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책임
“무슨 짓이라니. 그건 내가 해야 될 말이오. 왕궁을 수호하고, 왕을 수호해야 할 친위대장이란 작자는 제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고 있고, 한 마을의 장로라는 자는 공인되지 않은 약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으니. 정말이지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구려.”
자리에 있던 요정들은 입을 헤 벌렸다. 케프네스의 적나라한 말투와 만용에 가까운 용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케프네스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지금의 상황이 무언가 변곡점을 만들어 내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었으니까.
“카스탈리아스가 자식 교육을 아주 제대로 시켰군. 이 나라에서 신분제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애송아. 지금 네 행동이 오히려 더 폐하를 욕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왕께서 직접 죄를 시인하셨고, 여신께서 이를 보증하셨다. 되도 않는 음모론은 집어치워.”
“당신이 저놈들과 결탁해 왕께 협잡질을 일삼았을지 누가 알겠소?”
케프네스가 벨로크 일행을 가리켰다. 이윽고 못 미덥다는 얼굴로 친위대장을 바라봤다.
“게다가 신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 뜻이 실로 방대하며 불분명하기 이를 바가 없지. 약간의 말장난만으로도 그분의 뜻을 크게 왜곡할 수 있소.”
“···너는 지금 나를 모욕하고 있구나. 수백 년 동안 이 나라와 왕가를 위해 충성 해온 나의 명예를 짓밟고 있어.”
이를 으득 깨문 친위대장이 소리쳤다.
“뭣들 하나! 어서 이 무뢰배를 끌어내!”
기사들이 그를 붙들었다. 케프네스는 코웃음 쳤다.
“감당할 수 있겠소?”
“뭐라?”
“나를 이렇게 쫓아내면 앞으로 일어난 파란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오. 예를 들자면 당장에 들고 일어날 수천 명의 수도 방위군과 지금 이 자리에서 딴마음을 품을 유력자들을 꼽을 수 있겠구려.”
씩씩거리던 친위대장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그것은 더 이상 철없는 후배를 훈계하던 선배의 시선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을 채운 것은 제 핏줄과 가문을 등에 업고 권력을 얻은 저 애송이, 지인의 아들이든 뭐든 왕국의 기강을 흔들고 있는 이 반란 분자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가 친위대원들만 알아볼 수 있게 은밀히 손짓했다. 체포한 후 처리하란 뜻이었다. 이를 알아본 엘가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케프네스.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나의 경솔함으로 인해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폐하! 아무 말씀 마소서! 제가 반드시 폐하의 무고함을 증명해 보이겠나이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엘가르는 미간을 찌푸렸고, 친위대장은 다시 손짓하려 했다. 그때. 케프네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벨로크를 향해서였다. 요정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좋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나하고 생각하는 게 비슷하네?
“친위대장. 내가 당신의 주장을 못 믿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 의심을 사는 것은 저 인간에 대한 것이오. 신목을 흡수한, 왕과 수호기사들께서도 어쩌지 못한 대악마를 저 새파랗게 젊은 놈 혼자서 무찔렀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벨로크는 졸지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가 되었다. 모여있는 장로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린과 이자벨이 인상을 찌푸렸고, 에밀이 속삭였다.
“봐요. 내 말이 맞죠? 그의 발언은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그런 것 같군. 하지만 나 같았어도 저렇게 생각 했을 거다.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이대로 맡겨둘 생각?”
에밀이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벨로크가 무엇을 할지 예상이 간다는 듯 보였다.
“저 친구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마찬가지로 피식 웃은 벨로크가 에밀을 지나쳐 좀 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케프네스와 눈을 마주쳤다. 젊은 요정의 눈은 의심이 한가득 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호승심 역시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전사의 눈이었다. 그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칼춤 한 번 춰보자 이거지?
“경···”
친위대장은 면목 없다는 얼굴이었다. 벨로크는 그를 향해 척 손을 내밀었다.
“칼 좀 빌려주시오.”
