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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
신성이 담긴 칼날이 흉물을 갈라버린 순간. 놈의 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어둠이 터져 나왔다. 이는 주변의 땅을 오염시키지도 않았고,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알갱이가 되어 벨로크의 몸과 청금석 목걸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력과 정령들의 안식처였던 신목이 쌓아온 격, 대악마가 협잡질과 살인을 일삼으며 쌓아온 격, 친위대원들의 수 백 년 노력의 결실까지. 그 모든 업들이 하나로 모여 그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리고 이건 레벨업이라는 한층 더 높은 경지. 더 강력해진 신성으로 보답받았다. 아니, 생각하던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는 괴물과 인간을 죽이고 경험치를 모아 힘을 얻은 이 행위를 레벨업이라 불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이건 게임 속 세상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수치화할 만한 게 아니었다.
이건 절대신의 신성이 행하고 있는 권능이었다. 한 존재를 죽임으로써 그것이 가진 기억과 경험, 정수를 취하는··· 그 존재의 모든 것을 강탈하는 행위. 노르드의 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벨로크의 눈앞에 수많은 장면들이 지나갔다. 처음 나온 것은 웬 꼬마 요정이었다. 그러다가 놈이 성인이 되고, 경지를 이룬 마법사가 되었는데. 그 장면이 영화 속 필름을 수백 배는 빠르게 재생시키는 듯 순식간에 스쳐 갔다. 이건 또 뭐야?
벨로크는 어리둥절해했지만, 곧 눈앞에 떠오른 광경을 보고 이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위대한 존재시여! 드디어 제가 해냈나이다! 티끌만 한 가능성 속에서 기적을 발견했고, 그것은 당신의 영원한 고독과 갈망을 채워줄 하나뿐인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
드높은 권좌에 앉아있는 사내에게 귓속말을 속삭이는 요정의 모습이 보였다. 요정은 음심이 돋아나는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었고, 이를 듣고 있는 사내는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도 이곳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절대신과 대악마가 되기 전. 아가레스라는 존재의 모습임을 깨달았다. 놈의 기억인 모양이었다.
벨로크는 뱀처럼 간사한 혀로 신으로부터 권능을 탈환한, 이미 죽어버린 요정놈의 편린을 살피는 대신.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원흉을 자세히 살폈다.
굳게 다문 입술과 하관에서는 단단함과 함께 고집이 엿보였다. 얇게 갈라진 눈은 작다기보다 날카롭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짧게 올려 친 머리칼, 끝은 몽톡하면서도 두툼한 코. 길거리에서 한 번씩은 마주할 법한, 남자답게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 엿 같은 새끼.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놈은 철천지 원수일 뿐이었다. 잘살고 있던 자신을 이 세계로 끌어들이고, 제 운명을 멋대로 조작하고, 끝끝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강탈하려는 놈이었으니까. 시발 새끼, 미치광이 새끼, 물귀신 같은···
벨로크가 절대신을 마음껏 욕하던 그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나무는 물론, 잡초 한 포기, 꽃 한 송이조차 없는 황야였다. 그 황량한 땅에는 두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둘 다 가슴이 볼록한 것으로 보아 여인들이었다.
“나의 아이들이 이 낯선 땅에 적응할 수 있을까?”
말을 내뱉은 여인은 시리도록 차가운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귀도 길쭉했고, 눈동자 역시도 환히 빛나는 보름달을 닮은 듯. 새하얗게 반짝였다. 그녀는 앞에 있는 여인에게 말을 하는 동시에 포개고 있던 양손을 조심스레 내렸다. 그 안에는 씨앗이 하나 있었다.
여인은 파놓은 땅에 씨앗을 묻고는 맨손으로 흙더미를 쓸었다. 그리고 후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땅이 우르르 울리며 바닥에서 싹이 자라났다. 이윽고 그 싹은 잎과 줄기를 잉태했고, 순식간에 커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뿐만 아니라. 그 나무를 기점으로 메마른 땅 주변에도 푸르스름한 초목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또 다른 여인이 말했다.
“달의 주인이시여. 걱정 마십시오. 세계수가 있으니 이 황량한 땅은 이제 생명과 싱그러움이 가득한 지상낙원이 될 것입니다. 당신들의 신도들, 아이들, 맹목적인 추종자들 역시 그 은혜를 마음껏 입으며 천수를 누리겠지요.”
