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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 사이로 석재로 만들어진 분수대가 보였다. 달 아래로 샘솟는 물줄기는 무슨 은으로 된 실타래를 보는 것 같았다. 여기에 중간중간 세워진 조각상들.
날개를 펼치고 포효하는 용, 칼을 들고 괴물의 목을 치는 요정, 레이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의 동상 등. 장인의 손길이 닿은 공예품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수정궁이라는 이름답게 그 모든 장식들이 통짜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돈지랄을 바라보는 세 사람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벨로크야 원래 그랬고, 안내를 맡은 병사와 이자벨 역시 그랬다. 정원 곳곳에 떨어져 있는 신체 조각들과 창자가 그 분위기에 조금은 일조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잔디밭을 조금 걸었을까. 곧 둥글고 뾰족한 첨탑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빼곡한 창문마다 노란빛이 뿜어져 나오는 그것은 왕의 궁전이었다. 거 더럽게 화려하네.
“이곳입니다. 비밀 엄수를 위해 사용인들은 모두 떠나보냈기에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를 불러주시면 됩니다.”
은빛 램프를 들고 있는 병사 레비가 말했다. 불빛에 비치고 있는 그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죽은 동료들에 대한 슬픔, 지인과 가족, 나라에 대한 걱정 등이 한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그가 한편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입매가 조금 호선을 그리고 있던 것이다. 저놈 저거 왜 이러지?
벨로크가 생각할 때. 이자벨이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돌아가셔도 좋아요.”
레비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네? 그게 무슨··· 수정궁은 그 크기만큼이나 굉장히 복잡하고···”
“저도 병사 생활을 할 때. 이곳에서 근무를 선 적이 많았거든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야 훤히 알고 있답니다.”
“병사라니··· 그 모습은 그럼··· 아니, 그래도···”
레비는 당황했다가 곧 울상을 지었다. 벨로크는 거기서 저 친구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다. 저놈은 지금 일행의 안내 및 수발을 들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소위 말하는 비서 역할을 맡은 셈이다. 하지만 바깥에 있는 제 동료들과 상관들은 돌무더기를 나르고, 부상자를 처치하고 있었다. 일의 강도 차이는 월등하다. 합법적으로 꿀을 빨 수 있는 기회를 이자벨이 날려버린 것이다.
“저 그래도 영웅께서 직접 나서시기에는···
“아뇨. 내 남자의 목욕물을 데워주고 밥을 차려주는 게 뭐가 힘들까요? 우린 정말 괜찮으니 가보도록 해요.”
꾸물거리는 레비에게 이자벨은 정중하게 허나 단호히 끊어냈다. 병사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를 보던 그녀가 군기가 개판이라며 혀를 찼다.
“나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하여간 요즘 것들이란···”
과거를 떠올린 벨로크가 웃었다. 뭐 군필 여고생 이런 거냐?
“여기 군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군.”
“사람 사는 곳이야 다 비슷하죠. 그렇다고 해도 저 녀석은 좀 심한데.”
어깨를 으쓱인 이자벨이 벨로크를 이끌었다. 투명한 대리석 바닥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반사시켰다. 두툼한 가죽 부츠를 신고 있어도, 이따금씩 냉기가 올라오는 이 바닥은 궁전 주인의 이미지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거기다가 사용인들 역시 없으니. 무슨 외딴 세상에 두 사람만 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벨로크는 이 넓은 공간에 사는 것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요새 하나를 떡 지어놓고 사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수 백 년 동안 산다면 좋은 성격도 삐뚤어지겠군. 역시 성보다는 저택이··· 벨로크가 소시민적인 성격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이자벨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 오늘 한 번 파티를 열어보자구요.”
머리까지 묶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인 이자벨이 주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벨로크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줄 속셈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주방에는 이미 온갖 음식들이 다 차려져 크고 작은 쟁반에 담겨 있었다. 아마 식사를 준비하던 중. 이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음··· 아쉽네요.”
“뭘. 손에 물 안 묻히고 좋지.”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트레이에 접시들을 담았다. 이자벨은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직접 해주고 싶었는데.”
이 아가씨가. 왜 이렇게 귀여워졌어? 벨로크는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이자벨은 하지 마요. 부끄럽잖아.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장난을 친 두 사람은 술도 좀 챙긴 후. 식당으로 향했다.
