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92화 (19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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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새하얀 면직물들이 조각처럼 흩어지고, 전사의 육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같은 근육과 툭 불거진 핏줄, 그 사이사이 새겨진 새하얀 흉터들. 악귀와 정신 나간 인간들과의 투쟁의 역사가 그의 몸에 올곧이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말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낄 흉악한 몸뚱이였다. 그리고 그런 육체를 한층 더 흉흉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흡!”

화린은 비명을 지르려다가 다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이자벨이 놀라서 다가왔다. 대체 왜 난리야? 벨로크는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역시 놀랐다. 본래라면 불의 거인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을 가슴 위로. 웬 얼굴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냥 문신 수준이 아니었다. 녀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오려고 발악했다. 그로테스크한 그 모습이 어디 b급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생체 같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기이한 것은 벨로크 스스로가 아무런 이상함도 못 느꼈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과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노르드는 기생체에 손대려는 이자벨을 제지한 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절대신의 낙인이다.”

“낙인?”

“그래, 녀석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증거. 어떻게든 나의 개입을 배제하고, 너를 집어삼키겠다는 의지의 표현.”

노르드는 한 손에 신성을 집중시켰다.

“그만큼 너란 존재가 녀석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다섯 옥좌의 파편이 다 모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할 만큼. 먹이가 무르익을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잡아먹을 생각인게지.”

노르드는 끌어모은 신성을 벨로크의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파아아앗. 빛이 번뜩였고, 꿈틀거리던 얼굴은 소리 없는 괴성을 지르며 차츰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벨로크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의 활동이 멈추자. 몸을 감싸던 끈적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된 느낌이었다.

“아까 전 아낙스를 처음 봤을 때.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던 것도?”

그는 아직도 가슴에 새겨져 있는 사내의 얼굴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매만졌다.

노르드는 벨로크의 가슴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지? 내가 강해진 만큼 놈도 강해졌다고. 녀석은 점점 더 네 몸을 침식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너의 육신과 영혼은 가랑비에 젖듯 놈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겠지.”

이자벨이 벨로크의 팔뚝을 잡으며 소리쳤다.

“당신이 이를 막아줄 수 있는 것 아니었나요? 절대신은 육신을 잃고, 그 힘 역시도 대악마들에게 빼앗긴 상태라면서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영혼만 남았다고는 하나. 단 셋밖에 없었다던 절대자들이잖아!”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제 애인이 껍데기만 남긴 채,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노르드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우리들은 분명히 강대한 생물체였다. 하지만 이미 실패한, 사냥당한 짐승일 뿐이지. 게다가··· 나는 노르드이되 노르드가 아니다. 그 파편일 뿐이다.”

“그게 무슨···”

“아무리 바다의 일족들이 수천 년에 걸쳐 의식을 치렀다고 해도. 한낱 미물이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는 없다. 찬탈자들이 만들어낸 봉인진은 그렇게 쉽게 깨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쉽게 말해. 나 역시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신성을 좀 다룰 줄 알고, 본체의 기억을 가진, 그래, 네 식대로 얘기하자면 클론이라는 표현이 걸맞겠군. 전혀 다른 존재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래서 간혹 본체. 라는 말을 꺼냈었나?

“···네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겠고, 나한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도 알겠다. 그렇다면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지?”

벨로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노르드는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콕 찔렀다.

“간단하다. 내가 녀석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 하루라도 더 빨리 너의 내면 속 세상으로 들어가 회색 도시에 도사리고 있을 그 괴물을,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망령을 죽이면 된다. 그리하면 너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네가 이 세상을 방랑하는 이유. 목표로 했던 ‘그것’ 역시 이룰 수 있겠지.”

이자벨과 화린을 슬쩍 본 노르드는 일부러 고향으로의 귀환이라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벨로크 역시 팔뚝으로 와닿는 온기와 부르르 떨고 있는 여인네의 숨결을 느끼며, 그것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면 속 세계로 들어가서 족친다고? 심상 세계의 싸움 뭐 이런 거냐? 전에 흑룡을 처리했을 때처럼?

“물론 세상사가 그렇듯. 답은 간단해도 그 과정은 지극히 어렵노라. 네가 절대신과의 격전을 치르는 그 순간에는 네가 가진 그 능력들. 태산도 부술법한 근력, 용의 벼락, 초월적인 재생력, 한 서린 마녀의 영혼, 지치지 않는 체력 등. 네가 누려왔던 그 모든 힘들이 너를 노리는 비수가 될 테니까.”

