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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80화 (180/222)

180

익숙한 일

“빠져나온 모양이군.”

벨로크는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왕의 천병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식당 입구를 기점으로 이 방 자체를 넓게 포위하고 있었다. 일행을 저지하기 위해 창날을 방벽처럼 앞세웠으며, 그 사이로 검과 석궁을 든 병사들이 자리했다. 뒤편에는 마법사와 정령사가 각기 주문과 사역마를 준비 중이었다.

철통같은 포위였지만 발을 디딜 곳은 많았다.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아니면 지휘 체계에 혼선이 있었던 건지. 일행끼리 등을 맞대고 사방을 경계할 정도의 틈은 나왔던 것이다.

“벨로크!”

소리친 이자벨이 요하네스의 멱살을 잡은 채 날아왔다. 병사들은 쓰러진 수호기사와 왕, 성역에 나타난 악마를 보고 동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혼란스럽게 하는 진실은 따로 있었다.

“후우, 후우.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 어수선한 틈을 타. 화린 또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입술이 터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복부에도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고, 몸 전체에도 옅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카타리나와의 격전이 꽤나 치열했던 모양이다.

“아으··· 죄송해요. 저 여자 생각보다 강해서···”

“고생했소.”

화린은 벨로크로부터 포션을 받아 한 개는 마시고, 한 개는 온몸에 발랐다. 맞은편에 있던 카타리나 또한 엉망이 된 갑주를 걸친 채, 사제의 치유 기도를 받고 있었다.

“하아, 하아. 무식한 년···”

카타리나는 피멍이 든 얼굴로 화린을 노려보다가, 쓰러진 왕과 성기사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엘가르님! 요하네스! 어찌 이런···”

당황은 잠시였다. 숙련된 기사이자 지휘관인 그녀는 곧 감정을 추스르고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포위망을 더 견고히 하라! 하지만 상대를 섣불리 자극해서는 안 된다.”

명령을 내리던 그녀가 당황했다. 평소라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을 친위대가 어물쩡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시선에도 저 폭도무리들에 대한 분노 대신 의아함과 혼란이 가득 담겨있었다.

“다들 대체 무얼···”

카타리나가 재차 소리치려고 할 때. 피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벨로크에게 짐짝처럼 들려있던 미남자. 엘가르가 내는 소리였다.

“흐흐흐, 흐하하하!”

만신창이가 된 그는 인질로 잡혀있는 상태에서도 유쾌하게 웃었는데. 그것은 그가 저 인간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가 확고한 이상. 그리고 이 꼴이 된 이상. 저들의 목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건 능력이 안 되자 권력을 이용해 상대를 핍박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받은 충격은 컸다. 늘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관조하던 절대자가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친위대는 뭣들 하는가? 이들은 감히 왕성을 넘나들고 성역에 침범했다. 거기다가 왕과 수호 기사들 역시 시해하려고 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죄를 저지른 간악무도한 놈들이지! 나는 상관하지 말고, 어서 이들을 징벌하라!”

왕은 자기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친위대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저 인간 놈들을 엿 먹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꼭 자기 이득만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요정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와 친위대가 여기서 죽는다면 도화선에 불은 붙을 것이고, 성난 요정들은 인간들의 땅을 침범할 것이다. 그것은 곧 대악마와 융합한 신목으로부터 대다수의 요정들은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멈출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하느니, 창칼과 몸을 맞대는 것이 나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어명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어물쩡거렸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이라면 제 목숨마저 내놓던 전사들이 취하기에는 정말이지 이상한 행동이었다. 엘가르는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충성심이 도를 지나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소리쳤다.

“다들 뭣들 하느냐! 난 상관하지 말고 어서 이놈들을 징벌하래도! 명령이다!”

역시나 병사들은 주춤했다. 그제서야 엘가르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방금 전의 그 울림. 정말인가?

-너도 같이 들었잖아? 분명 폐하의 목소리였어.

-저 인간 놈들의 사술은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세계수의 밑동을 봤었잖아? 썩어가고 있었어···

이게 무슨 소리야? 여유를 되찾았던 엘가르의 표정이 굳어갔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벨로크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안개에 가로막힌 듯. 생각을 읽을 수 없었던 벨로크의 마음을 잠깐이나마 엿 볼 수 있었다. 계획대로군.