“흐르는 숲에 남겨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나기는 한다만···”
말끝을 흐리던 요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주변은 완연한 녹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폐한 땅이 한순간에 생명이 충만한 공간이 되었다. 요정은 아련한 눈으로 이를 잠깐 바라보다가 여인의 어깨를 매만졌다.
“그 아이들의 선택은 존중해줘야겠지. 아무튼 모쪼록 잘 부탁한다. 아낙스. 나의 대리자이자 이 땅의 수호자야.”
“살펴 가십시오. 나의 주인이자 계약자. 함께 싸운 전우이자 친구였던 존재여.”
여인은 고개를 숙였고, 요정은 내려오는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사라졌다. 동시에 벨로크의 눈앞을 아른거리던 빛 또 한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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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크? 정신이 좀 들어요?”
벨로크가 눈을 뜨자. 이자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튼튼하면서도 말랑한, 뒤통수로 와닿는 느낌이 썩 괜찮았다. 돌바닥이 아니라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것이다.
“흠.”
달밤 아래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와닿는 온기는 따뜻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른 직후. 긴장이 탁 풀려버린 벨로크가 멍하니 그 느낌을 음미했다. 그러자 미간을 찌푸린 이자벨이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당신. 괜찮아?”
“물론, 배가 좀 고프단 것만 빼면 멀쩡해.”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자벨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의 뺨에 키스했다.
“화린은?”
“에밀의 저택에 그녀와 함께 있어요. 원체 튼튼한 아가씨고, 에밀 또한 실력 있는 마법사니까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예요.”
실력 있다고? 벨로크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냥 이자벨의 어깨를 감쌌다.
“너도 가서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 걱정되서 돌아온 건가?”
“당연하죠. 그건 말 그대로 정도를 벗어난 괴물이었는걸. 내가 어떻게 당신만 내버려 두고 가. 꼭 그놈만이 아니라 크게 다친 당신을 다른 요정들이 해코지할 수도 있잖아!”
뺨에 와닿는 입술이 이제는 목덜미까지 그 손길을 뻗쳤다. 그 맹목적인 몸짓에 벨로크는 웃었다. 그래, 이게 사는 거지. 내가 이 엿 같은 세상에 떨어지고 나서 얻은 얼마 안 되는 기쁨이야. 달밤 아래에서 애정을 과시한 두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계수가 있던 자리는 뻥 구멍이 뚫려있었다. 어찌나 깊고 어두운지 무슨 지옥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근처 지반이 많이 약해졌겠는데. 어쩌면 왕궁터가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겠어. 벨로크는 그 괴기한 상흔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구멍 못지않게 난장판이 된 왕성 내부와 정원이 보였다.
살아남은 요정들이 그곳을 어지러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중에서 몇 명의 친위대원들이 벨로크가 깨어난 것을 확인했다. 그러자 그들은 부서진 돌과 잔해를 치우고, 부상자들을 옮기는 와중에도. 냉큼 제 상관들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가 깨어났다고?
저 멀리 있던 친위대장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찌그러진 투구와 검댕이 묻은 얼굴이 벨로크의 눈에 아주 잘 보였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 벨로크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는 이자벨에게 양해를 구한 후. 세계수가 있던 자리. 몇백미터 아래의 구멍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윽고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반투명한 까만 보석이 들려있었다.
“그건···?”
탁한 물을 뚝뚝 흘리는 보석을 본 이자벨이 눈을 크게 떴다. 안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을 감지한 탓이다. 벨로크는 보석에 묻은 이물질을 툭툭 털면서 말했다.
“녀석이 남긴 정수··· 아니, 찌꺼기라고 보는 편이 낫겠군. 어찌 됐든 마력의 집합체처럼 보인다.”
벨로크는 신성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대악마의 영혼과 정수를 자신 내부의 시스템 창이 흡수했다고는 하나. 이 보석 또한 심상치 않은 마력을 품은 물건이었다. 웬 어리숙한 요정이나 생물체 손에 들어간다면 까다로운 악마가 탄생하리라. 그가 손아귀에 힘을 줘 보석을 부수려는 찰나. 이자벨이 그의 손을 턱 잡았다.
“잠깐만요. 그거 부술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렇다면 나한테 넘겨줘요. 내가 써볼게.”