화린이 눈을 크게 떴다. 노르드의 말은 벨로크가 가진 전사로서의 역량, 그가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빼앗긴 채, 싸워야 한다는 말과 똑같았다. 참으로 부조리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닌, 너만의 능력을 쌓아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내 몸에 있는 시스템창이 녀석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걸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군. 잔뜩 이용만 당한 기분이야.”

엿 같은 새끼.

“그래, 끝까지 남의 것을 탐내기만 하는 찬탈자다운 방식이지. 그러니···”

“자, 잠깐만요. 대체 그 시스템창이라는 게 뭐에요? 벨로크가 한 번썩 중얼거리던 경험치? 그것과도 관련이 있는 건가요?”

이자벨은 여전히 벨로크의 팔짱을 낀 채,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화린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다. 옛날에는 이걸 어물쩍 넘겼었지. 하지만 이제는 숨길 수 없다. 동료들 모두 이 일에 깊게 관련되어 있으니까. 벨로크가 이걸 뭐라 설명하지 골머리를 썩이는데. 노르드는 간단하게 답했다.

“절대신의 권능 중 하나다. 상대를 죽이고, 그가 가졌던 능력과 경험 등을 고스란히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뒤바꾸는 것이지. 그리고 그걸 제 임의대로 수치화해서 몸속에 쌓아두는 것이란다. 놈은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더 강해졌고 마침내. 고대신들마저도 사냥할 수 있었지.”

“그런··· 그렇다면 힘을 뺏긴 벨로크씨가 놈을 상대로 이길 수는 있나요? 신성을 이용한다면···”

화린의 말에 노르드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신성은 강대한 힘이다. 하지만 확답은 할 수 없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절대신은 말 그대로 괴물이다. 그의 손에 의해 기간토마키아와 이시스, 본체 역시 운명을 달리했으니까. 게다가 회색 도시는 그의 영역이다. 개새끼 역시 제 영역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신이면 또 어떻겠느냐?”

막연하게만 닥쳐오던 위협이 점점 피부로 와닿자. 이자벨과 화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벨로크는 침묵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테냐? 너희들의 애인이 이대로 괴물이 되어 세상을 불태우게 놔둘 테야?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어떻게든 발버둥 쳐봐야지!”

조용히 말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격양된 노르드가 기대고 있던 난간을 걷어찼다. 배가 기우뚱 흔들리고, 조각난 나무 토막이 바닷물 속으로 풍덩 빠졌다. 차가운 물보라가 일행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덕분에 뜨거웠던 머리가 어느 정도 식은 것 같았다.

“그래, 발버둥 쳐봐야지. 그게 살아가는 거니까.”

벨로크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이자벨은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조심스레 뺨에 입맞춤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절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벨로크에게서 떨어진 이자벨은 주머니 속에 있는 마력석을 꾸욱 쥐었다.

“빚을 갚아야··· 그래야 나도...”

중얼거리던 화린 역시 눈동자를 가라앉힌 채,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세 사람을 둘러본 노르드는 드레스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어대며 말했다.

“이제 좀 보기 괜찮은 얼굴들이 되었군. 내가 겁을 주었기는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직 시간은 남아있고, 놈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에는 충분하지. 이번에 저 용을 살려두고 회유한 것 역시 이를 위함이야.”

당장에 원수를 죽여 마음속 응어리를 푸는 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미래를 그린다. 말은 쉽지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노르드는 그것을 해냈다. 그만큼 절대신이라는 녀석에게 맺힌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노르드가 아래를 손짓했다.

“지금쯤이면 녀석 또한 생각의 정리가 끝났을 것 같구나. 우리의 새로운 조력자를 만나러 가보자꾸나.”

#

아낙스는 손에 들린 과도로 제 팔뚝을 그었다. 뚝뚝. 보통의 피보다도 훨씬 붉은, 마치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진한 선혈이 금으로 만들어진 성반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아름다운 문양이 음각된 미사도구를 양손으로 살포시 쥐었다. 이윽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니. 둘 사이의 높고 낮음은 그 어디에도 없느니라. 너. 스스로를 광명자의 종이라 칭하는 자야. 스스로를 불살라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도 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에 목놓아 울부짖으며, 그분의 거룩한 손길을 거부하지 말지어다.”

