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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88화 (18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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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산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일순 로브 쓴 자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니었다. 이제는 어떠한 초월적인 무언가라 할 수 있는 그의 감각들. 신비로운 주문이나 숨겨진 비전과도 같은 그의 오감이 저 괴인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그는 볼 수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나 요정의 것이라 할 수 없을 강도의 근육과 살, 내장과 뼈. 그 모든 신체 장기들이 저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압축되어 있었고, 그 모습을 뒤틀어서 필멸자의 것으로 의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괴인의 고개가 돌아갔고, 전사와 괴인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전사는 호기심을 괴인 역시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를 빛냈다.

“용이라고? 미친년! 정체를 밝혀라!”

다음 순간. 호통친 친위대장이 칼을 뽑아 들었다. 경비대가 달려왔고, 엘가르가 눈을 크게 떴을 때.

“설마··· 당신은?”

여인은 땅을 박차며 하늘로 뛰어올랐다. 이윽고 양팔을 펼치며 마치 춤을 추듯 허공에서 유영했는데. 잠시 후. 그녀의 신형이 뒤틀리며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초록색 비늘, 넓게 펼쳐진 피막 날개, 집 한 채는 거뜬히 집어삼킬 것 같은 주둥이와 그 사이의 날카로운 이빨. 초승달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 뿔까지.

스스로를 용이라 밝힌, 이제는 진짜 용의 모습이 된 존재가 입을 열었다.

“반갑다. 그분의 아이들과 그 후손들아. 나는 아낙스. 이 땅의 수호자이며, 세계수의 지킴이. 셀레네의 친우이자 뿔 달린 것들의 대적자다.”

“미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주변에 있던 요정들은 그 말에 심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용이라니. 미친 상황이 맞았으니까.

덤덤한 표정의 벨로크는 저 여자가 아니, 저 용이 일부러 지금, 이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서로를 죽이네 살리네 하던 수만 명의 요정들이 행동을 멈춘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었으니까. 더 큰 혼란이 소요를 잠재운 것이다.

용은 피막 날개를 펄럭거리며 엘가르와 두 수호기사들이 묶여있는 성벽 위를 부유했다. 엘가르가 뭐라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날갯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 않았다.

벨로크는 원한다면 그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의는 둘째치고,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저걸 잡으면 얼마나 많은 신성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국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정도를 벗어난 존재에 대한 면역이 있는 자. 그러면서도 요정 왕국의 역사와 속사정에 대해서 아는 자. 이자벨이 앞으로 나와서 입을 열었다.

“아낙스? 당신이 바로 왕의 스승이자 격을 쌓아 승천했다고 알려져 있던 전설상의 대마도사 아낙스 입니까? 그 정체가 실은 용이라고?”

용은 찢어진 눈길로 엘가르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자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라진 파충류의 눈에 측은함이 서렸다.

“그렇다. 아스타로트의 마력을 이은 아이야. 내 이름은 분명 아낙스이며, 그 정체는 셀레네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용이다. 왕국의 정세가 불안정했을 무렵. 요정으로 의태하여 그 혼란을 잠재우고자 노력한 적이 있었지.”

용은 이자벨과 무릎 꿇고 있는 엘가르, 사라진 세계수가 있는 자리. 그리고 수만 명의 시민들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불찰로 인해. 멍청한 제자 놈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이들이 너무도 많구나. 여신을 볼 낯이 없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스스로를 요정 왕국의 수호자라 칭하고 있는 저 용은 지금 깊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긴 주둥아리에 송곳 같은 이빨이 달린 존재가 그런 표정을 지어봤자. 두려움을 야기할 뿐이었다.

이 왕국에 수호자가 있었다는 것. 그 정체가 실은 용이라는 것. 이를 알고 있던 요정들은 이미 오래전에 다 죽었으니까. 설령 이를 알고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극소수였다. 나중에 가서는 케케묵은 전설에 대해서 긴가민가했었으니까.

겨우 추슬렀던 혼란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려는 찰나. 용의 선택은 단순했다.

