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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89화 (18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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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산

“금 쪼가리 몇 개 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것들이군요. 좋아요. 안내를 부탁드리죠.”

쪼그려 앉은 채, 금화 무더기를 만지작거리던 에밀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쪼가리?

친위대장은 그녀를 잠깐 보다가 벨로크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에밀과 같은 생각인 듯했다. 재물들을 쳐다보던 때 보다 눈동자가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따라오시오.”

일행은 금화의 산, 보석의 산, 그 모든 것들이 조화로이 합쳐진 장신구들의 산을 지나쳤다. 이윽고 문 앞에 도달했다. 경첩도 없었고 손잡이도 없는, 그냥 빗금만 그어진 이상한 문이었다. 일행이 이것이 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별 게 없었다. 그들이 이곳에 들어올 때도 이용한, 출입구와 똑같이 생긴 양식의 마법문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또 보겠네.

화린의 표정이 찝찝해졌다. 친위대장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일반적인 금속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시신경이 달랑거리는 적출된 안구였다. 보물고의 관리인이자 지난 사태 때 죽어버린 시종장의 신체 부위 이기도 했다.

“하루빨리 시종장부터 새로 뽑아 각인부터 다시 새겨야겠군. 아니, 그 전에 왕을 선출하는 것이 먼저인가? 허허. 대체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친위대장은 잠시 멈춰서서 눈알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그에서부터 오는 책임감에 대해 골머리를 썩히는 듯했다. 물론 이에 관심 없었던 벨로크는 그의 어깨를 툭툭치며 재촉했다.

“어흠.”

정신을 차린 그가 열쇠를 문에 가까이 댔다. 그러자 문에서 반투명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안구를 스쳐 지나갔다. 쿠르르르. 잠시 후. 돌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벽 안으로 몸을 숨겼다. 벨로크가 보기에 저건 홍채인식 잠금장치였다.

“생물과 무생물 간에 감응을 일으키는 주문을 이렇게 사용하다니. 다시 봐도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야.”

에밀이 감탄했다. 만약 저 여인네가 에스컬레이터나 비행기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또 그놈의 마법사적인 시각을 발휘하면서 현대인의 문물을 이해해보려고 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벨로크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감탄했다.

“오.”

그는 귀족이었다. 그리고 솜씨 좋은 기사였으며, 이 혼란한 대륙을 떠돌아다닌 사냥꾼이었다. 덕분에 금화를 볼 일도 많았고, 평생 가도 보기 힘들다는 주문 걸린 장비들을 볼 일도 많았다. 당장에 베로니카의 비밀창고에도 몇 개씩 쌓여있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버렸다.

룬 문자가 새겨진 검과 창, 활, 도끼, 단검과 쇠도리깨까지. 수십 종류의 무기들 수백 개가 기름먹인 나무가판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성력이라도 머금은 듯.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것도 있었고, 저주를 받은 듯 거무튀튀한 기운을 내뿜는 것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쇠붙이 특유의 날카로운 기운을 풍겨댔다.

벨로크는 시선을 돌렸다.

체인메일, 판금 갑주 같은 이 세계에 와서 자주 보던 물건들부터 시작해서 포탄 같은 실루엣을 가진 야만족 양식의 투구와 거울 달린 방패, 소찰을 엮어서 만든 동양식 갑옷까지. 그로서도 처음 보는 요상한 것들이 가득했다.

“이게 다 주문 걸린 장비들이라구요···? 하, 하하··· 말도 안 돼.”

뒤따라온 화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것들이 뿜어내는 신비로 인해 눈이 아팠다. 무슨 무지개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육체보다도 마음의 동요가 더 컸다.

강철의 사원은 무와 예를 숭상하는 집단이었다. 꽤나 고리타분했고, 사치와는 거리가 먼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 역시 검소와 절제가 몸에 배어있었다. 대륙을 여행할 때도 딱딱하게 굳은 빵과 건더기 없는 수프를 주식으로 삼았었으니까. 저번의 이자벨과의 사건도 그렇고, 그녀는 점점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흐음.”

