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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90화 (190/222)

190

오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기척이 이제서야 제대로 감지되었다. 아낙스는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를 끔뻑 감았다 떴다.

“외차원의 경계도 꿰뚫어보는 눈이라니. 전에 봤을 때 부터 느낀거긴 하지만... 정말이지 귀신같군. 하긴 고대신의 사자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가까이서 본 순간. 마음속에서 온갖 분노가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눈앞이 붉어졌고, 연신 거친 숨이 나왔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이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벨로크는 이것이 제 안에 있는 고대신과 절대신이 내비치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달의 여신의 사도라는 저 용은 원수였다. 자신을 봉인한, 자신을 배신한 원수의 동료이자 친구인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연신 떠올랐다. 내면 속이 아닌, 현실에서 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죽여라. 죽여라.]

[더러운 배신자의 개를 죽여라. 이 땅의 정당한 지배자가 돌아왔도다.]

“크으···”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올라가려는 손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리고 목걸이를 움켜쥔 채, 속삭였다. 뭔 개짓거리냐. 그러자 목걸이에서 푸른 빛이 번쩍였다.

파지지직

그의 몸 주변으로 스파크가 쳤다. 두 힘은 서로 간에 맞부딪히는 것 같더니. 쉴 틈 없이 떠오르던 시스템 창과 내면의 분노 또한 스르르 가라앉아 버렸다. 절대신은 노르드에 의해 물러났고, 노르드는 제 감정을 추스른 것이다.

“후우.”

벨로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저번에 봤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 녀석들이 갑자기 왜 난리일까? 잠깐의 생각을 거친 그는 곧 답을 찾아냈다. 혼돈의 존재를 죽임으로써 그는 막대한 양의 경험치와 신성을 쌓았다.

노르드는 자신에게 의지를 전달할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 비록 어느 때나 가능한 것은 아니고, 완벽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면 그 반대. 절대신 또한 마찬가지리라. 힘을 회복한 녀석이 제 몸을 차지하기 위해. 점점 마수를 뻗쳐오는 것이다. 저 용이 나타남으로써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했던 것이고.

벨로크는 펜던트를 힐끔 쳐다봤다. 목걸이가 안쓰럽게 떨렸다. 안에 담긴 감정이 절실히 스며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윽고 요정식 장검을 들어 보였다. 용은 혀를 차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군. 쇄도하는 재앙이 네 몸을 갉아 먹고 있구나.”

철컥. 쇳소리가 울리자. 아낙스가 손사래 쳤다.

“경계하지 마라. 전사야. 나는 그저 이야기를 하러 왔을 뿐이다. 이건 너를 위한, 그리고 이 대륙의 명운을 위한 이야기니까.”

“글쎄. 남의 배에 숨어들어서 엿보던 년이 할 말은 아닌데.”

그 험한 말에 아낙스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

“벨로크?”

배의 후미에 있던 이자벨과 화린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눈을 크게 떴다. 왕을 집어삼켰던 용, 스스로를 요정 왕국의 수호자라 밝혔던 존재가 배 위에 떡하니 타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당황한 것도 잠시. 두 사람 사이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이자벨은 냉큼 칼을 뽑았다. 화린 역시 주먹을 쥐고는 보폭을 벌렸다.

왕국의 수호자든, 여신의 용이든. 그의 적이라면 일단 상대하고 본다는 마인드였다. 그 맹목적인 추종에, 동료를 위한 마음에 용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말했다.

“대화를 하자. 나는 너희들이 정녕 이 대륙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혹여 그렇다고 한들. 그 정의로운 의지가 누군가에 의해 악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된다.”

“그러니까 왜? 네가 용이면, 달의 여신의 사도라면 우리가 꼭 네 말을 듣고, 존경을 표해야 되는 거냐?”

아낙스는 사내로부터 적의를 느꼈다. 고대신의 몰락을 야기한 것이 천상신들이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하지만 좀 이상했다.