크르르르

그녀는 뭐라 입을 열어 여기 있는 요정들을 설득하거나, 이 혼란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다. 그저 주둥이를 크게 벌려 엘가르와 두 수호기사를 성벽 채로 집어삼켰다. 이윽고 날개를 휙 펼치더니. 본래 세계수가 있던 자리.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몸을 날렸다.

“맙소사···”

용이 날아간 자리에서는 거센 바람만이 불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폭풍에 주변에 있던 친위대장과 집행인들은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제가 방금 뭘 본 거죠? 그, 그러니까 용이. 엘가르를 잡아먹은 건가요? 그리고 도망친 거죠?”

당황하는 화린을 향해 벨로크가 말했다.

“글쎄. 잡아먹었다기보다는 집어삼킨 것 같던데.”

화린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아니, 둘은 큰 차이가 있지. 저 용의 입은 무척이나 크고, 안에는 빈 공간들이 많을 테니까.”

화린은 눈을 크게 떴다. 벨로크의 의미심장한 말과 저 용이 내뱉었던 말을 종합하자.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지금 저 용이 왕과 수호기사들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저랬다는 건가요?”

“어디까지나 짐작이오.”

“아마 벨로크의 짐작이 맞을 거예요. 그녀는 왕이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엘가르의 정식적인 지주이자 어머니. 스승이니까. 게다가··· 저길 봐요.”

이자벨의 말에 에밀이 고개를 돌렸다. 세계수가 있던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던 용이 다시금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달빛 아래를 부유하고 있는 그 존재의 모습은 실로 두려웠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놀란 에밀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저, 저게 뭐야!”

일행이 고개를 돌렸다. 세계수가 있던 텅 빈 구덩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무리는 곧 하나로 모여 어떠한 형태를 이뤘고, 하늘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구름에 닿을 정도로 뻗어나간 가지. 푸르른 줄기와 잎사귀. 생명의 기운을 잔뜩 뿜어내는 녹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아가레스에 의해 타락했던 세계수가 부활한 것이다.

“맙소사··· 진짜 여신의 용이었어. 그분의 사도였다고···”

남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마법사가 성호를 그었다. 그건 주변에 있던 요정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앙심 깊은 자들은 하나같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 어지러운 상황 속. 이방인일 뿐인 벨로크는 용이 사라진 하늘과 부활한 세계수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결과적으로 신목은 부활했고, 왕은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용에 의해 납치된, 혹은 잡아먹힌 셈이 되었다. 이는 현왕을 지지하던 사람들, 현왕을 증오하던 사람들의 분노를 맥없이 풀어버렸다.

워낙 충격적인 등장이기도 했고, 저 용은 여신의 대리자였으니. 타락한 왕을 징벌한 셈이었다. 명분도 충분했다.

역시나 나이는 괜히 처먹은 게 아니다. 라고 벨로크는 생각했다.

덕분에 자칫하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왕당파와 반왕당파간의 내전. 왕국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그것도 그냥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구구절절이 시민들을 설득하지 않은 것도, 아까 전. 회의장에 숨어 들은 것도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였겠군. 때론 말 몇 마디 보다 행동으로 나서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으니까. 뭐, 나하고는 이제 상관없지.

어찌 됐든 벨로크는 웃었다. 이곳에서의 소란이 일단락되었다는 얘기는 그들의 귀환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거친 입담을 자랑하는 성기사와 잘난체하는 마녀. 바닷가 도시의 지배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무사하겠지?

“돌아가 볼까?”

벨로크는 또 한고비 넘겼다는 듯. 조금이나마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이자벨은 으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화린은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붙었다.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 순간. 에밀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요! 인간! 가긴 어딜 간다는 거예요!”

“뭔 소리냐?”

벨로크가 어리둥절해하자. 에밀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주변 보고 들으라는 듯 큰소리쳤다.