허리춤의 쌍검을 매만지던 이자벨 역시 이를 흥미롭게 보다가. 무구들이 진열된 곳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아있는 것처럼 눈동자를 꿈틀거리는 초상화, 이빨이 달린 항아리, 날개 달린 책 같은 기괴한 골동품들이 그곳에 쌓여있었다. 에밀이 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무구보다는 저쪽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야말로 수 백 년 역사의 증거품들이군요. 무슨 박물관을 보는 것 같아.”

“이것들의 감별은 여러분 스스로가 하셔야 할 거요. 여기 있는 물건들의 유래와 쓰임새에 대해 알고 있던 유일한 요정인 시종장이 죽었으니까. 충고드리자면 가급적 꺼림칙해 보이는 물건에는 손대지 마시오. 저주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으아!”

그 말에 새카만 건틀릿과 부츠를 유심히 보던 화린이 깜짝 놀라며 물러났다. 친위대장은 마치 손녀를 보듯. 화린을 보며 미소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주문 걸린 장비들은 인당 두 개씩 소유권을 이전해드리겠소. 그리고 가급적 한 시간 이내에 감별을 끝내고 골라주시기를 바라오. 지금 우리들이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니까.”

에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요. 대장. 우리가 쌓은 공이 있는데. 그건 좀 너무한 처사 아닌가요? 여기 있는 것들만 해도 수 백 개가 넘어가요. 우리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가 멸망했을 거라고요.”

친위대장은 수긍하면서도.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항변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으나. 말했다시피 이건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일이 아니오. 말하자면 월권행위. 내 마음대로 여러분들을 들인 것이오. 그러니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것들은 두 개뿐이오. 나중에 이 혼란이 수습되고 여러분들이 이 나라에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귀빈으로 방문한다면 또 몰라도.”

“융통성이 있는 것 같다가도 없네요. 그러지 말고··· 윽.”

“욕심 그만 부려라. 엉덩이에 털 난다.”

벨로크가 알랑거리는 에밀의 이마를 딱 쳤다. 에밀은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만지며 씩씩거렸다.

“수, 숙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그리고 욕심이라뇨. 난 그저 당신들을 위해서···”

“저쪽이 우리의 사정을 이해해주었으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해줘야지. 그리고 에밀. 너는 앞으로 차고 넘칠 정도로 가질 텐데?”

벨로크는 에밀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 안에 담긴 경고에 에밀은 하하. 웃다가 골동품들을 쌓아둔 곳으로 뽈뽈 달려갔다. 저게 차기 요정왕이라고? 고개를 저은 벨로크가 유물들을 살폈다.

저번의 전투로 인해서 베로니카가 챙겨준 십자검과 아룡의 갑주가 못 쓸 정도로 폐품이 되었다. 이참에 검과 갑옷을 하나 새로 맞추는 게 좋겠지. 주변에서도 이미 물건들을 고르고 있는지. 콰르릉이니,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진열되어 있는 검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뽑힌 장검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일었다. 벼락의 힘이 담긴 마법검이었다. 음.

벨로크는 그 후로도 진열되어 있던 무기들을 살폈다. 불꽃이나 얼음, 폭풍 같은 바람을 뿜어내는 속성검이나 느닷없이 칼날의 길이가 늘어나는 검, 쥐자마자 피와 영혼을 바치라는 마검까지. 별의별 무기들이 다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그의 마음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수준의 검사라면 이 괴이한 무기들을 가지고 몇 단계의 진보를 이루어내겠지만, 그는 맨손으로도 그냥 철검으로도 전설 속의 괴물들과 악마를 찢어발기는 초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잡스러운 능력이 붙은 무구가 아니라. 그의 힘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날붙이였다. 그냥 갑옷부터 고를까?

[고민이 많은 것 같구나. 내가 도움을 좀 주랴?]

그 순간. 벨로크의 귓가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미성, 하지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노인네 같은 말투. 그가 인어 형상의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박혀있는 청금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노르드?”

[그렇게 애타게 부르지 않아도 된단다. 그냥 속으로 생각만 해도 돼. 후후. 네가 보는 세상이 이런 곳이었구나. 많이도 바뀌었군. 그리고 아름다워졌어.]

청금석 목걸이가 웅웅거렸다. 그녀와 연결되어있는 벨로크는 노르드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움, 환희 등이 케케묵은 옛신에게서 느껴졌다. 벨로크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너의 내면세계가 아닌, 실체화된 공간에서 말을 걸 수 있게 됐냐고? 간단하다. 너의 격이 더 올라갔기 때문이고, 그만큼 강력한 양의 신성이 나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 비록 너의 시선과 감각을 느낄 뿐이지만.]

