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82화 (182/222)

182

익숙한 일

광기의 대악마. 신목을 집어삼킨 자. 종래에는 스스로의 한계를 탈피한 자.

모든 것이 어둠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그 새로운 존재는 벨로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일단은 너한테 감사를 표해야겠구나. 너의 그 전율적인 힘. 신성이라는 미증유의 기운 덕분에 나는 한 차례 더 진보할 수 있었다. 티끌만 한 가능성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나 스스로의 격을 드높인 것이지.”

맨들맨들한 얼굴 어디에도 발성을 위한 기관이 없건만, 그것은 자기 목소리를 토해냈다. 바위틈에서 일어난 이자벨의 팔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먼지투성이가 된 그녀는 기절한 화린을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상황을 살폈다. 벨로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화린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라.”

“하지만 그러면 당신은···!”

“가서 쉬고 있어. 금방 정리하고 뒤따라갈 테니까.”

벨로크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웃었다. 이자벨은 잠깐 망설였지만, 곧 날개를 파닥거렸다. 여기서 더 어물쩍거려봐야 그에게 부담만 줄 것 같았다. 그것에는 앞으로 벌어질 난장판에서 화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로 죽는 것만큼 개죽음은 없으니까. 이를 보고 있던 검은 인간이 한 손을 뻗었다.

“어디를 가느냐? 저 여인은 내 아이를, 마왕의 씨앗을 잉태할 씨받이다. 두 개의 어둠은 더 강한 어둠을 낳고, 여기서 태어난 칠흑은 세상의 종말과 천상신들의 몰락을 야기할 것이야.”

녀석에게서 뿜어져 나온 사악한 의지. 강력한 무형의 힘이 이자벨의 몸을 붙들었다. 그녀가 헉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벨로크가 허공을 향해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악마의 의지가 산산이 조각났다. 자유를 되찾은 그녀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보다가 왕성을 벗어났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구 여자한테 눈독을 들여? 넌 뒤졌다고 복창해라.”

으르렁거린 벨로크가 땅을 박찼다. 그의 주먹이 얼굴에 와닿는 순간까지도. 검은 인간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팔짱을 낀 채, 거뭇한 형체를 움직여 눈웃음을 지었다.

“아아··· 둘이 그런 사이였나? 인간과 악마의 사랑이라··· 낭만적이-”

검은 인간의 머리통이 펑 터져나갔다. 하지만 녀석은 머리가 사라졌음에도 한쪽 팔을 뻗었다.

대악마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존재의 의지가 신성의 틈을 비집었다. 이윽고 그 힘의 파동에 간섭해 벨로크의 몸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또 뭐야?

“···”

검은 인간에게는 그 잠깐의 틈이면 충분했다. 그는 남은 손과 다리로 벨로크의 복부와 얼굴을 후려쳤다. 그리고 날아가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일순 하늘이 요란하게 번쩍였다. 마력으로 이글거리는 검은 벼락이 쉴 틈 없이 떨어졌다. 폐허가 된 신전을 잿더미로 만들 만큼 전율적인 위력이었다.

“흠. 너의 목을 잘라. 네 애인에게 보여준 후. 울부짖는 모습을 보며 따먹으려 했건만, 이거 너무 쉽군. 이래서야 형체조차 안 남았겠어.”

비릿한 웃음을 흘리던 검은 인간이 입을 다물었다. 흩날리는 재와 흙더미 위로. 전사가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칼은 잔뜩 풀어헤쳐져 바람에 휘날렸다. 갑주 역시 사라진 채 맨몸뚱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광채 아래 꿈틀거리는 근육은 더 없이 야성적으로 빛났다. 반면에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은 냉정하면서도 침착했다.

벨로크는 생각했다.

신의 부산물마저 제힘으로 받아들인 저 괴물은 대악마보다 한층 더 순도 높은 마력을 다룬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몸에 흘려 넣어 제동을 거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으며, 빌려 쓰는 힘이자 아직 신성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생겨난 약점이었다.

이것은 시간과 경험이 해결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저 괴물이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벨로크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시스템 창이 반발하든 말든, 지금껏 모아왔던 신성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노르드가 가진 힘, 그가 지금껏 괴물들을 죽이며, 이 세상을 유랑하며 쌓아온 격,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그의 주변으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그 반동에 의해 속은 진탕되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용솟음치는 이 힘은 그 고통마저 감내하기에 충분했다. 벨로크는 한 발작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주변의 대지가 원을 그리며 갈라졌다. 검은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이, 이 무슨 잠재력이란 말인가··· 아무리 고대신의 사자라고 한들. 인간의 육체로는 저 업을 다 감당할 수가···”

중얼거리던 검은 인간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벨로크는 놈의 복부에 꽂아 넣은 주먹을 그대로 올려 녀석의 턱 역시 후려쳤다.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하늘이 울렸다. 녀석은 상체와 얼굴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덜렁거리는 팔로 그를 붙들었다. 다시금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여 신성을 흐트려 놓을 생각이었다.