“여기 있습니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허리춤의 칼집을 풀어 건넸다. 역시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한 듯했다. 벨로크는 요정식 장검을 한 손에 쥐었다. 무게 중심도 적절했고, 날도 잘 서 있었다.
“내가 못 미덥다고 했나?”
“구석에 꽁꽁 숨어있다가 이제서야 나오셨군. 그래, 찰나의 순간만을 살아가는 버러지야. 나는 네놈의 실력과 인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여기 모여있는 요정들 대부분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지.”
삐딱하게 선 벨로크는 피식 웃고 있는 케프네스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 도발적인 언행 또한 그대로 돌려주었다.
“너희 귀쟁이 새끼들이 사람 말을 못알아 처먹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 섬에 와서 질리도록 느꼈거든. 어떻게 해주면 믿을 테냐?”
케프네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꼭 벨로크의 말뿐만 아니라. 얼굴을 굳힌 엘가르, 고개를 젓고 있는 카타리나와 요하네스 등. 주변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젊은 기사는 끓어오르는 치기를 담아 소리쳤다.
“예로부터 신께서는 옳은 자에게 승리를 내려주셨다. 너 오만한 인간아. 네가 정말로 이 전설적인 무용담의 주인이고, 네 말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칼을 들어라! 결투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무식한 칼잡이가 꺼낼 법한 말은 그것 뿐이지.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명분을 만들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땅의 권력자들은 푹신한 의자와 책상을 치우며, 뒤로 물러났다. 재판장에는 한순간에 널따란 원형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이윽고 모두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그 공간에서 두 명의 전사가 마주 섰다.
“에이츠 가문의 적자이자 아틸란타 수도 방위군의 총책임자 케프네스. 국왕 폐하의 무고를 위하여, 그분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벨로크 하이네.”
“수렵과 달의 여신께서 이 결투를 지켜보실 것이다.”
거놈 참. 말 존나 많네. 벨로크는 여전히 삐딱하게 선 채, 한 손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반면에 케프네스는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검을 든 채, 그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케프네스라면 그래도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전사가 아닌가?”
“상대측도 만만치 않아. 설렁설렁 서 있을 뿐인데. 빈틈이 없어.
그들의 뒤편에 선 권력자들은 진중한 눈으로 상황을 살피거나,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윽고 관객들의 성화를 등에 입은 케프네스가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그는 주변의 정세를 읽는 것. 제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있어서는 얼치기였지만, 몸놀림은 그렇지 않았다. 갑주를 입고 있음에도 호흡을 흐트러 트리지 않았다. 또한 재빨랐다.
쿠우웅
한 발 크게 내디딘 그가 왼손을 움직였다. 사자 문양이 새겨진 강철로 된 벽이 전진해왔다. 상대의 공간을 선점하고, 검을 휘두를 틈을 안 주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방패가 워낙 컸던지라 벨로크의 시야는 가려졌고, 자신의 무기는 감춰졌다. 오직 작게 솟아오른 칼끝만이 뱀의 독니처럼 이빨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벨로크는 기사의 굳건함에, 제 자신의 힘과 기술에 대한 자신감에 정면으로 맞부딪쳐줄까 고민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저 얼치기 놈이 나중에 딴소리를 할 것 같았다. 보여주기식으로도 부적합할 것 같았다. 그래서 벨로크는 상대의 방벽으로 오히려 파고 들어갔다. 이윽고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탱.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한발 늦게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케프네스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눈을 크게 떴다. 몸의 감각으로 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뜻은 저 얄팍한 검으로 제 두꺼운 갑주를 베어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재빨리, 방패와 칼날 두 개를 다 피하고서.
“말도 안 돼···”
근력, 기술, 대범함과 냉정함까지. 요정 검사는 그 잠깐의 공방만으로도 상대의 재능과 노력, 셀 수 없을 만큼의 사선을 넘어온 경험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달인이라는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전율적인 검이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손에 들린 방패를 바닥에 던졌다. 이윽고 양손으로 검을 쥐고는 다시 한번 벨로크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양손으로 힘을 주었으니. 자연스레 검에 담긴 힘은 더 커졌다. 그러나 결과는 아까와 똑같았다. 벨로크는 굳건한 요새처럼 그를 맞이했고, 케프네스는 물줄기도 비틀지 못하는 송사리였다.
