

“그렇다면 어서! 감연히 폭풍을 일으키자! 썩은 살들을 도려낼 변화의 바람을! 내 부모님과 아이들! 주변 사람들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지상낙원을 위해! 저 빌어먹을 비겁자들을 처단하자!”

와아아아아!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호가 울렸다. 베로니카는 말의 옆구리를 툭 차며, 천천히 나아갔다. 그녀의 옆으로 파양 무늬가 새겨진 장창을 들고, 십자가가 새겨진 갑주를 입은 사람이 따라붙었다. 갑옷의 굴곡으로 봐서 여인네였다.

역시나 그 옆으로 붉은 로브를 푹 뒤집어쓴 사람 역시 붙었다. 그런 세 사람의 뒤로, 앳된 얼굴의 젊은 기사, 얼굴에 문신을 새긴 야만인, 말을 탄 지휘자들, 마지막으로 병사들이 주르르 걸어갔다.

남부군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평야를 가로질렀다. 부츠 발 하나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그런 것이 수천 번 반복되었다. 그 압도적인 폭력에 잡초가 뭉개지고,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생물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인간들은 개의치 않았다. 다들 각자의 사명과 욕망, 앞으로 들이닥칠 미래에 대해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형태를 띠던 군대가 당도했다.

곧 서로 간에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가 되자 양쪽 군대는 이동을 멈췄다. 그리고 후작군 쪽이 갈라지더니 말을 탄 기사 두 명이 튀어나왔다. 한 명은 남들보다 체구가 더 크고, 거대한 대검을 매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날개를 펼치고 포효하고 있는 매가 그려진 깃발. 후작기를 들고 있는 기수였다.

“하!”

베로니카가 이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녀의 옆으로 장창을 든 여기사가 따라붙었다. 수 천의 병사들은 절그럭거리는 소음들을 냈으나. 다들 입을 꾸욱 다물고, 숨만 몰아쉬었기에 네 사람 간의 대화는 평원에 울려 퍼졌다.

“난 루텐버그 후작님의 기사. 휴고다. 네가 로벤의 영주 베로니카냐?”

대검을 맨 기사가 거칠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베로니카다. 로벤의 영주이자 지금은 통일전쟁을 이끄는 남부군의 지휘관이지.”

“그렇다면 묻겠다. 감히 후작님과 그 봉신들의 땅을 침범하고, 작센 자작을 목매단 이유가 뭐냐? 각하께서는 분명 이 소동과는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네게 전하셨지 않나.”

휴고의 으르렁거림에 베로니카는 피식 웃었다.

“너. 후작가의 기사라고 했나? 나를 바보 등신으로 아는 게냐?”

“뭐라?”

“네놈들이 게오르그 공작과 밀약을 맺고 우리들을 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게 무슨 개소리냐. 각하께서는 게오르그의 사절을 문전 박대했다. 그들에게도 너와 똑같은 뜻을 전했단 말이다!”

휴고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믿지 못한다는 눈초리였다. 정확히는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그녀가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못하겠느냐? 영주들 간의 다툼을 중재해야 할 중앙이 사실상 그 기능을 정지한 지금. 약조라는 것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등불 같은 것. 게다가 네 주인인 루텐버그는 신용 없는 남자다. 유약한 성정이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여우처럼 잔머리만 굴리는 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

“···이 빌어먹을 악마의 탕녀가아아아! 피에 굶주린 여백작이라더니! 그 탐욕과 필요 이상의 잔인함이 기어이 도를 넘는구나!”

제 주군이 모욕당하자 휴고의 눈이 돌아갔다. 옆에 있던 기수도 불같이 분노하며 깃발 달린 창대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두 여인은 침착했다. 베로니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턱짓했다.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하거라. 말로만 중립을 떠들어대지 말고, 마음을 확실히 정하라고. 물론 우리 남부군의 깃발 아래로 들어오려면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게다. 난 말로만 하는 약조는 못 믿거든. 그게 싫다면··· 너희들은 이 자리에서 다 죽을 것이야.”

“그 입 닥쳐라! 감히 나의 주인을 모욕한 죄! 이 남부에 새로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죄! 그리고 작센 자작을 살해한 죄! 네년은 차마 갱생 불가능한 희대의 악녀로구나! 이 휴고! 강철 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대검을 뽑아 든 휴고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뭐가 우습나? 내가 두려운가? 하긴 여자의 몸으로 용케 검을 들었다고는 하나 그 속에는 천박한 몸뚱아리 밖에 내세울 게 없겠지.”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우습지 않느냐? 군단을 이끄는 지휘관인 내가 왜 한낱 기사단장 따위하고 검을 섞어야 하지? 후작 본인이라면 또 모를까? 아. 네 주인은 지금쯤 성에 틀어박혀 여자들 가슴이나 주물럭거리고 있을 테니. 이는 성사될 수가 없겠군.”