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전사의 몸 내부는 활화산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맹렬히 팽창하는 이 열기는 악마의 마력을 철저히 거부했다. 가진 재주가 통하지 않자 남은 것은 육체의 대화뿐이었다.

“끄어어어!”

쿵쿵. 지뢰가 터지듯 요란한 소음과 함께 연타가 이어졌다. 그의 왼 주먹과 검을 쥔 오른 주먹이 무자비한 사신처럼 떨어졌다. 아가레스였던 존재는 신체를 재생하는 즉시. 다시 왼뺨이 떨어져 나갔다. 복부가 펑 터져나갔다. 그의 주먹을 막기 위해 들어 올렸던 양손 또한 산산이 분해되어버렸다.

녀석의 신체는 지금도 꾸물거리며 그 형태를 재생시켰으나. 아까 전보다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이번에는 악마의 마력 대신. 고대신의 신성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 것이다. 끝도 없이 솟아오르는 검은 힘을 흩어버리는, 명백한 죽음의 의지였다.

위기감을 느낀 다시 태어난 존재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벨로크 주변에 시커먼 막이 생겨났다. 이것은 그의 기도를 틀어막아 숨통을 조이고 육체를 억압하고자 했다. 소용없었다. 그가 팔을 휘젓자. 사악한 주문은 모래성처럼 흩어졌다.

놈의 얼굴에 또다시 주먹이 틀어박혔다. 검은 인간은 마력을 먹물처럼 흘리다가 의지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벨로크의 눈앞에 어떠한 광경이 떠올랐다. 회색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고있는 자신의 모습. 이 세계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이 맞이했을 미래들이었다.

-오빠? 무슨 생각해?

검은 생머리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며 팔짱을 껴왔다. 눈웃음 짓는 그 모습은 자신의 이상형을 닮아있었다. 가만히 이를 보고 있던 나는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윽고 가녀린 그 목을 야만스레 움켜쥐었다.

“커어억.”

그러자 크레바스가 깨지듯 환상이 사라지고, 배경은 다시 달밤 아래 폐허 신전으로 돌아왔다. 머리의 반이 날아가 점액질의 단면을 내보이는 괴물이 거기 있었다. 벨로크는 놈의 목을 틀어쥔 채, 비틀어진 웃음을 지었다.

“연출이 이렇게 싸구려틱해서야.”

그는 놈의 목을 쥔 채, 박치기를 날렸다. 머리가 펑 사라졌다. 잡혀있던 육체가 흐물거리며 녹아들었다.

“끄으으···”

검은 인간은 바위틈으로 몸을 숨기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아무런 전조도 없이. 벨로크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에 깔린 마력을 자신의 의지대로 점화시키는 것이었다. 벨로크는 검은 화염에 휩싸이고, 벼락을 얻어맞아 몸에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주변에 뭉게뭉게 깔린 안개는 이제 왕성 전체를 뒤덮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울리는 것은 인간의 비명이 아니라. 쇠 긁는 소음이었다.

그는 녀석이 땅으로 숨으면 깍지 낀 주먹으로 대지를 후려쳐 지면 자체를 파괴시켰다. 하늘로 날아오른다 싶으면 그 발목을 잡아 끌어내린 후. 역시나 후려쳤다.

검은 먹물이 퍽 튀고, 요란하게 번개가 쳤다. 흩날리는 돌조각이 기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벨로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감각을 끌어올리며 다시금 느려진 세상 속에서 움직였다.

그의 몸이 쉴 틈 없이 잔상을 피워내며 나타났다. 사악한 주문과 마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저 괴물의 본질은 사술가였다.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 주문마저 벨로크의 의지와 신성에 가로막혀 통하지 않았으니. 그저 몸 안의 마력이 흩어질 때까지 얻어맞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놈의 재생력은 그 한계를 드러낼 것이고, 승자는 벨로크가 될 것이었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요란한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난 것이다.

“왕국을 위해!”

“사악한 악마를 타도해야 한다!”

엘가르를 위시로 한 친위대원들이었다. 두 사람의 격전은 요란하고 강렬했지만, 범인의 눈에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게다가 왕국을 지키기 위한 의무감으로 눈을 불태우고 있는 요정들은 제 목숨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죽어가는 혼돈의 악마에게 기회가 되었다.

“아가레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네놈과의 악연을 끝내겠다!”