처음과는 달리. 지금 저 사내가 내비치고 있는 적의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존재를 말살시킨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공간에 침입한 것에 대한 짜증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저들이 행한 행동들. 전쟁을 막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고. 실로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풍모들.

‘선인가 악인가? 아니면 그저 이용당하는 것 뿐인가.’

아낙스는 혼란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더 대화를 나눠야 했다. 가진 수 역시 쓰기로 했다.

“이걸 보거라.”

아낙스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의 눈앞에 어떠한 환상이 펼쳐졌다.

항구에 정박 되어 있던 배들이 줄줄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하얀 돌이 깔린 대로, 이끼가 낀 영주성 역시 화마에 휩싸여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도망치는 항구도시의 시민들, 이를 쫓아오는 기마대, 등 뒤에 칼이 꽂힌 아버지. 강간당하는 여인.

그 어지러운 혼란 속.

눈에 핏발이 선 수천 명의 병사들이 창을 앞세운 채, 달려들었다. 목표는 머리칼도 검고 눈도 검은 단발머리의 여기사였다. 그녀의 옆에는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도 있었고, 드레스 대신 갑주를 입은 푸른 머리칼의 아가씨 역시 있었다.

세 사람은 거칠게 저항했다. 흘러내린 내장과 피로 인해 질척거리는 땅을 누비며, 제 목숨을 앗아가려는 폭도들에게 용감히 맞섰다.

베로니카의 장검이 병사 하나의 골통을 쪼겠다. 아델이 휘두른 칼날이 웬 기사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두세 개의 검이 날아왔다. 이를 막아내자 이번에는 뒤편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 화살은 교묘하게도 아델의 갑옷 틈새를 비집었다.

-윽!

-아델!

카라가 한눈을 판 순간. 역시나 그녀에게도 끔찍한 재앙이 쇄도했다. 쏘아진 벼락과 냉기가 보호막을 깨부쉈고, 그 틈새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카라는 제 머리칼만큼이나 새빨간 선혈을 흘리며 선 채로 죽었다. 베로니카의 푸른 머리칼은 이미 힘없이 나풀거리며, 병사들의 발에 의해 짓밟히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이! 으아아아!

아델은 제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며 저항했다. 여신의 불꽃이 그녀를 감쌌고, 날아드는 화살과 창날을 녹여버렸다. 그녀는 반토막 난 검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도살했다. 그리고 기마대의 끝자락. 화려한 옷을 입고, 얼굴에는 화상을 입은 노인네를 향해 달려갔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기사의 돌격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용맹하든, 얼마나 신의 사랑을 받았든, 죽음은 자비 없이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게오르그는 팔을 들어 올렸다. 여기사의 가녀린 몸에는 창날과 도끼, 화살이 수도 없이 틀어박혔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울컥 피와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벨···로크···님.

단말마를 남긴 아델은 목이 잘린 후. 장대 위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불타오르며 환상이 사라졌다. 그 끔찍한 행태에 화린은 헙 숨을 참았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시죠? 아낙스님? 설명을 제대로 하셔야 될 거예요. 아니면 오늘 내 손으로 직접 왕국의 수호자를 죽이게 될 것 같으니까.”

이자벨은 눈은 차갑게 가라앉힌 채, 쌍검을 들어 올렸다. 평소 그녀의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과격한 말투였다.

벨로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배를 끌던 인어들이 놀라서 바닷속으로 숨어들었다. 정지한 배 주위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낙스는 얼굴에 튄 짠물을 스윽 닦으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난 너희들이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이 꽤나 끔찍했나 보군. 어찌 됐든 진정하거라. 방금 너희들이 보았던 그 현상들은 현재의 일이 아니다.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미래의 편린이지.”

“미래?”

“그래, 미래.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는 운명들. 이는 방금 전 너희들의 시선으로 인해. 바뀌었을 수도, 가속화 되었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 일어난 나비의 날갯짓이 저 먼 곳에서는 폭풍을 일으키듯이 말이다.”

