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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주름 하나 없는 맨발이 수정궁의 이곳저곳을 누볐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뼈가 시릴 법도 하건만. 발의 주인은 개의치 않은 듯했다. 그저 거침없이 늘씬한 다리를 연신 움직였다.
뚝뚝. 여인의 발걸음에 따라 흐르는 물기가 그 흔적을 남겼다. 몸을 감싸고 있는 가운이 말라갈 때 쯤. 여인은 자신이 찾고 있던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
크림색의 벽면에 금박으로 이리저리 문양을 새겨놓은 사치스러운 회랑. 그 드넓은 공간 속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붉은 벨벳이 깔린 회랑의 끝자락. 여러 개의 계단 위를 향하고 있었다. 텅 빈 옥좌가 그 자리에 있었고, 옆에는 주인 잃은 왕관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뭐 하고 있었어요? 한참 찾았잖아.”
이자벨은 슬며시 그에게로 다가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는 평소처럼 갑옷이 아닌, 가죽바지에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기에 몸의 단단함과 굴곡이 더 잘 느껴졌다.
게다가 방금 씻고 온 것인지. 몸에서는 땀 냄새 대신 상쾌한 향기가 가득했다. 여기에 특유의 체취가 뒤섞이자. 이자벨은 그의 등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복부가 욱신거렸다.
“벨로크?”
“그냥··· 구경을 좀 하고 있었다. 주인 없는 왕좌라는 건 보기 드무니까.”
이자벨은 여전히 그를 끌어안은 채,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앞을 살폈다. 떨어지는 달빛 아래. 보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왕좌가 외로이 서 있었다. 이는 주변의 어둠과 맞물려 눈앞의 광경을 보다 처연하게,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괜히 달의 마력에 취한다는 옛말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흐음···”
그 모습을 보던 이자벨은 바지 아래로 손을 넣어 그의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움찔. 벨로크가 놀랐다. 이 여자가 점점···? 이자벨은 이를 모르는 척.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벨로크. 왕이 되고 싶어요?”
“···왕?”
“네, 뚫어져라 쳐다보길래.”
이곳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그냥 산책 겸 돌아다니다가 찾았을 뿐이다. 왕좌를 살핀 것은 저걸 뜯어다가 팔면 얼마나 나올까 하는 속물적인 생각도 있었고, 저것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에밀이 그렇게까지 집착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회색 도시의 소시민 출신에게는 왕이라는 단어가, 그 위치가 정말이지 아득하게 느껴졌으니까.
뭐라 말하지? 그가 고민할 때. 이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이자벨이 입을 열었다.
“코흘리개 어린애부터 시작해서 삶에 찌든 농부, 그리고 귀족까지.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누구나가 한 번쯤은 왕이 되는 것을 꿈꾸죠. 하늘 아래 누구보다도 위대한, 모든 이의 꼭대기에 선 존재가 되는 거니까.”
이자벨은 그의 성난 물건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이윽고 살살 달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진중한 말투와는 다르게 실로 경박한 행동거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꿈은 꿀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는 극소수죠. 그것이 더없이 찬란하고 높은 곳에 있다면 더더욱 그렇죠. 그야말로 악마적인 재능과 천운을 가진 사람만이 이를 쟁취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벨로크의 바지춤에서 슬쩍 손을 뗐다. 아니, 아예 벗겨버렸다. 이윽고 자신 역시 입고 있던 가운을 휙 벗어 던졌다.
정무가 이루어지는,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그 신성한 공간에서, 나체의 두 남녀가 서로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실로 외설적이며, 배덕한 광경이었다.
머리에 뿔이 달린 여인은 사내의 뺨을 매만졌다. 그는 고뇌하고 있었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이를 증명했다. 이자벨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내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요. 무얼 망설이는 거예요? 당신은 원하기만 한다면 다 가질 수 있어요. 남의 것을 빼앗은 것에 불과하면서 스스로를 존귀자라 부르는 비열한 늙은이, 제 친구들 셋이 사냥당했음에도 별 반응을 내보이지 않는 두 머저리, 마지막으로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린 잊혀진 신 따위. 당신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잖아요?”
이자벨은 그에게 입맞춤했다. 자연스럽게 양손은 목을 감쌌고, 허벅지는 허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그녀는 벨로크에게 몸을 겹쳤다.
“으음...”
이자벨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열락과 신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나, 아델, 카라, 화린과 베로니카. 그 밖에도 당신이 쌓아온 인연들, 그들 모두가 당신을 도울 거예요. 당신이란 사람이 좋아서, 진정 원해서 돕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 끝은 같아요. 당신은 해낼 거고, 우리들은 해낼 거예요. 그리고 다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거야.”
“···”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는 여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는 아직도 이자벨과 첫날밤을 치렀을 때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말.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 이방인이자 현대인, 영원히 이곳 사람이 되지 못할 것 같은 고독감.