“당신들은 이 나라를 구해준 영웅들이에요! 이 고생을 했는데. 아무것도 안 받아 갈 생각이에요? 그건 우리 요정들을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만드는 일임과 동시에. 이 왕국의 권위와 신용을 떨어트리는 행위에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내가 용납 못해요!”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뭘 잘 못 먹었나? 세 사람은 다 그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벨로크는 에밀의 시선이 친위대장을 힐끔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처럼 친위대장은 눈치가 있는 요정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엉덩이를 털며 다가왔다.

“벌써 떠나시는 겁니까?”

“그렇소. 갈 길이 바쁘거든.”

“이 상황이 수습되는 대로 축제와 연회, 무도회를 열려고 했건만··· 아쉽군요. 그렇다고 영웅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친위대장은 계속해서 벨로크 일행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는 에밀을 바라봤다. (그 속에는 그녀의 공덕 역시 끼어있었다.) 이윽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그들만 들을 수 있게 은밀히 속삭였다.

“그렇다면 저와 함께 왕궁 보물고로 가시죠. 제 권한으로 몇 가지 귀물 정도는 챙겨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밀은 미소 지었고, 벨로크는 이 년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뺏겼으면 다시 채워 넣어야 된 다 이거지? 너답다.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이쪽 세상이든 저쪽 세상이든, 금은 금이었다. 그 번쩍이는 동전이 주는 가치는 항상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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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쌓여있는 금화 사이로 영롱한 색깔의 보석들이 틈틈이 박혀있었다. 사람 머리통만 한 루비, 흠 하나 없는 흑진주에서부터. 자수정과 시트린이 박힌 왕관과 이마 부분의 홈에 세 개의 가넷이 박힌 황금가면, 보석을 깎아서 만든 체스판까지.

벨로크도 처음 보는 양식의 보물과 귀금속 등이 이 공간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빛들로 인해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미친. 이 정도면 금으로 목욕하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겠는데? 그 녀석 존나 부자였잖아? 어지간한 재물에는 면역이 되어있는 벨로크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왕의 보물고는 호화로움의 극치를 자랑했다.

“우와아··· 이게 다 얼마야?”

무자비한 재물의 향연에 화린 역시 입을 헤 벌렸다. 그녀는 혹시나 보물들을 건드리거나 밟아서 흠이라도 생길까. 조심조심 걸었다. 여전히 소시민적인 풍모를 버리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걷던 이자벨은 손가락을 뻗어 보석과 금화들을 세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대충 세어봐도 번듯한 성 수십 채는 지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나라에 돈이 이렇게 많았나?”

친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라 잘은 모르지만, 들어오는 것은 많고, 나가는 것은 없으니. 이렇게 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오.”

어떤 물건이든 요정이 썼다고, 요정이 만들었다고 하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들의 이쁘장한 얼굴과 목소리. 신비로운 분위기가 인간들의 탐욕을 자극하는 것이다. 실상은 별것 없는데도 말이다.

요정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물건을 수입하는 상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이를 알면서도 그것들을 사고판다. 귀족들과 부호의 허영심을 채우고 돈만 벌면 그만이니까. 거기다가 대륙에 나가 있던 요정들이 벌어들이고 본국으로 들고 오는 금화까지 합친다면 그 금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벨로크가 전쟁을 막지 못했더라면, 필히 인간들의 나라 중 몇 개는 지도상에서 지워졌으리라.

“이 황금들이 다 군자금으로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지.”

친위대장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그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말했다.

“어떻게 들고 가실 수 있을 만큼 이 재물들을 챙겨가시겠소? 아니면 다른 것들을 좀 보시겠소?”

“다, 다른 것들이라뇨? 이것 말고 또 뭐가 더 있나요?”

화들짝 놀란 화린의 물음에 친위대장은 금으로 된 산 너머. 작게 나 있는 문을 가리켰다.

“있다마다. 이 나라가 생긴 후. 수 백 년 동안 모아온 진귀한 장비들. 유적에서 발굴한 골동품, 장인의 역작, 대부호의 괴상한 수집품, 저주받은 마검까지. 속된 말로 주문 걸린 장비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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