혼돈의 존재를 죽인 것 때문인가?

[대화를 나눌 시간은 앞으로도 차고 넘친다. 지금은 눈앞의 일들에 집중하자꾸나. 이 중에서 두 개의 보물을 골라야 된다고 했지? 잠깐만 기다려보거라. 고대신의 안목을 보여줄 터이니.]

거만하게 웃은 노르드가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이것이 정녕 왕의 창고더냐? 무척이나 실망스럽군. 요정들의 수준이 이렇게도 낮았던가?]

벨로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장에 이곳에 있는 것들은 온 나라의 영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려들 정도의 보물들이었다. 수 백 년 세월을 살아가는 귀쟁이들의 정수였으니까. 하지만 그 귀물들도 고대신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음. 성검과 마검도 몇 자루 보이건만, 너한테는 쓸모가 없다. 왜냐면 넌 신의 성력보다도 훨씬 더 고등하고도 강력한 힘. 신성을 다루는 사내니까. 그냥 갑옷이나 한 벌 고르자꾸나. 그리고··· 그래, 저게 좋겠군. 그나마 저 물약이 이 창고 안에 있는 것들 중 제일 귀한 것이야.]

벨로크는 우선 노르드의 인도에 따라 웬 갑옷 한 벌을 골랐다. 새하얀 바탕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판금 갑주였다. 역시나 주문이 새겨져 있는 듯 물결무늬가 음각되어 있고, 다른 것들보다는 얇아 보였다.

[미스릴로 만든 것이다. 가볍고 튼튼하지. 무엇보다도 저기 걸려있는 주문이 내 눈길을 끌었다. 편의성 부문에서는 백 점을 주고 싶구나.]

손을 대어보거라. 깜짝 놀랄걸? 노르드의 말에 벨로크는 갑주에 손을 댔다. 그러자 진열되어 있는 갑옷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그의 몸에 들러붙었다. 몸에 맞춰서 크기조차도 늘어났다.

“이건 또 뭐야···”

벨로크는 갑옷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껏 그가 입었었던 그 어느 갑주보다도 가볍고 편안했다. 또한 내부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주인의 의지와 그의 신체구조에 따라 갑주 스스로가 질량과 무게를 조절하는 것이다. 관절부 하나하나마다 주문을 새겼구나. 네 식대로 말하자면 형상기억합금과 비슷하군.]

“움직이는 갑옷이라니. 신기한 걸 골랐네요? 저주받은 건 아니죠?”

이자벨이 다가왔다. 그녀의 등에는 거대한 묵빛의 활이 매여있었고, 벨트에는 처음 보는 단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파양 무늬가 새겨진 단검은 몰라도, 활은 사특한 기운을 여과 없이 뿜어냈다. 그리고 중간에 박혀있는 눈동자 모양의 보석이 사뭇 기괴했다. 저주받은 장비는 네가 고른 것 같은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이자벨 너는 벌써 다 고른 건가?”

이자벨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중에 보여줄게요. 이거 엄청 신기해.”

[마룡의 뿔을 깎아 만든 마궁과 공간이동 주문이 걸린 단검이라. 네 여자친구는 물건 보는 안목이 제법 괜찮구나.]

이자벨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것인지. 손에 들린 단검을 집었다 던졌다 했다. 그 순간. 화린 또한 철컥 쇳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녀는 거무튀튀한 금속 건틀릿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색상의 부츠를 신고 있었다. 건틀릿의 손목 부분에는 작은 홈이 있었고, 부츠 끝에는 작은 날개가 달려있었다.

“화린은 그것들로 할려구요?”

미소 지은 이자벨이 화린의 어깨를 쓸었다. 이자벨의 손길이 닿자 그녀는 돌처럼 굳었다. 하지만 곧 벨로크의 눈치를 보며 애써 웃어 보였다.

“네, 네. 하하. 무슨 주문이 걸린 건지는 모르겠는데. 격투가용 장비처럼 보이는 게 이것뿐이라서요. 게다가 튼튼해 보이기도 하구···”

벨로크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굳이 비유하자면 뱀과 토끼처럼 보였다. 그는 잠깐 이에 관해서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었고, 두 사람 사이의 일이었다. 그가 끼어들어서 통제하는 것은 정도를 벗어난 개입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귓가로는 노르드의 설명이 들려왔다.