그녀가 웃었다. 파충류의 눈동자가 거만하게 꿈틀거렸다.

“어떠냐. 대화를 좀 나눠볼 테냐? 나의 의문을 풀어준다면 내가 너희들한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 산 용이고, 경지를 이룬 마법사다. 너희들이 모르는 신비한 비전을 많이 알고 있지.”

이게 대화할 사람의 자세냐? 제 잘난 듯 웃으며, 남의 소중한 것들을 인질로 삼아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 너의 조언이 절대적인 척. 현자의 해답인 척. 그것을 강요하기?

벨로크는 냅다 달려들어 저 여자의 머리통을 박살 낼까 고민했다. 저년이 용이든 뭐든, 그의 주먹과 칼날은 가죽을 손쉽게 가르고, 그 속의 것을 게워내게 만들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 환상은 너무도 실감 났고, 너무도 끔찍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제자에 그 스승이었다.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한 여자만 빼고. 그의 기분에 호응하듯. 목에 걸린 고대신의 펜던트가 웅웅 거렸다.

#

쿰쿰한 냄새가 나는 선실에서 네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아낙스는 협박 비스무리한 제안을 던졌던 것과는 달리 눈동자를 살짝 깔았다.

“우선 내 멍청한 제자 놈의 과오를 바로 잡아 주어 감사를 표한다. 덕분에 수만 명 요정들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다. 너희들은 대악마 이상의 흉물을 사냥한 전설적인 전사들임과 동시에 일국을 구해낸 영웅들이다.”

세 사람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낙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끔찍한 비극이었다. 내가 동면에 빠진 틈을 타. 그 아이가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아무리 성력과 마력이 상극이라고는 하나. 두 가지 힘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빛은 어둠에 물들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다니··· 녀석은 제가 저지른 죗값을 받기 위해. 이 대륙을 평생토록 유랑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게 될 것이다.”

오래 산 용은 성력과 마력이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힘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 담긴 진실마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벨로크는 슬슬 짜증이 치솟았다.

“네가 늦잠을 자다 의무를 다하지 못했든, 그 귀쟁이를 어떻게 하든, 나하고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다. 할 말은 그게 끝이냐?”

“아니, 이건 간단한 인사치레였다. 따지고 보면 너희들은 이 사태에 휘말린 피해자들이고, 가해자는 내 아이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어떻게 훈계할지 말해주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다.”

거. 존나게 친절하시군. 아주 참된 스승이자 어머니야. 벨로크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아낙스는 헛기침을 하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젊은 기사야.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중에서 주된 것은 고대신에 관한 것이다. 네 몸에서 피어오르던 푸른 광채, 바다의 종족들에 대한 지배력의 행사로 보아. 너는 분명 수천 개의 머리를 가진 뱀. 노르드와 계약을 했겠지? 살아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어찌 됐든 이 세계에 남은 고대신은 그자뿐이니까.”

“그렇다.”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속에는 여신의 사자로써 이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며, 책임 등이 가득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고대신은 대악마들보다도 두려운, 모든 재앙의 근원이니까.

“그 존재가 너한테 무슨 부귀영화를 약속하고 계약을 종용했느냐? 봉인이 풀린 것인가? 너는 그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 것이냐?”

마치 취조 하는 듯한 분위기에 벨로크가 말했다.

“내가 말해준다면 믿을 수는 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너라는 인간의 됨됨이와는 별개로, 나는 그 끔찍한 존재들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의지와 힘은 너무나도 강대하여, 이를 받아들인 존재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칠 줄 모르기 때문이지. 그러니 확인을 거치려 한다. 내가 너의 기억을 살펴봐도 되겠느냐?”

미간을 찌푸린 이자벨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벨로크더러 주문을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그것도 수천 년 동안 살아왔던 고룡,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마도사의 마법을? 속에 뭐가 담겨있을 줄 알고!”

아낙스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새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얼굴은 실로 거룩해 보였다.