그냥 달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저렇게 돌려서 해야 하나? 기도문이라는 것은 왜 항상 단어를 저렇게 꼬아서 만든단 말인가? 신앙심 없는 인간이 머리를 긁적이는 순간. 아낙스의 기도가 끝났다.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성반으로 스며들었다.

성반에 담긴 핏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윽고 그것의 색깔이 바뀌었는데. 마치 성수처럼 푸르고 투명한 물이 되어 있었다.

“셀레네의 성력과 용의 힘이 뒤섞인 것이다. 내가 네 애인의 도움을 받아 저 녀석의 심령을 제압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지. 마력이 조금이라도 흘러 들어간다면 축복의 효과는 크게 반감될 테니까.”

노르드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낙스는 이를 못들은 척.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손짓했다.

“이리로 오거라.”

벨로크가 다가갔다.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는지. 아낙스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숨도 거칠었다. 그녀는 성반위에 담긴 물을 검지로 툭 찍더니. 벨로크의 얼굴과 몸에 찍어 발랐다.

십자가도 그렸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글자 같은 것도 그렸다. 무슨 세례를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이한 의식이 지속될수록 벨로크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동방의 비전. 넨이라는 이름의 기공과는 또 달랐다.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두 가지의 기운이 상반되면서 그의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벨로크는 이것이 용과 여신의 힘임을 깨달았다.

“후우.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이걸 마시거라.”

땀을 훔친 아낙스가 성반을 내밀었다. 벨로크는 망설임 없이 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한쪽 눈이 파충류의 것으로 변하며 황금색으로 번뜩였다. 피부 위로는 비늘 같은 것이 돋아나기도 했다. 염병. 이건 또 뭐야.

“엘가르에게는 일할의 피를 내려주었었지. 하지만 너에게는 절반을 주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피에 담긴 독성 때문에 죽고 말테지만··· 역시 아무 문제가 없군. 적응도 순식간에 끝마쳤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벨로크는 바뀐 제 몸을 만지작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 요상한 기운.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뭔가 바뀐 것 같았다.

“너의 몸에는 이제 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인간··· 이라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군. 용인? 이라고 부르면 적절할까?”

아낙스는 초췌해진 안색으로 답했다. 시발. 내가 이제 인간도 아니라고?

“이런 말은 없었지 않나?”

순식간에 바뀐 정체성에 벨로크는 욕을 내뱉으며 노르드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진정하거라. 나 역시. 저 녀석이 이렇게 많은 피를 너에게 수혈할 줄은 몰랐다. 이건 용의로서의 정체성을 잃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거늘.”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아낙스는 웃었다. 저들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눈을 가리고 있던 나는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위대한 의지. 아니, 그 존재는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려 하고 있지. 지금으로서 이를 막을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 당신들이니.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하다. 나에게는 굳이 용의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쌓아 올린 주문들이 있으니까.”

아낙스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어째선지 후련해 보였다. 부채감을 덜어낸 듯한 모양새였다. 정확히는 벨로크에게 짐을 지우고 자신은 한발 물러선 것에 가까웠지만.

“벨로크씨가··· 용···?”

화린이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노르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정확히는 반쪽짜리도 못 되는 것이지만, 뭐, 이걸로 놈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하나 더 얻은 것이니. 좋은 일이 아니냐. 용은 예로부터 불사를 상징했었다. 그 체력과 힘은 거인들을 아득히 뛰어넘지. 거기다가 정력 역시 좋으니. 너의 애인들에게도 분명히··· 큭.”

벨로크가 노르드의 이마를 딱 쳤다. 한층 더 강해진 그의 근력이 새하얀 이마를 벌겋게 물들였다. 아으. 노르드가 이마를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일 때. 이자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반쪽짜리 인간과 반쪽짜리 악마라니. 생각해보니까 우리. 이제야 좀 공평해진 것 같지 않아요?”

“음. 그래 뭐.”

네가 좋다면야. 벨로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신성을 이용해 되돌리면 되겠지.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끝난 후. 다섯은 배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초록 머리의 여인이 주문을 시전했고, 그들의 모습은 빛에 휩싸여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오직 망가진 배만이 망망대해 위에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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