챙. 손아귀가 찢어지며 주인 잃은 검이 하늘을 날았다. 벨로크는 장난이라도 치듯. 손을 휘휘 휘저었다. 그럼에도 새하얀 궤적이 번뜩였고, 케프네스의 판금 갑주는 종잇장처럼 찢어져 버렸다.
“커억···”
케프네스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온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커 보였다. 벌어진 입과 멍한 동공이 이를 증명했다. 회의장은 순간 조용해졌다가. 곧이어 요란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친위대장이 상황을 중재했다.
“여신님과 여기 있는 사람들의 참관 아래. 두 사람의 신성한 결투가 마무리되었음을 선포한다. 에이츠의 케프네스. 패배를 인정하는가?”
케프네스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인정하오. 이 결투는 나의 패배요.”
“그렇다면 네가 좀 전에 뱉었던 그 모든 말들. 그것들이 터무니없는 비약과 음모라는 것 역시 인정하는가?”
그는 잠깐 고개를 돌렸다. 엘가르와 두 수호기사가 있는 방향이었다. 케프네스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마치, 벨로크가 악인이 된 듯한 모양새였다.
“폐하! 이 불충하고도 나약한 신하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케프네스는 세 사람에게 절을 하고는 친위대장의 말에 수긍했다.
“기사의 명예와 주군의 명예를 걸고 여신께 맹세를 드렸으니. 이 말을 어찌 번복할 수 있을까? 다만 나의 무력함이 진실마저 숨길 수는··· 컥.”
짜악. 고개가 휙 돌아간 케프네스가 쓰러졌다. 잘생긴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고, 이빨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의 뺨을 후려친 벨로크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말이 많다.”
친위대장은 후련하다는 얼굴로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기절한 케프네스를 끌고 갔다. 이윽고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보셨소이까?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신위를 가지신 분이 이분이오. 이분 덕택에 우리 왕궁은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단 말이오.”
대부분의 요정들이 수긍했다. 검술에 경지가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전사들은 호승심을, 마법사들과 정령사, 학자 출신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벨로크의 행동이 불을 지핀 것이다. 게다가 이 중에서 몇 명이 또 앞으로 뛰쳐나오려고 했다. 제 나름대로 벨로크의 실력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그만.”
광대 노릇은 여기까지였다. 벨로크는 내면의 신성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쿠르르르
회의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렸다. 공기 역시 달라졌다. 폐로 들어오는 숨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나가는 숨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숨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허어억···”
뛰쳐나오려던 요정들이 미끄러졌다. 뒤편에 있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마을의 우두머리, 도시의 칙령관, 에밀, 친위대장과 엘가르, 두 수호기사들까지.
화린과 이자벨을 제외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아니, 한 명 더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초록 머리의 요정. 정확히는 본 모습을 숨기고 있는 존재. 아낙스.
그녀만은 눈을 크게 뜬 채, 벨로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봐?
벨로크는 여인을 한 번 노려봐주고는 내뿜던 기세를 갈무리했다. 막힌 숨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어디서나 힘깨나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두려운 눈으로 벨로크를 올려다보았다. 그 기묘한 침묵 속에서 벨로크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구경들은 잘했소? 그렇다면 이제 서로 간에 할 일들을 하지. 난 바쁜 사람이오.”
#
불과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대악마의 목이 효수되어 있던 성벽 위.
임시로 세워진 단상 위에 차가운 인상의 미남자가 무릎 꿇고 있었다. 그를 지칭하는 칭호들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죄인 엘가르라는 이름 하나뿐이었다.
“하여 두 친위기사. 카타리나와 요하네스에게는 잊혀진 탑으로의 유배를 명한다. 두 사람은 앞으로 이백 년간. 떠오르는 태양 빛을 보지 못할 것이며, 부드러운 밀빵 대신 딱딱하고 곰팡이 핀 빵을 먹게 될 것이다. 또한 어둠 속에서 제 스스로의 죄를 반성하며 늘 곱씹게 될 것이다. 다음! 엘가르 마이넬리온!”