“뭐, 뭣?”

“어찌 됐든 네놈들의 뜻은 잘 알았다.”

손으로 입가를 가린 베로니카는 휴고의 도발을 간단히 받아넘겼다. 이윽고 옆에 있는 여기사에게 말했다.

“경. 저 머저리의 목을 나한테 가져와 주시오. 저자의 머리통을 시작으로 루텐버그를 이 나라에서 지워버려야겠소.”

여기사는 휴고가 들고 있는 대검과 손에 쥔 파양 무늬의 장창을 번갈아서 주시하고 있었다. 투구를 쓰고 있건만, 어째선지 안에 담긴 아련한 눈빛이 바깥으로 쏘아져 나오는 듯했다.

“경?”

베로니카가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저은 여기사는 말을 몰아 휴고의 앞으로 나섰다. 여기사는 왼손으로는 말 고삐를 쥔 채,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트렸다. 거대한 장창이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처럼 이빨을 날름거렸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건지. 눈을 가늘게 뜬 휴고는 대검을 꾸욱 쥔 채, 그녀 주위를 빙빙 돌았다.

“당신이 바로 그 불꽃의 성녀로군. 듣자 하니 저년이 세운 전공의 대부분도 당신과 그 붉은 머리 마법사가 이루어 낸 거라던데. 이 나라의 교단원들은 교회와 뜻을 같이하는 것 아니었나? 어째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고 이런 미약한 조각배에 몸을 실었지?”

다그닥 거리는 말발굽 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사는 말의 옆구리를 툭 차는 것으로 답했다.

히히히힝. 울부짖은 말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두 쌍의 다리는 일정한 규칙을 그리며 흙먼지를 일으키다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 인마의 거리 역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흐읍.”

휴고는 두툼한 허벅지와 종아리 힘으로 말의 허리를 꽉 조였다. 그리고는 말고삐를 놓은 채, 양손으로 제 칼을 들어 올렸다. 까딱하다가는 타고 있는 말의 목을 대번에 쳐버릴 정도로 거대한 대검이었다.

이에 맞서는 여기사는 처음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말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숙인 채, 늘어뜨리듯 창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우오오오!”

전투의 흥분을 여과 없이 뿜어낸 휴고의 양손에 울그락 핏줄이 돋았다.

날붙이의 파괴력을 산출하는 법은 단순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게, 이를 휘두르는 자의 힘, 여기에 얼마만큼의 회전을 넣어 주느냐. 가속도를 주느냐가 변곡점이었다. 그리고 지금 휴고가 휘두르는 대검의 파괴력은 가히 맹공이라 부를 법도 했다.

말의 속도와 과하게 들어간 그의 힘, 장인이 빚은 명검의 예리함이 합쳐져 그 순간. 그의 검은 악마의 피륙도, 용의 비늘도 갈라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칼날이 거대한 호선을 그리며 여기사를 향해 들이닥쳤다. 칼날과 그녀의 투구 끝이 닿는 순간. 그녀의 가녀린 몸은 말과 함께 무참히 조각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울린 것은 파육음이 아니라. 불똥이 튀는 소리였다.

티잉.

그 찰나의 순간. 휴고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목 주변이 불처럼 달아오르고, 숨이 턱 막혔기 때문이다.

여기사와 휴고였던 것은 서로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를 낮추다가. 우뚝 정지한 여기사가 면갑을 철컥 들어 올렸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군. 다시는 그 비슷하게 생긴 칼을 손에 쥐지도 말라. 그건 그분에 대한 모욕이니까.”

한층 더 깊어진 검은 눈동자가 얼어붙어 있는 상대 진영을 주시했다. 아델은 벨로크가 남긴 장창을 휙 털어내고는, 다시금 면갑을 내렸다.

그녀의 뒤편으로 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머리 잃은 시체가 말 위에서 덜컹덜컹 춤추다가 털썩 쓰러졌다. 주인 잃은 말은 제 혼자 평원을 배회했다.

“컥.”

휴고를 따라나섰던 기수의 입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베로니카는 들고 있던 석궁을 안장에 꽂았다. 이윽고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화살을 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