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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79화 (17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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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밀

시뻘건 화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이글거렸다. 극한까지 열기를 머금은 암석들이 뻥뻥 터져나가며 이 요란한 상황에 화음을 더했다. 칼부림, 의식 세계를 빠져나온 주문의 번뜩임. 순수한 힘과 세상을 속이려 드는 정신력의 싸움이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

“커어억! 으으으··· 떨어, 져라아!”

소리친 엘가르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흙벽이 솟아났다. 높고 두터운 것이 무슨 요새처럼 보였다. 소용없었다. 벨로크는 무심한 표정으로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쿵쿵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견고한 성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 안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옷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요정 하나가 보였다.

“허억, 허억···”

도저히 아까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분노로 이글거리며 기세를 잃지 않았는데. 그게 공상 속 캐릭터처럼 저 녀석에게 대단한 힘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

벨로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검을 꾸욱 쥐며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거기서 엘가르의 분노는 점점 공포로 바뀌어 갔다. 화염을 등에 업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전사의 모습은 무슨 사신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엘가르는 가진 힘을 다해서 저항하고자 했다. 자신이 평생토록 쌓아 올린 주문, 그것의 활용법, 그리고 자신보다 더 빠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들을 상대로 하는 대처법. 이 모든 것을 다 끌어내고자 했다.

Sĕquor!"

엘가르의 오른손에서 빛이 번쩍였다. 다음 순간. 벨로크의 그림자가 불쑥 솟아오르더니 어떠한 형태를 갖췄다. 이윽고 전사의 감각에 날붙이의 흉흉함이 느껴졌다.

그 기괴함에 그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칼날은 궤적을 그리며 그를 추적해왔다. 그래서 벨로크는 검을 휘둘렀다. 맑은 검명이 울렸다. 검 손잡이와 그 위의 십자막이, 칼날 사이로 퍽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날카로운 콧대에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목 언저리까지 오는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망가진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그림자에서 일어났기 때문일까? 색채 없이 없이 그저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게 무슨 흑백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였다. 그 배우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젠 또 분신술이냐?”

이쯤 되니 저놈이 못 쓰는 주문이 뭘까? 라는 생각이 든다. 벨로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요정왕은 웃지 않고, 맞은편의 그림자 전사가 대신 웃었다. 이윽고 그림자 전사는 양다리를 비스듬히 벌리고는 쥐고 있는 검 역시 느슨하게 내렸다.

저건 한 발 크게 내디뎌 상대의 얼굴을 갑작스레 찌를 수도 있었고,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상대의 가슴을 찌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엉망이 된 갑주로는 막기 힘든, 꽤나 위협적인 자세였다.

“누가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배웠군.”

벨로크가 혀를 내두른 순간. 그림자 전사가 쇄도해왔다. 몸이 시커메서 그런가? 모습이 잘 안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인간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흔들림 없이 찍어오는 칼날도 묵직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검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상체가 쪼개졌다.

“다른 건?”

놈의 칼을 흘리는 즉시. 몸을 회전시켜 가볍게 토막 내버린 벨로크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가 말하는 순간. 엘가르의 다음 주문이 작렬했다.

이번에는 하체가 꼬리처럼 되어있고, 손목과 머리에는 황금으로 된 링을 쓴 웬 램프의 요정처럼 생긴 녀석들이 튀어나왔다. 각각 초록색과 붉은색을 띠는 게 바람과 불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녀석들은 팔짱을 턱 끼며 거만하게 말했다.

“기어이 우리들을 불러냈구나. 젊은 요정아. 오랜 맹약에 따라 기꺼이 너를 도와주겠다. 이제 남은 소원은 한 번. 무엇을 해야··· 어억!”

지니를 닮은 녀석들 역시 반으로 쪼개졌다. 벨로크는 흐릿한 연기를 뿜어내며 사라지는 놈들을 보다가 검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무릎 꿇고 있는 요정이 있었다.

“다른 건?”

“허억, 허억. 허억.”

엘가르의 차가운 눈동자에는 이제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공포, 당황, 두려움. 같은 마이너스적 감정들의 집합이었다. 하지만 벨로크의 눈은 처음과 같았다. 그저 덤덤하고 무심했다. 그리고 그것은 요정왕의 자존심을 와락 뭉개버렸다.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대체 네놈은 뭐냔 말이냐! 그 어떠한 인간! 요정! 난쟁이! 의태 한 용이나 악마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난··· 이렇게 초월적인 힘과 의지를 발휘할 수는 없어!”