포고문을 든 친위대장이 크게 소리쳤다. 그의 음성은 주문을 통해 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성벽 아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서른여덟 마을의 요정들, 수도 아틸란타의 시민들. 수만 명 요정들의 귓속에 똑똑히 박혀 들고 있었다.
“···그렇게 대악마를 물리친 공덕은 높이 사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맹신과 오만 때문에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재앙을 이 나라로 불러들였다.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여신의 산물인 세계수의 타락, 이로 인해서 퍼져나간 역병, 그리고 이를 인간들의 짓이라 퍼트린 거짓된 선동까지. 아무리 그가 현왕이로서거니. 수백 년 동안. 이 나라를 무탈하게 다스려온 고귀한 핏줄이라도 해도 그 죄가 너무나도 무겁다. 이에···”
마지막 단락만을 앞두고 그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친위대장은 눈을 감았다.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바삐 달린 것은 자신이건만, 막상 결과를 마주하자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다. 그래도 수백 년 동안 모셔 온 주군이었다. 그가 망설일 때.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무엇 하는가. 어서 형을 선고하라. 나의 책임이며, 나의 업보다. 받아들이겠다.”
무릎 꿇고 있음에도 왕은 왕이었다. 여전히 자기자신을 하늘 아래 최고라 생각하며, 냉정하게 거만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지금 자신을 비난하며, 힐 뜯고 있는 저 시민들의 광기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친위대장은 한참을 망설였지만, 끝내 포고문을 꾸욱 구기며 소리쳤다.
“···이에 엘가르 마이넬리온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폐하! 다 내가 부덕한 탓이오! 차라리 나를!”
“폐하! 폐하!”
묶여있던 카타리나와 요하네스가 울부짖었다. 시민들 중에서도 엘가르를 믿고 따르던 이들이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수만 명의 파도가 이리저리 부딪치고 있었고, 곧 그 혼란은 이 수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 같았다.
이때 나선 것이 각 마을의 장로들과 도시의 유력자들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설득을, 때로는 강압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복을 입고, 제 키보다도 더 큰 장창을 든 병사 두 명이 엘가르에게도 다가왔다. 사형 집행인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요. 저 사람만은 영원히 저 자리에 앉아있을 줄 알았는데···”
이자벨이 가라앉은 눈으로 엘가르를 바라봤다. 결국 이 모든 혼란이 일어나게 된 건 그들로 인해서였으니. 마음이 뒤숭숭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추락한 옛 상사를 바라보는 마음이거나.
“엘가르가 죽는다고 해도 이 혼란이 끝날까요?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 같은데.”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화린이 말했다.
“그건 앞으로 저들의 손에 달렸겠지요. 우리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
이자벨이 화린을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화린은 얼굴을 굳혔다. 그저 제 가슴과 음부를 가리면서 벨로크에게 들러붙었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뭔 일이 있었나? 벨로크는 화린의 등을 툭툭 쳐주다가 말했다.
“어찌 됐든 이로인해 오해는 풀렸고, 전쟁은 막았다. 우리들은 이제 갈 길 가면 돼.”
“드디어 돌아가네요. 아델, 카라. 다들 보고 싶어요.”
이자벨이 미소 지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화린은 다시금 멀리 떨어졌고, 이자벨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벨로크에게 손짓했다. 사람 죽는 것 보지 말고, 그냥 나가자는 뜻이었다. 이쯤 됐으면 나타날 때가 됐는데? 죽게 내버려 둘 속셈인가? 벨로크는 걸어가면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형을 집행하라!”
친위대장이 소리쳤고, 집행인들이 창날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엘가르와 집행인들 사이에 웬 로브를 쓴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벨로크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그는 이 감각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후드 속 여인의 얼굴 또한 익숙했다.
“누구냐!”
친위대장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로브 쓴 괴한은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난 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