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대접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그래야 된다뇨···?”
“내 말은 말 그대로의 뜻이야. ‘지금’ 치료제를 건네줌으로써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생기냐는 거지.”
에밀은 어깨를 으쓱였다. 장난스러운 듯한 몸짓, 그와 비례 되는 차가운 눈, 안에 담긴 탐욕. 화린은 그제서야 이 여자가 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그 냉혹하고도 계산적인 행동에 화린의 말문이 턱 막혔다. 에밀은 동그란 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윽고 입술을 핥으며 그 맛을 음미했다.
“착해빠진 아가씨. 아니,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들어봐.”
에밀은 화린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벨로크와 이자벨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너희 인간들은 무리를 짓지. 하이랜드의 야만인, 아리안의 깜둥이, 신성왕국의 광신도, 남은 떨거지인 아드리아까지. 각각 인종, 민족, 종교별로 말이야. 하지만 국가와 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그들도 결국 자기들끼리 칼을 뽑는 일이 비일비재 하잖아? 영지전이니, 계승권 다툼이니, 결투니, 온갖 명분을 다 갖다 붙여서 말이야. 더 많은 땅. 더 많은 지위와 재산을 위해.”
에밀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우리도 똑같아. 달의 여신의 이름하에. 요정왕의 이름하에. 부족의 규율과 관습 아래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이 아주 많아. 작게는 마을 내에서, 마을끼리, 크게는 마을과 수도 사람들 간의 갈등이 있겠네. 현왕이 끌어내려지면 이 다툼은 더 심해질 테고.”
벨로크는 이곳 나스 밀림에서 겪었던 일들로 인해. 저 예쁘장한 귀쟁이들이 실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소리 지르고, 화가 나면 욕하고 비난하고 헐뜯는다. 욕망과 탐욕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건 국가적인 재난 사태잖아요!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당신과 막시머그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고요!”
화린은 성에 잠입하기 전. 고통받고 있던 요정들의 모습을 상기했다. 뒷골목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던 그들. 에밀 역시 그 모습을 봤겠지만,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마을의 병자들은 다 치료했으니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아니, 오히려 상대측의 전력이 약해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야.”
듣고 있던 이자벨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도에서 병사로 복무할 때. 이곳에 만들어둔 인연들이 생각난 것이다. 분노한 화린이 식탁을 쿵 쳤다. 술병과 음식 접시들이 요란하게 굴러떨어졌다.
“당신! 끝까지 이기적이네요! 그렇게 권력이 갖고 싶어요? 아니, 그러면 다른 방법도 있잖아요! 당신의 이름으로 치료제를 나눠준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당신을 칭송할 거예요. 꼭 이런 걸로 협박할 필요 없잖아! 잘못하면 역효과만 날걸? 신의를 잃는다고!”
에밀의 입가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화린을 귀엽다는 듯이 보며 웃었다.
“그래, 맞아.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만무하지. 더러운 상인들이나 일삼는, 몰매 맞아도 할 말 없는 짓이야.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지금’ 치료제를 건네줌으로써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냐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건가?”
듣고 있던 벨로크가 말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에밀의 미소가 사라졌다. 여유로워 보이던 그녀는 뭔가에 쫒기듯 말했다.
“···들어봐요. 내일 열리는 공개재판은 사실상 말만 공개재판이지. 짜고 노는 판이 될 거예요. 재판이 열리기 전. 각 마을의 장로들, 수도 내의 힘 있는 권력자들. 그들 모두가 모여서 미리 입을 맞출 거라는 얘기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암투가 발생할 거고, 다들 가지고 있는 비전과 힘을 이용해 다음 대 왕이 되려고 자기 자신을 어필하겠죠.”
그래, 현왕에게는 자손이 없으니. 각축전이 벌어지겠지.
“친위대장은 분명 대단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역시 왕의 부정을 막지 못한 죄가 있기에 그리 큰 발언권을 얻지 못해요. 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의 보증은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당연히 죄인들의 말을 들을 리도 없으니. 이 소동의 중심에 있는 당신들은 이리 불려가고, 저리 불려가겠죠. 그 멍청이들은 당신들의 무력을 못 봤으니까! 하지만!”
에밀이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숨기지 못한 열기가 이글거렸다.
“그 소동의 한복판에서 내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거예요. 이 모든 혼란의 시발점. 역병에 대한 치료제를 내보이는 거죠!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발언권과 위상은 대번에 올라갈 테고! 난 왕이 되는 거예요! 당신들 역시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는 것은 물론, 차기 요정왕과의 인맥도 만드는 거죠!”
스스로에게 도취된 에밀이 양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화기애애했던 식당은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양촛대가 지그르르 녹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왔을 뿐이다.
화린은 에밀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치를 떨었고, 이자벨은 헛웃음을 지었다. 벨로크는 처음과 같이 덤덤한 표정이었다.
에밀은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주변에 깔린 적막과 그들의 표정을 살피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딱 하루예요. 아니, 단 몇 시간만 기다리면 돼요. 공개재판이 끝나는 즉시. 가진 치료제를 다 뿌릴게요. 배합법 또한 모조리 말이죠.”
그녀는 힐끔 벨로크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침묵이 자신을 탓하는 듯했다. 병에 걸린 환자들의 고통을 네 욕심으로 인해 외면하고 있냐는 듯했다.
에밀은 짜증이 치솟았다. 화린을 상대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저 사내만 마주하면 이랬다. 그래서 그녀는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였다.
“하아··· 실은 아까 전. 막시머그와 함께 격리소로 갔었어요. 증상이 심한, 오늘내일할 것 같은 자들에게는 몰래 약을 주사했죠. 털고 일어나는 것까지는 무리여도 죽지는 않을 정도로요. 부족한가요?”