“아이야. 난 천상신들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땀 흘리는 존재다. 나를 못 믿는다면 지상의 그 어떤 존재들도 한낱 사기꾼에 지나지 않아.”

이자벨은 코웃음 쳤다. 그녀는 더 이상 저 용에 대한 어떠한 존경도 내비치지 않았다.

“당신 스스로가 그 말을 증명해내려고 했다면 이런 식으로 접근했으면 안 됐어요. 우리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배에 올랐어야 했고, 대가를 담보 삼아 대화의 물꼬를 틀기보다 먼저 선의를 보였어야죠. 그랬으면 벨로크는 기꺼이 당신의 의문점을 풀어주었을 거예요. 그는 그런 사내니까.”

그래도 주문은 꺼림칙한데? 벨로크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그래서, 그냥 칼집을 매만졌다. 그 행동이 아낙스에게는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건 내 불찰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너희들의 됨됨이 하나만을 믿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고대신은 나의 적이었고, 악마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갑자기 홱 돌아버려 나를 공격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말을 바꿀 수도 있었으니까. 너희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니. 우리에게는 서로 간에 믿음과 신뢰가 부족하단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구나.”

아낙스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린이 움찔 주먹을 쥐며 물었다.

“뭐하시는 거죠?”

“대화가 성립될 기미가 안 보이니 떠나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 애인의 두개골을 열어 그 속을 헤집고 비밀을 밝혀내고 싶다만, 그랬다가는 내가 죽을 테니. 일단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지.”

“그 말은 그냥 이대로 떠나시겠다는 건가요? 저희들이 방금 본 그 환상에 대한 해결책도 알려주지 않고?”

어깨를 으쓱인 아낙스가 웃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벨로크를 물 샐 틈 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한다면 바로 행동에 나서려는 듯했다.

“거래의 내용은 내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안 되었으니. 나도 조언이나 도움을 줄 필요가 없지.”

아낙스는 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낸 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 마음이 바뀐다면 그걸 사용하거라. 피 한 방울을 떨어트리면 연락이 통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그녀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그 속에는 연락을 안하고는 못 배길걸? 하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만큼 방금 전의 환상을 봤을 때. 세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것이다. 물론 속으로 찜찜함은 있었다.

가진 지식을 무기 삼아 저들을 협박하는 것이 정녕 옳은 것인가? 이것이 수호자로서, 저들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내보여야 할 올바른 행동인가? 고민하던 그녀는 곧 그것을 털어버렸다. 그녀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이 세상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양심의 가책을 덮어버렸다.

선택을 강요하는 그 혼란한 상황 속. 벨로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발. 방금 전에 봤던 것이 정말 미래의 한 장면일까? 아니면 저년이 무언가 수작질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만약 사실이라면? 카라가 화살받이가 되어 죽고, 베로니카는 목이 잘려 강간당하고, 아델 역시 시체마저 욕보이던 그 장면이 사실이라면? 내가 이를 견딜 수 있을까?

마법. 주문. 요술. 뭐라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힘. 같은 길을 걷는 자가 아니라면 필히 느낄 수밖에 없는 미지에 대한 공포.

이자벨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그사이에 낀 화린은 안절부절해 했고, 요술쟁이 용은 이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가급적이면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들이 봤었던 그 운명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 터이니.”

고뇌하던 벨로크가 입을 열려던 그 순간.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광채를 뿜어냈다. 선실이 빛으로 가득 차고,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코끝으로 와닿는 바닷냄새가 진해졌다. 어째선지 오한이 들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그 공간에는 한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마치 심연의 구렁텅이와도 같은, 푸르다기보다는 검은색에 가까운 머리칼. 이와 대비되듯. 온몸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드레스. 산호로 만들어진 세 갈래의 창까지.

모습을 드러낸 고대신은 삼지창으로 바닥을 쿵 찍었다. 이윽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 듣자 듣자 하니. 정말이지 어이가 없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잔대가리만 굴리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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