그래, 그런 소리들 많이 들었지. 벨로크가 뭐라 답하기도 전. 침까지 튀겨가며 소리친 엘가르가 자신의 뺨을 짝 쳤다. 이윽고 괴성을 지르듯 다다다 주문을 외워댔는데. 잠시 후. 그의 몸에서 흐릿한 잔상이 피어오르며, 그와 똑 닮은 분신들 여섯 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분신들 역시 제각각 주문을 외우며 양손에 파괴적인 원소들을 만들어냈다.

“으아아아아!”

이제는 말 대신 괴성을 지르는 일곱 요정이 양손을 뻗었다. 정제되지 못한 원초적인 힘이 하나로 모이며 공명했다. 이윽고 엉망이 된 공간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로 강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

후끈한 공기가 사방에서 휘몰아치고, 우레소리가 대지를 요동시켰다. 흙먼지와 불티, 깨져나간 공간이 바코드처럼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일곱 요정은 나란히 거친 숨을 내뱉었다. 얼굴 표정 또한 똑같았다. 불안감, 경계심, 두려움 등이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가시자 이는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하, 하하··· 미쳐버리겠군. 내가 지금 악몽을 꾸는 건가? 마침내 아가레스 그놈의 사술에 당한 것이야?”

일곱 요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벨로크는 반토막 난 검을 빙그르 돌리며 여러 번 휘둘렀다. 빛이 번뜩이고, 여섯 명의 엘가르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파충류의 눈동자를 띄우고 있는 한 놈뿐이었다. 오직 저놈만이 자신의 검격을 피했다. 아까 전처럼.

“이제야 좀 알 것 같군. 너. 그 눈까리를 이용해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거냐?”

벨로크는 바닥을 구르는 지배자를 보면서 말했다. 엘가르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너 같은 새끼한테 알려줄 진실은 없다. 협조 따위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죽여라.”

그래, 그게 무게 잡고 있던 네 본래 성격이다. 이거지? 벨로크가 현대인의 상상력이 결합된 고문 실력을 보여줘야 하나 생각할 때.

“엘가르의 저 오른쪽 눈은 용인의 눈이라 불리우는 물건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거나 머지않은 미래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신비로운 보물이죠.”

뒤편에서 상황을 살피던 에밀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녀는 질린 얼굴이었지만, 침착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연달아서 목격 하다 보니 오히려 이에 적응한 것이다. 역시나 그랬군. 뭐 저런 눈까리가 다 있어?

“에밀! 이 더러운 배반자! 다른 장로들과 수도의 시민들이 네 행동을 용인할 것 같으냐!”

엘가르가 소리쳤다.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궁금증을 풀었다.

“물건? 자기 본래 눈이 아니라는 말인가?”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용의 산물이라고 알고 있어요. 이를테면 신의 가호 비슷한 거죠.”

“그러면 뽑아도 내가 못 쓰겠네?”

그 태연한 말투에 엘가르의 얼굴이 굳었다. 에밀은 저 고고한 왕이 저 꼴이 되었다는 것에 통쾌함을 느끼다가도,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뇌하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은 벨로크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그렇죠. 저주나 안 받으면 다행일걸요?”

“좋다 말았군.”

벨로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간의 주인이 큰 타격을 받아서인지. 이곳 역시 쿠르르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가고 있었다.

“에밀. 통로를 다시 열어라. 돌아가자.”

에밀은 벨로크의 시선을 피했다.

“저, 그게 두 사람이서 워낙 치열하게 싸우다 보니 이 공간의 좌표가 뒤틀려 버렸어요. 제 수준으로는 도저히···”

맹탕이 아니란 말은 취소였다. 이년은 진짜 쓸모가 없네. 벨로크는 에밀을 잠깐 바라보다가 엘가르를 쳐다봤다. 초록 머리의 요정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미소 짓고 있었다.

“하하하··· 저딴 년도 마법사라고 데리고 다니는 네 수준도 알만하구나. 그래, 칼질만 잘하지. 이런 쪽은 영 문외한이겠지.”

엘가르의 눈동자가 다시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어떠한 결단어린 시선이었다.