손을 휘저어 연기를 날린 엘가르가 주문을 외웠다. 그의 눈과 코, 입에서 쉴 틈 없이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곧 몸 전체에서 솟아오르는 서리에 흘러내리는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의지가 강렬한 주문이 되어 의식 밖으로 튀어나왔다. 일전 벨로크에게 날렸던 운석소환보다 더 강력한, 자신의 몸과 영혼을 매개체로 영원히 녹지 않는 빙하를 만들어내는 비전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용해 저 괴물을 다시금 봉인할 생각이었다. 옆에 저 전사 놈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신의 이름으로!”

“으아아!”

요하네스와 카타리나를 위시로 한 친위대원들 또한 제 무기를 꼬나쥐며 달려들었다. 벨로크에게 묵사발이 나고 있던 존재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하지만 덕분에 살았군.”

그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요정들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이윽고 들고 있던 칼과 창으로 서로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날렸다. 엘가르의 주문 역시 취소되었고, 카타리나는 병사에게 휘두르려는 칼의 궤도를 겨우 바꿔 제 복부를 찔렀다.

“크으윽. 사악한 어둠은 여신의 이름 하에 사그라지리라!”

요하네스가 검을 땅에 박으며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이 광채를 발하며 그 힘을 지상으로 쏘아냈다.

동족상잔을 저지르던 요정들은 그 빛을 받고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수십의 시체와 피, 영혼이 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하하하! 네놈들은 끝까지 오만하구나! 전사여! 네놈의 패배요인은 저들을 배제하지 않은 것이다! 전장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혼탁한 흙탕물과 같지. 발밑의 나뭇가지 하나. 아주 작은 가능성조차 치명적인 비수가 된다!”

벨로크의 십자검에 의해 심장을 찔린 놈이 제 형체를 바꿨다. 수십 마리의 박쥐가 되어 그의 손에서 벗어난 놈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이윽고 양팔을 벌리며 주문을 외우자 놈의 주변으로 죽은 요정들의 피와 살점, 영혼들이 자석처럼 끌려갔다.

“정의감과 명예, 의무감에 취한 요정들의 영혼은 훌륭한 자양분이지.”

놈의 신체는 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녹아내리고 있던 존재의 신체가 다시금 그 형태를 되찾았다. 맨들맨들한 얼굴에는 뾰족한 귀와 붉은 외눈이 떠올랐다. 놈은 달려드는 벨로크를 보며 양손을 모았다.

신목에서 흡수한 힘. 본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힘. 요정들의 생혈에서 뽑아낸 힘. 이 세 가지의 혼탁한 기운이 모여 한계까지 압축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쉴 틈 없이 회전하는 검은 원반이 되어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라져라-!”

노인처럼 쭈그러든 검은 인간이 벼락처럼 소리치며 양손을 뻗었다. 어마어마한 마력의 폭우가 벨로크를 향해서 쏘아져 왔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무로 뒤바꾸며 그에게 날아들었다. 타락용의 미몽도, 불의 거인의 불꽃도 저 원반 앞에서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다.

벨로크가 보기에 저것은 블랙홀이었다. 그가 달려가는 저 순간에도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으니까.

등골이 서늘하고, 오감이 경고를 울렸다. 지금껏 그의 목숨을 수도 없이 구해준 직감 역시 속삭였다. 아무리 옛 신의 가호를 두르고 있더라도 저것에 직격당한다면 무사하지 못한다. 피한다면? 수도 전체가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격전을 치를 수록 성장하는 것은 녀석만이 아니었다. 벨로크 역시도 성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신성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정제되지 못한 힘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까? 격렬한 전투 와중. 그 찰나의 순간에도 법칙을 뒤흔들 수 있다면?

그의 동공에 시커먼 구체가 반사되었다. 그 파괴적인 기운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벨로크는 저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사라져라.”

일순. 고요한 침묵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어마어마한 증오와 분노를 담고 있던 마력 덩어리가 꿈에서 깨듯 소멸했다.

“말도 안··· 저 힘은··· 저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 아무런 전조 없이··· 그 찰나의 순간에 저런···”

검은 인간이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은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을 부정당한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것이 눈앞까지 다가온 벨로크와 그의 칼날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달빛 아래에 선 전사는 피 묻은 양손으로 십자검을 붙잡았다.

힘줄이 비죽 샘솟고, 그의 의지에 화답한 신성이 망가진 칼날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그 빛덩이들은 시리도록 차가운 칼날을 하나 만들어냈다.

“자, 잠깐···!”

늘 그래왔듯이. 벨로크는 듣지 않았다. 그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십자검을 내려쳤다. 새하얀 궤적이 번뜩였다. 한계를 뛰어넘은 대악마는 영혼마저 산산이 조각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