에밀은 치켜 올라간 눈을 반쯤 접으며 말했다. 벨로크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술을 마저 마셨다. 그리고는 자기 어머니의 유지를 잇기 위해. 이 먼 땅까지 찾아온 막시머그를 힐끔 살폈다.
“마음대로 해라.”
그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 이자벨이 따라붙었다. 그러자 화린 또한 에밀을 노려보다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탕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손잡이를 끼리릭 돌리자 사자 모형의 석상에서 깨끗한 물이 연신 쏟아졌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욕조에 몸을 기댄 화린이 후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지금 왕궁의 욕조에 감탄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사람들은 권력에 열광하는 거죠? 남의 위에 서고, 아랫사람을 짓밟는 것이 그렇게 좋을까요? 그리고 벨로크씨는 왜 에밀을 저지하지 않고 떠나신 건지···”
마찬가지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이자벨이 자기 얼굴을 쓸었다. 그녀는 화린을 쳐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화린은 참 정의롭네요.”
화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자벨의 말투에서 아까 전. 에밀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느니. 순진하다느니.
“설마··· 이자벨씨도 에밀의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좋은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전 당신처럼 에밀을 규탄하지도 않았고, 침묵했으니. 어쩌면 이에 동의했는지도 모르겠네요.”
화린은 충격받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자벨은 물기 가득한 손으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매만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에밀의 발언을 들었을 때. 고통받고 있을 동족들에 대한 분노와 공감 대신, 그녀가 왕에 오름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곳에서의 일을 끝낸다면 우리들은 로벤으로 가게 될 테고, 그곳에서 못다 한 일들을 이루게 될 테니까. 남은 대악마들, 왕이 된 게오르그 공작, 벨로크의 몸을 갉아 먹고 있는 절대신과의 싸움까지. 하나같이 쉬운 일이 없죠.”
이자벨의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 전장의 폭풍 속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를 거예요. 인간들의 군대, 대악마와 잊혀진 신의 군대들 또한 상대해야 될 테니까. 한 마디로 힘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어쩌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해야 될 지도 몰라요. 여든 살배기 애한테도 창을 쥐여주고 나가서 싸우라고 말 해야 될지도 몰라.”
“어떻게··· 이자벨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악마가 되었음에도 마음속에 상냥함을 품고 있는···”
이자벨은 제 가슴을 와락 움켜쥐며 웃었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오직 제 욕심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천하의 쌍년이죠.”
창백한 피부에서 시커먼 피가 주르륵 흐르다가 금세 아물었다. 이자벨은 건조한 눈으로 그 피를 핥다가 느닷없이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이 얘기를 해줬던가요? 내가 악마가 된 계기.”
“네, 대악마에 의해 저주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 저주를 받은 후. 나 홀로 일행에게서 떨어졌었어요. 그 후. 웬 미치광이 마녀 집단을 만나 모진 실험을 당하고, 지금 이 꼬라지가 났죠.”
“그런···”
입가를 가리는 화린을 향해 이자벨이 슬며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워졌다.
“회까닥 돌아버린 나는 일행에게 칼을 들이댔고, 다행스럽게도 벨로크에 의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그 후. 내가 제일 처음 한 일이 뭔 줄 알아요?”
이자벨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은 이제 화린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화린은 바짝 굳어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이자벨의 눈과 몸에서 피어오르는 요사스러운 기운 때문이었다. 어째선지 몸이 뜨거웠다.
“바로 그와 키스한 일이었어요. 그리고는 그날 밤. 아델과 카라가 잠들었을 때. 나는 그의 침실로 몰래 잠입했죠. 뭐 했냐는 말은 하지 말아요. 여자와 남자가 같은 방을 쓰는 이유가 또 있을까요?”
“자, 잘 알겠어요. 그보다 이자벨씨···? 너무 가까운데요?”
화린이 겨우 입을 뗐음에도 이자벨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그녀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앗! 가, 갑자기 무슨!”
“나는 아델과 카라가 벨로크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벨로크 역시 두 사람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남녀 사이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당사자들보다 많은 것들이 보이는 법이니까.”
이자벨은 욕망이 진득이 묻어나는 얼굴로 연신 화린을 희롱했다.
"흐윽..."
“그렇기에 나는 먼저 행동했어요. 어떻게든 그에게 나를 새겨넣고 싶었거든요. 이유는 단순해요. 버림받고 싶지 않았거든. 나는 지하의 족속들과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벨로크라는 사내는 그런 나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안식처였죠. 날 매도하지도 않았고, 강했으며, 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었으니까.”
이자벨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욕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 대한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제 손에 의해 헐떡거리고 있는 화린을 바라봤다.
이자벨의 마음속에서 음심이 차올랐다. 이 올바른 아가씨를 부서트려서 오직 벨로크만을 위해 일하게끔 만들고 싶다. 그가 명령하기만 한다면 그녀 스스로의 가치관과 신념을 모두 버리고, 행동하게끔 만들고 싶다. 마안이 번뜩이려는 순간. 이자벨은 슬쩍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화린에게서 손을 뗐다.
“이건 내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에요. 아델과 카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쌍년이겠죠. 하지만 난 행동했고, 그의 옆을 차지할 수 있었어.”
이자벨의 말은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았다.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화린을 힐끔 보더니. 욕탕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화린. 당신도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바라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벨로크를 위해서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또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지. 그 모든 것들을요.”
이자벨은 맨몸에 가운을 걸친 채, 뚜벅뚜벅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벨로크의 옆에 당신 자리는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