“계획이라고···? 그게 무슨···”

엘가르가 당황하고 요하네스가 피를 토했다. 이자벨과 화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카타리나가 다시 병사들을 재촉했다. 친위대들은 여전히 미적거렸다. 그 혼란스러운 순간.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다른 요정들보다 무장 상태가 좋고, 덩치도 큰 요정이었다. 그를 본 카타리나가 말했다.

“친위대장!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친위대장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번쩍거리는 철 투구를 벗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히나 그의 시선은 식당의 창문 너머. 시커멓게 변한 세계수의 밑동과 엘가르에게 오래 머물렀다.

“성지에 침범한 인간과 악마, 배반자, 그리고 사로잡힌 폐하까지. 내 수 백 년 동안. 이 땅을 지켜왔건만 이런 얼토당토 않는 일은 처음이군.”

“친위대장! 바른대로 설명하십시오! 당신과 지금 병사들이 취하는 행동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건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임과 동시에 왕가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반역이라···”

친위대장은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저희들은 여러 가지 위협으로부터 왕성과 왕가를 수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대체 왜···”

“그 전에 몇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경. 그리고 폐하.”

친위대장이 카타리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는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저희들이 아까 들은 폐하의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대악마의 영혼이 세계수에 봉인되어 있고, 이로 인해 역병이 생겨났으며, 이 모든 것이 폐하의 불찰로 인해 일어났다는 얘기를 저희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

절대 풀려나지 않아야 할, 이 방에서만 메아리쳤을 은밀한 비밀을 저들이 알고 있었다. 눈치로 봐서 병사들 역시 다 아는 듯했다. 내 목소리? 이제 엘가르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었다. 카타리나가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그, 그 무슨 망언이오! 저 폭도들이 퍼트린 헛소문을 믿는 것이오?”

“저도 헛소문이라고 믿고 싶군요. 하지만 저기를 보십시오.”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의 친위대장이 창문을 가리켰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미세한 틈 사이로 세계수의 썩어버린 밑동이 보였다. 그 위로 마법진이 겹겹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신전 건물의 특성상. 이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면 외부에서는 확인하기 힘든 구조였다.

“썩어가는 세계수의 밑둥. 갑작스레 연락이 끊긴 몇몇 정령들. 그 일이 있으신 후부터. 매일 밤 성역으로 향하시는 폐하까지.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친위대장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병사들이 카타리나에게도 창날을 들이댔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건 저의 정치적인 견해와는 무관한, 순전히 이 나라의 평화를 지켜야 할 군인으로서, 국민 중 하나로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만 그랬지. 사실상 협박이었다. 친위대장이 정말 저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평소 왕과 수호 기사들에게 쌓인 불만이 이를 기점으로 터져나간 걸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이 재수 없는 귀쟁이 놈의 업보였다.

“말하지 않았나? 입 조심하라고. 잔재주는 너만 쓸 줄 아는 게 아니거든.”

벨로크는 멱살 쥐고 있던 엘가르를 휙 던지며 웃었다. 엘가르는 멍한 얼굴로 쿠당탕 바닥을 굴렀다. 그것도 잠시. 이윽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외차원의 경계를 뚫었다고? 그것도 마법사가 아니라 전사가? 나도 모르게 은밀히? 너 인간. 아니, 인간인지조차 불분명한 자야. 네놈은 대체 누구지? 대체 누구냔 말이냐! 왜!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더러운 훼방질이야아!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고 있었거늘!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이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던 그는 종래에 가서 미친 사람처럼 악을 썼다. 그 어디에도 왕으로서의 품격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권력과 힘을 잃고 추하게 발버둥 치는 권력자의 말로가 있을 뿐이었다.

“뭐가 잘 풀려나가고 있었냐? 쌓이고 숨겨왔던 것들이 터져나간 것 뿐인데.”

명예, 자존심, 자국민들의 존경까지. 놈은 이제 가진 것을 다 잃었다.

“엘가르님···”

챙그랑. 칼을 떨군 카타리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고, 엘가르는 낄낄거렸다. 병사들의 눈동자는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넘어. 분노를 담고 있었다.

잠깐 그보다. 벨로크는 귀를 후비며 세계수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저거 곧 터질 것 같은데. 이 녀석의 멘탈이 나가서 그런가?

벨로크가 슬쩍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 하자. 친위대장이 칼을 들이댔다.

“움직이지 마라. 정황이 이상하다고 한들. 네놈들이 왕궁을 침입하고 어지럽힌 죄는··· 어억?”

친위대장이 비틀거렸다. 이는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별 게 없었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국 최고의 전사들조차 중심을 다잡지 못할 정도로.

“커어억.”