한쪽에는 통짜 유리로 된 테라스가 나 있었고, 길쭉하고 넓은 식탁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깔려있었다. 여기에 천장에 달린 수십 개의 샹들리에와 그 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는 금촛대들이 그 화려함을 배가시켰다.
“밥 먹을 만 나겠네.”
“그러게요. 나도 주방에서 몰래 과자나 몇 점 얻어 먹어봤지. 여기서 식사하는 건 처음이야.”
휘장 아래 선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여 음식과 술을 식탁 위에 차렸다. 그때.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화린과 에밀, 막시머그가 들어왔다.
“벨로크씨! 이자벨씨! 무사했군요!”
“느닷없이 왕궁으로 부르다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
“반푼이인 제가 이런 곳에 와도 될런지···”
세 사람은 혼란스러워했지만, 곧 차려진 음식들을 뚫어져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하루 제대로 먹은 것이 없다시피 한 것이다.
“일단 배부터 채우지. 식었겠지만 썩 훌륭해 보이는데.”
벨로크는 그 말과 함께 음식을 덜어서 한 입 먹으려 했다. 그때. 에밀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잠깐만요! 왕국 최고의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들을 그 상태로 먹는다뇨. 그건 장인들에 대한 모욕이에요.”
“···그럼 어쩌라고? 네가 데워올 건가?”
벨로크가 쳐다보자 에밀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무식해서야. 이래서 칼잡이들은 안 된다니까?”
후후 웃던 그녀는 벨로크의 눈가가 가늘어지자 흠칫 놀랐다. 이윽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나타난 것은 불로 된 작은 새였다. 녀석은 에밀의 뺨에 고개를 부비더니. 그녀가 손짓하자 식어버린 음식들로 날아가 제 몸뚱이를 비볐다. 그러자 식어서 하얀 기름을 띠고 있던 새끼 돼지 통구이가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오.”
벨로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 여자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것에서 온 감정 표현이었다.
“후후. 놀라기는···”
에밀은 이를 모르는지. 그가 감탄하자 우쭐거리며 음식들을 데웠다. 여기에 수백 년 묵은 술들이 그 주둥이를 열었고, 곧이어 파티가 열렸다. 네 사람은 일단 먹고 마셨다. 배부터 채우고 앞으로 있을 일을 논의할 생각이었다.
과연 그 까다로워 보이는 놈이 입에 댈 만큼 음식은 맛있었다. 술에 취한 막시머그가 소리를 와악 지르다가 눈물을 흘렸고, 에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싱글싱글 웃었다. 이자벨은 벌꿀주만 훌쩍거렸다.
“이제 진짜··· 끝난 거죠?”
그렇게 식사가 얼추 끝나고, 술잔을 든 화린이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고향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복수를 끝마쳤다는 후련함. 두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한 마디로 씁쓸해 보였다. 벨로크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후. 화린을 쳐다봤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오?”
“네?”
화린은 화들짝 놀랐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듯 했다.
“당신의 고향은 이 땅이고, 복수는 끝났소. 비록 그 끝이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말이오.”
차분한 어조로 얘기하던 벨로크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당신도 자기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하니까.”
“···”
화린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가 벨로크를 힐끔 쳐다봤다. 이윽고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저, 이곳이 제 고항이기는 한데. 이제는 고통스러운 기억밖에 안 남은 곳이고. 알고 있는 사람도 없어서··· 그러니까···”
듣고 있던 이자벨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우리들을 따라오겠다는 건가요?”
그녀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화린은 어째선지 저 미소가 더없이 차갑다고 느꼈다. 여자로서의 본능이었다. 화린은 쭈그러들었지만 그래도 제 의견을 피력했다.
“벨로크씨에게 진 빚을 갚은 후. 대륙에서 자리를 잡고 싶어요. 안 될까요?”
그녀의 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특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벨로크는 말을 아꼈다. 욕탕에서 화린과 했던 포옹이 떠올랐던 탓이다. 긴장했는지 바르르 떨던 몸과 아델보다는 크고, 이자벨보다는 작은 가슴. 미약한 땀 냄새. 남성의 것보다는 가늘지만 그래도 탄탄한 근육들. 음···
그는 힐끔 이자벨을 살폈다.
“아하. 빚을 갚고 싶으시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다른 손으로는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녹색 안광이 마치 품평을 하듯 화린을 살폈다.