그래, 옛날 같았다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에게, 그리고 이곳에서 쌓아온 인연들에게 죄책감을 가졌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경계가 흐릿해졌고, 그렇기에 그는 안도하는 동시에 슬퍼졌다. 이제는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돌아가고 싶은 건지,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건지.
목적을 잃고 방황하게 된 사내는 더 열정적으로, 더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싸주는 이 온기를 느끼고자 했다.
#
왕성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 보안이 철저하면서도 격식에 맞는 화려한 회의장에서는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실로 충격적입니다! 어찌 이런···”
“왕께서 그런 부정을 저지르실 리가 없지 않소!”
“그렇다면 그 음성은 무엇이죠? 못 들은 사람이 없는데. 게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세계수와 느닷없이 나타난 악마들, 아틸란타 시민들의 증언이 이를 증명해요!”
“허허. 어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사술에 두 눈과 귀가 멀어버린단 말인가? 왕께 했던 충성맹세는 어디로 가고?”
“나는 처음부터 그자를 왕으로 받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생떼를 부리고 있는 것은 하겐다. 당신이에요. 이처럼 생생한 증거가 눈앞에 있거늘. 기어이 두 눈과 귀를 닫는군요.”
“뭐라? 꼬맹이가 많이 컸···”
“말조심하세요. 당신과 나는 이제 같은 장로의 신분이니까.”
왕을 지지하는 자. 싫어하는 자. 이 틈에 끼어 한몫 잡으려는 자. 스스로가 왕이 되고자 하는 자. 사태의 진상을 살피기 위해 온 사람까지. 하나같이 잘 차려입은 요정들 수십 명이. 동그란 회의장 안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고, 들은 소문을 종합하며 머리를 맞대었다. 또 다른 몇몇은 자기들끼리만 조용히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어수선한 상황은 친위대장과 왕실 기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끝을 맺었다. 친위대장의 손에는 포승줄이 들려있었고, 엘가르와 두 수호기사들이 이에 묶여 있었다.
죄인들은 고초를 겪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라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저 카타리나와 요하네스는 고개를 숙였고, 엘가르는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요정들은 깜짝 놀랐다. 무엇이든지 듣기만 하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나라에서 제일 고귀한 태생을 자랑하는 그가!
수 백 년 간 이 땅을 무탈하게 다스려온, 승천자 아낙스의 제자이자. 경지를 알 수 없는 대마도사가 저런 취급을 받다니?!
그 소란이 가시기 전. 요정들은 또다시 웅성거렸다. 그 뒤를 이어 나타난 벨로크 일행 때문이었다. 물론 사전에 들은 내용이 있었기에 그 혼란은 좀 덜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하나. 충격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껏 들은 소문들이 점점 진실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까.
“모두 모이신 것 같군요.”
친위대장은 서른여덟 마을의 장로들과 도시의 유력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한마디에 수많은 반론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노련한 친위대장은 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이 모든 소란을 침묵시켰다. 중간중간 서 있는 기사들의 눈빛과 칼집에 얹은 손이 이에 도움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먼저 여러분들께서 느끼고 계실 혼란. 의문, 다 이해합니다. 어젯밤에 있었던 그 불미스러운 사건은 왕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참극이자 괴기스러운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친위대장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먼저 들으십시오. 모든 것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제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이 상황을 직접 겪은 당사자들 간의 의견을 취합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신께 진실의 맹세를 올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으니. 제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섞여 있다면 저는 그 즉시. 여신의 저주를 받아 돌이 될 것입니다.”
친위대장은 엄숙하게 성호를 그었다. 이윽고 그는 덤덤한 어조로 하지만 목소리에 힘을 담아. 이 모든 사태에 대해서 설명했다. 중간중간 엘가르와 카타리나 요하네스를 심문하기도 했고, 벨로크 일행에게도 보여주기식 질문을 던졌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장로들과 유력자들의 얼굴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다. 창백해졌다가 붉어졌고, 누군가는 미소 지었다. 그들의 머릿속은 지금도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어디에 붙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갈아탈지. 힘을 합칠지.
수백 살 먹은 저 귀쟁이들. 각각 마을과 도시의 안녕을 수호한다는 의무를 지닌 저 우두머리들은 온갖 정치적인 모략을 일삼고 있었다. 그것이 정녕 자기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벨로크는 이 자리가 피곤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일을 벌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 뒷수습은 언제나 힘든 법이었다. 특히나 그 파장이 크면 클수록, 유착되어 있는 관계들이 많으면 더더욱 그랬다.
만약 내가 왕이 된다면 이런 꼬라지를 맨날 봐야 될 텐데. 그건 너무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던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의 틈 속.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요정 하나가 보였다.
가녀린 턱선으로 봐서 여자였으며, 얼굴에 드리운 천 때문에 그 사실 하나밖에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주문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는 벨로크의 두 눈은, 후드를 꿰뚫고 여인의 얼굴을 살폈다.