그 때. 엘가르가 울컥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세계수 주변으로 쳐져 있던 마법진들이 사라졌다. 오싹. 등골이 서늘해진 것도 잠시. 곧이어 살을 에는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끼-아-아아악!

“설마···”

“봉인진이 사라지자 녀석이 날뛰기 시작하는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 어서 막아야 해!”

이자벨이 벨로크와 화린을 양팔에 껴안았다. 꼬리는 에밀의 허리를 휘감았다.

“자, 잠깐! 난 왜!”

네 사람은 식당의 창문을 깨며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달빛 아래 바라본 나무의 모습은 기괴했다. 푸르른 잎새는 다 빠져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었고, 밑동과 가지 위에는 새하얀 알 같은 것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그 변화는 잠깐 사이에 일어났지만, 지금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종래에는 뭐가 될지 짐작도 안 됐다.

[마침내! 마침내! 풀려났다! 하하하! 엘가르! 그리고 이 비루한 귀쟁이 놈들아! 오만에 대한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소리친 거목이 가지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러자 주렁주렁 달려있던 알들이 궁전뿐만 아니라, 아틸란타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윽고 그 알들은 사악하며 끔찍한 생명체들을 잉태했다.

키-이이이

피부가 다 벗겨진 거인, 머리에 뿔 달린 거대한 해골, 고양이의 머리에 커다란 거미 몸통을 달고 있는 녀석까지. 각양각색의 마물들이 수도에 역병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녀석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

지상 생명체들에 대한 끝 모를 증오와 분노, 광기가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적응을 마친 괴물들은 곧 제 손톱과 이빨을 휘두르며 지상 종족들을 무참히 살해하기 시작했다.

“끄윽!”

“이, 이게 무슨··· 컥.”

동화 속 주인공처럼 이쁘장한 요정의 머리통들이 하늘을 날았다. 배가 갈라져 뜨뜻한 내장을 쏟아내기도 했고, 무슨 그림처럼 벽에 박제되기도 했다. 엘가르가 우려했던 지옥도가 여기에 펼쳐졌다.

“아가레스! 그 괴물이 부활한 것인가?! 신목을 집어삼키고 한층 더 끔찍한 존재로 되살아난 것이야!?”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소란에 카타리나가 소리쳤다. 이윽고 그녀를 포함한 친위 대원들은 다급히 신전 밖으로 나가야 했다. 세계수를 둘러싸고 있던 건물이 균열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으니까.

“아, 악마···”

“저 정도의 숫자라니···”

밖으로 나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물 샐 틈 없이 번뜩이고 있는 붉은 눈동자들이었다. 어찌나 깊고 빼곡한지. 왕성의 정원을 가득 채우고도 그 수가 남아있었다. 몇몇은 건물 외벽에도 들러붙어 요정들의 머리통으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키키키키

그 어수선한 혼란의 중심에 거대한 신목이 있었다. 모습은 아까 전 보다 더 끔찍하게 변했다.

밑동이 쩍 갈라지며 나타난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희번뜩 거리고, 굵디굵은 뿌리는 촉수처럼 흐늘거렸다. 위에서는 끊임없이 괴물들을 잉태했다.

저것은 이제 요정 왕국의 긍지이자 명예. 신의 부산물이라 칭할 수가 없었다. 그저 꿈에 나올 까봐 두려운 악몽일 뿐이었다.

“셀레네여···”

한 병사가 자신도 모르게 신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달빛은 그들과 악마들을 공평히 비추기만 할 뿐. 무슨 힘을 내려주거나 저들을 쫓아내 주지는 않았다. 그저 느릿하게 다가오는 악마의 손발톱이 더 잘 보이게 해주었다. 제 배를 꿰뚫은 거대한 뿌리를 무슨 예술 작품처럼 승화시켰다.

“커어억.”

피를 뿜은 병사가 쩍 갈라진 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비명은 점차 멀어지고, 그 자리를 뼈 부서지는 소리가 가득 채웠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신목은 괴기스러운 고성을 흘렸다. 악마들은 피의 축제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날렸다.

오직 절망만이 가득한 그 혼탁한 순간.

하늘에서 시커먼 인영 하나가 떨어졌다.

쿠웅. 아래에 있던 악마들의 몸체가 짓이겨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소용돌이처럼 갈려 나갔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물과 살점을 뒤로한 채, 벨로크가 어깨를 휙휙 돌렸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이곳까지 기어들어 왔냐.”

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퍽 익숙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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