[흑철로 만들어진 물건이구나. 건틀릿에는 암기가 숨겨져 있고, 부츠에는 ‘도약’주문이 새겨져 있군. 나쁘지 않다. 제 육체를 단련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무술가가 너무 장비에 기대서야 좋은 꼴을 보기는 힘들 터이니.]

이자벨은 화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장난치다가 고개를 돌렸다.

“벨로크? 그래서 남은 한 가지는 뭘로 고를 거예요? 조금 있으면 우리 나가야 해요.”

“걱정 마. 골라놨으니까.”

벨로크는 노르드의 인도를 따라 온갖 골동품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막 에밀이 황금색깔 표지의 책을 선반에서 꺼내고 있었다.

“응? 이곳에는 뭐 하러 왔어요? 여기는 칼잡이가 탐낼 만한 것은 없는데?”

벨로크는 쫑알대는 에밀을 무시하고, 선반의 구석. 먼지가 가뜩 쌓여있던 물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찾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면, 절대 찾아낼 수 없었을 위치에 있었다. 이게 그거라고?

유리병의 표면에는 덩굴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안에는 꺼림칙해 보이는 보라색 액체가 가득 담겨있었다. 에밀은 벨로크의 손에 들린 물약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봐요. 인간. 당신이 무슨 연금술사예요? 마법사야? 칼잡이면 그냥 칼이나 골라요. 괜히 이상한 거 손댔다가 후회하지 말구요. 딱 봐도 그거 독약처럼 보이는데.”

에밀의 비웃음에 이자벨과 화린 또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에밀 말을 듣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도 마법사예요.”

“맞아요. 단 두 개만 고를 수 있다구요. 벨로크씨.”

그들의 걱정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병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윽고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조심히 감쌌다. 마치, 깨질까 봐 염려된다는 모양새였다. 그가 말했다.

“엘릭서.”

“네?”

“이거 엘릭서라고.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영약.”

“뭐, 뭣?”

눈이 휘둥그레진 에밀을 보며 벨로크는 웃었다. 역시나 저 여자는 돌팔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한 것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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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잘 챙겨 먹고,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이 최우선이야. 알겠지?”

이자벨은 이든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응, 응. 누나. 누나도 몸조심해.”

이든은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는 동시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벨로크를 바라보며 입 모양만 움직였다.

-우리 누나 울리면 죽여버린다.

그 치기 어림에 가족을 생각하는 남동생의 마음에. 벨로크는 그만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졌다는 듯 양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입가 한편에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남매간의 해후가 끝나고, 몰아치는 폭풍 부족의 마을 사람들. 친위대장, 벨로크 덕분에 살아난 요정들 전부가 악수를 청해왔다.

“구해줘서 고마웠어. 인간! 아니, 벨로크! 그리고 화린!”

“요정왕국은 당신들의 정의로움과 굳센 의지, 그 선량했던 마음을 기억할 것이오!”

“이봐요! 나중에 나한테 이상한 일 시키기만 해봐요! 우리들간에 맺었었던 거래는 이걸로 끝난 거예요!”

마지막으로 에밀이 시원섭섭하다는 얼굴로 벨로크의 팔뚝을 쳤다. 벨로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던 이기적인 요정. 그렇기에 더 인간적이었던 그녀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글쎄다. 생각 좀 해보고.”

“뭐요?! 그런 말이 어딨어요?! 또 날 얼마나 부려 먹을 생각이야!”

에밀은 짜증을 냈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벨로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뒤돌았다. 이윽고 훌쩍 몸을 날려 갑판 위로 착지했다. 돛이 펼쳐졌다. 인어들이 다시금 범선을 끌었다. 정오의 태양은 따스했고, 배는 북쪽을 향하여, 그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자벨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가족과 이웃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화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점점 멀어져가는 고향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죽은 스승과 동기들, 그들과 함께했었던 그 모든 추억들이 별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을 잠시 쳐다보던 벨로크는 발걸음을 옮겨 배의 선수상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와라.”

그러자 공간이 지지직 일그러졌다. 이윽고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 웬 여인네 하나가 갑판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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