요정답게 아름다운 얼굴, 왕과 똑같은 특징적인 초록색 머리. 이거 또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는 군.
그는 피식 웃었다. 저 정체불명의 여인의 정체 때문이었다. 실체는 아니라 몇백년 전. 환상이었지만, 그는 저 여인을 본 적이 있었다.
아낙스. 이 땅의 수호자이자, 엘가르의 스승. 카라가 가진 마도서의 원주인. 그리고 지금은 격을 쌓아 승천했다고만 알려져 있는 케케묵은 옛존재.
신목과 융합한 대악마를 죽이고, 세계수의 기억을 살폈을 때. 달의 여신의 옆에 있던 여자가 저 여인네였다. 웃긴 것은 저 여자가 요정도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뭐 하다가 이제 나타난 거고.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벨로크는 아낙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힐끔 눈을 돌렸다. 꽁꽁 묶여 있는 엘가르가 그 자리에 있었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군.
그때. 벨로크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엘가르가 눈을 마주쳐왔다. 이제는 왕이 아니라. 죄인이 된 요정왕은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자신의 자존심과 콧대를 꺾지 않았다. 그저 오만한 얼굴로 뭘 보냐는 듯. 벨로크를 노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참. 한결같은 새끼란 말이지. 그보다 저 여자···
벨로크가 다시 아낙스를 살피려는 순간. 친위대장의 선언이 끝났다. 쉴 틈 없이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이 사태를 막지 못한 친위대장과 왕, 수호기사들을 향한 비판과 비난 역시 쏟아졌다. 물론, 벨로크 일행 또한 그들의 적의와 호기심 등을 그대로 받아야 했다.
친위대장은 노련하게 때로는 능구렁이같이, 그들의 질문에 답했다. 엘가르와 수호기사들 역시 제 죄를 인정했다. 여기에 에밀이 던진 말이 결정타였다.
“나는 역병의 치료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
권력자들은 눈을 부릅떴다. 낮에 이 이야기를 들었던 친위대장은 그나마 동요가 적은 편이었다. 분위기를 탄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병에 걸린 요정이 들것이 실려 왔고, 에밀과 막시머그는 치료제를 주사했다.
“콜록, 콜록. 후우, 후우.”
환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에밀은 주사기를 휙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들은 고통받는 동족들을 위해 이를 기꺼이 내어놓을 생각입니다. 배합법 또한 이미 왕궁 어의들한에 숙지시켜 놓았지요. 여러분들은 그저 나와 내 손자의 선행을 기억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녀의 말은 겸손했다. 하지만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열기로 가득 찼던 회의장의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위에 앉아있던 요정들은 경악을 넘어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 중에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자들이었다.
탐욕으로 눈을 불태우던 자들은 꺼진 재처럼 푸욱 바스러졌다. 에밀이 꺼내든 저 패로 인해. 그녀가 앞으로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쥘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에밀은 표정 관리를 했지만 입꼬리가 찢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턱과 어깨를 든 채, 벨로크의 옆에 자리했다.
마치 자신이 이들의 신원과 능력을 보증할 테니. 더는 딴소리 하지 말라는 듯 보였다. 그리고 주변 정세를 읽는데 도가 튼 권력자들은 이를 당연히 알아들었다. 그들은 꾸욱 입을 다문 그 순간.
“잠깐.”
한 요정이 책상을 쿵 쳤다. 이윽고 난데없이 회의장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듣자 듣자 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 지금 나보고 이 개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말이오?”
날렵하게 착지한 요정은 순백색의 판급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의 바탕에는 황금 용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장검과 방패에도 역시나 황금으로 된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힘 좀 쓸 것처럼 보이는, 또한 고귀한 태생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엘가르와 두 수호기사에게 조금만 기다리라는 듯. 자신이 그들의 무고함을 증명해내겠다는 듯. 뜨거움과 존경이 가득 담긴 눈을 보내왔다. 이윽고 웬 인간 놈들과 창녀처럼 보이는 악마에게 이글거리는 적의를 쏘아냈다.
“나는 케프네스. 옛 요정 가문 에이츠의 적법한 후계자이자, 아틸란타의 치안대장이다. 지금의 이 재판에 이의를 신청한다.”
스르릉. 케프네스라 스스로를 소개한 요정이 칼을 뽑아 들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단상 위에 있던 친위대장이 격분했다.
“네놈 케프네스!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신성한 재판장에서 날붙이를 꺼내 들다니! 치안대장! 이 무슨 경우 없는 행동입니까!”
에밀 역시 치안대장을 나무랐다. 하지만 벨로크는 웃었다. 꼭 자신이 직접 경험해봐야 말귀를 알아듣는 놈도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벨로크는 그런 친구들을 교육시켜주는 것에 있어서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꾸우욱.
두툼한 주먹이 주인의 의지에 따라 힘줄을 비죽 세웠다. 그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명예로 똘똘 뭉친 저 얼치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