“으흠. 뭐, 그렇게 하죠. 세 명에서 아니, 네 명에서 한 명쯤 더 늘어난다고 한들. 상관없겠지. 내가 첫 번째였으니까.”
이자벨은 화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턱을 조금 들며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대악마에 버금가는 마력을 지닌 악마도, 나라를 구해낸 영웅도 아니었다. 그저 그저 원하던 것을 쟁취해낸 여인의 거들먹거림과 치기만 엿보였다.
이자벨은 마치 자신이 위인 듯. 혹은 선배인 양 화린을 지그시 응시했고, 화린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옆에서 능력도 좋네. 라고 중얼거리는 에밀에게 벨로크가 시선을 맞춰왔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가 술기운을 빌었는지. 가슴을 가리며 와락 소리쳤다.
“뭐? 왜요? 나도 따먹을려고?”
미친. 저게 어떻게 수 백 살 먹은 노인네의 말투며, 생각이야? 처음 봤을 때는 안 저랬던 거 같은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벨로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밀. 넌 장로였지.”
“그래요. 난 몰아치는 폭풍 부족의 우두머리이자. 그 땅을 수백 년간 다스린 지배자예요. 왕의 결정권에 반대를 행사할 수도 있고, 그의 폭정에 대항해 다른 장로들과 표를 모아 왕조를 갈아치울 수도 있죠. 난 대단한 사람이라구요! 날 이렇게 다룬 사람은 당신이 처음···”
에밀은 대뜸 고개를 끄덕이며 조잘대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이윽고 벨로크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설마 당신··· 높은 위치에 있는 여자를 강제로 취하고,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을 즐김으로써 자기 욕구를 채우는 사내였나요? 무슨 그런 변태적인 성욕··· 꺅.”
벨로크에게 한대 얻어맞은 에밀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벨로크는 끙끙거리는 저 보랏빛 머리통을 박살 낼까 하다가. 후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전에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의 목적은 요정과 인간 사이의 전쟁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 친위대장의 말만 들어본다면 얼추 일이 잘 해결될 것으로 보이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친위대장이 무슨 말을 했는데요?”
에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물었다. 벨로크는 아차 했다. 저년은 현장에 없었지. 잠시 소통의 부재를 느낀 그는 지금 상황을 한 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화린과 에밀에게 친위대장으로 부터 들은 얘기를 해주었다.
“아하. 그래서 아까 전령들이 그렇게 성문 밖으로 나간 거였군요. 나라의 요정들을 한데 모아서 치르는 공개재판이라면 지금의 혼란을 가장 빠르고 쉽게 꺼트릴 수 있을 테니까.”
에밀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 시선은 취해서 곯아떨어진 막시머그를 향해 있었다. 벨로크는 그 잠깐의 반응으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친위대장은 잘못을 저지른 왕을 끌어내릴 생각이었고, 그와 두 수호기사들의 죄를 물어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생각이다. 자동적으로 현왕의 자리는 공석이 되겠지. 엘가르는 자손도 없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일 이득을 보는 것이 누굴까? 바로 눈앞의 에밀이었다. 정확히는 역병의 치료제를 가진 그녀와 그녀가 가진 장로라는 직책.
“그러고 보니 에밀? 역병의 근원인 신목이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좀 어떻던가요?”
이자벨이 바깥 상황을 물었다. 에밀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벨로크를 대하던 때와는 달리 말투 역시 바뀌었다.
“나무가 사라진 덕분에 더 이상 퍼져나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있던 병이 치료된 것은 아니었어. 막시머그의 말에 따르면 이건 저주 같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질병. 무슨 작은 생물? 눈에도 안 보이는 그런 기생체에 의해서 발병하는 거라더군.”
그러니까 사제의 치유 기도가 안 먹혔지. 듣고 있던 화린이 다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치료제는요? 약의 제조법을 왕궁 어의들이나, 다른 의사들하고 공유한다면 지금이 사태를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에밀은 대답 대신.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렸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식탁까지 쿵쿵 쳐댔다. 화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벨로크와 이자벨은 알만 하다는 표정이었다.
“저, 에밀씨? 이게 그렇게 웃겨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잖아요. 당신 동족들이요. 어서 해결해야죠. 아. 혹시 치료제를 이미 건네준 건가요?”
화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후. 웃음이 잦아든 에밀이 눈가를 매만졌다. 눈물 몇 방울이 그녀의 손에 주르륵 묻어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