“진심인가? 또다시 정신이 홰 까닥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결의에 찬 눈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 대륙에 남은 악은 가득하고, 당신의 가시밭길도 그대로야. 신목을 흡수한 대악마가 그렇게 강했는데. 절대신이라는 그 존재는 얼마나 강할지···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어···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한테 힘이 되려면, 아니, 적어도 발목이라도 안 잡으려면 나도 더 강해져야 해.”
난 당신과 함께 나란히 이 땅에 서고 싶어. 중얼거린 이자벨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보석을 빼내더니 제 가슴 사이로 그것을 집어넣었다. 아니, 그게 왜 그쪽으로 들어가? 벨로크가 멍한 눈이 되고, 이자벨이 베시시 웃었다. 그때. 친위대장이 다가왔다.
“정신을 차렸군. 인간.”
“그래, 너희가 싼 똥을 치우느라 고생 좀 했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은 했나?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벨로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가 부린 신성의 묘리로 엘가르가 벌인 짓거리가 본인의 입을 통해 왕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여기에 나타난 대악마는 그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왕성 밖이라면 몰라도, 그 상황을 직접 본 당사자들이라면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여기까지 와서 이를 믿지 못하거나. 그냥 눈을 돌린다? 그땐 벨로크도 별수 없었다. 에밀을 통해서 전염병의 치료제로 협박하거나. 그냥 로벤으로 돌아가 전쟁을 준비할 수밖에. 아니, 잠깐. 전염병의 원흉인 세계수가 사라졌다면 질병도 사라지지 않았나?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 친위대장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왕국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먼저겠지. 인간. 아니, 벨로크경. 다시 없을 은혜를 입었소. 이 나라와 우리 종족 전체가 말이오.”
뻣뻣한 귀쟁이의 허리가 90도 가까이 숙여졌다. 직후. 그는 공손한 태도로 두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벨로크가 그 흉물을 죽였던 순간. 엘가르와 두 친위기사는 자신들의 죄를 순순히 시인했다. 치료를 받은 그들은 감옥으로 들어갔고, 내일 아침. 나라의 모든 요정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벨로크 일행의 업적과 인간들에 대한 오해 등. 모든 것을 푼다는 것이다.
이 새끼들이··· 그렇게 뻐팅기다가 이제는 또 일 처리를 존나게 빨리하는군. 아니, 그럴 수밖에 없나? 혀를 차던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괴물이 된 신목을 수도의 모든 국민들이 다 봤을 것이고, 쏟아져 나온 악마들에 의해 수많은 요정들이 죽었다. 왕성의 분위기만큼이나 지금 도시의 분위기는 처참할 것이다. 자칫하면 내전이 일어날 만큼.
덕분에 이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고, 이를 책임져야 할, 혹은 나서서 무언가를 해결해야 할 위치인 친위대장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는 지금부터 아주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시민들을 설득하고, 권력자들에게 설명하고, 재난을 수습해야 할 테니까.
“후우.”
그 사이.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친위대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피딱지도 닦지 않은 얼굴로 연거푸 고개를 숙이더니. 병사 한 명을 불렀다.
“당신들이 해준 일을 생각한다면 당장에 나라의 곳간을 열어 축제를 열고, 온갖 금은보화와 미녀, 귀물들을 손에 안겨주었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그래, 상황이 좀 거시기하지. 아직 오해는 풀리지 않았고, 도시는 불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혼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편히 쉬고 있으시오. 내 그대들을 위한 최고의 잠자리를 마련해두었으니까.”
친위대장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레비. 이분들을 수정궁으로 모셔라.”
그 말에 병사와 이자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정궁은 왕이 머무르는 처소다. 당연히 왕성에 존재하는 궁전 중에서도 그 권위가 남달랐다. 나라가 세워진 후. 수백 년간. 인간들은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별천지였으니까. 이는 친위대장 나름의 구색 맞추기였다.
왕국의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고, 벨로크를 대우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벨로크와 친분을 맺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일 수도 있었고, 그나마 멀쩡한 건물이 그곳뿐이라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벨로크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남들이 다 일 할 때. 그는 왕국 최고 권력자의 집에서 쉬란 소리였으니까. 벨로크는 저택에 있을 에밀과 화린, 막시머그도 수정궁으로 데리고 와달라고 말했다. 이윽고 이자벨의 어깨를 감싸며 병사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럼··· 왕이 된 기분을 좀 느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