“네놈들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여기서 나와 함께 차원의 균열 속으로···”

“내가 마법사 놈들을 많이 족쳐봐서 아는 게 하나 있지.”

쪼그려 앉은 벨로크가 엘가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요정의 황금색 눈동자가 주변의 정보를 빨아들인 후. 이를 연산해 미래를 읽어내렸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몸을 움직여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피하고자 노력했다. 소용없었다. 벨로크의 궂은살 박힌 두툼한 손은 그가 인지한 것보다도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뺨을 후려쳤다.

쩌억.

“커억!”

피 섞인 이빨이 후두둑 떨어지고, 엘가르의 잘생긴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휘적거리는 요정왕의 멱살을 퍽 틀어잡았다.

“대부분은 주문들은 주문 세계의 주인을 죽이거나 빈사 상태까지 만들면 알아서 풀리더군.”

씨익 웃은 벨로크가 나머지 손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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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전은 거룩한 것이옵고, 그 길은 실로 외로우리라. 너. 스스로를 빛의 사자라고 칭하는 자야.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광명을 등지고 그분의 말씀을 져버린 이단자의 행보를 멈추게 하라.”

기도문인지 스스로에게 되뇌는 맹세인지. 중얼거린 요하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과 다리, 폐부에 들어찬 거친 숨을 몰아내며 정신을 다잡았다.

“후우, 후우.”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달빛이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을 비추었다. 그녀는 머리에 산양의 뿔 같은 것을 달고 있었다. 위아래로는 요정 양식의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꽉 막힌 그 갑옷도 여인의 육감적인 몸매를 가려주지는 못했다.

진득한 안광이 흐르는 눈동자는 요사스럽게 반짝였으며, 이는 그녀의 붉은 입술과 윤기 나는 머리칼, 시린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자 신에게 스스로를 바친 성기사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교리, 신앙, 왕에 대한 충성심 등. 그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팽개치고 저 여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녀의 발을 핥으며 신을 욕보이고 싶었다.

이를 보고 있던 여인이 웃었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돋보였다. 숨겨져 있던 열기가 더 밖으로 새어 나오는 듯했다.

“흐음··· 잘 버티네요? 역시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사제다워요. 자기 절제도 이 정도면 고문 수준인데?”

베시시 웃는 이자벨을 보며 요하네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허리춤의 단검으로 스스로의 허벅지를 찔렀다.

“이자벨. 너는 자랑스러운 요정 왕국의 신민이 아니었느냐? 엘가르님과 셀레네님께 모든 것을 바친, 그분들의 어린 양이 아니었느냔 말이다!”

“흐응?”

콧소리를 내는 이자벨을 보며 요하네스가 피 토하듯 말했다.

“아무리 악마의 저주를 받아 타락했다고 한들. 너 스스로의 영혼마저 놓아버린다면 너는 구원받을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 해도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야!”

자신을 회개시키고자 하는 성기사의 설교에 이자벨은 반박하거나 순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야 제 이름을 불러주시네요? 제가 병사로서 당신들을 떠받들 때는 아는 체조차 안 하시더니?”

요하네스는 저 사특한 눈에 저항하기 위해 성력을 끌어올렸다. 덕분에 그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저 신음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이자벨은 손에 들린 쌍날 검을 느릿하게 던졌다 받았다 했다.

“뭐, 이해는 해요. 왕의 수호 기사들은 아주 바쁘죠. 이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국정을 돌보는 왕을 수호하고, 보필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야 하니까··· 그래, 높으신 분들에게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법이죠. 하지만... 그게 당신들이 행한 일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못해요.”

요사스러운 빛을 흘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뒤바뀌었다. 분노였다.

“로엔, 칼, 크리스. 내 동료들을 포함한 수많은 요정들이 낯선 타지에서 죽어 나갔죠. 괴물, 악마, 혹은 정신 나간 인간들의 손에 말이죠. 하지만 그들의 죽음에는 명예가 있었고, 숭고한 가치가 있었어요. 역병으로 고통받는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그 진상을 알기 위해 제 한 몸 바쳤던 거니까! 하지만!”

이를 으득 깨문 그녀가 우레우스의 쌍날 검을 꾸욱 쥐었다.

“그 모든 것이 다 개짓거리였다니! 다 당신네들의 부도덕함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이었다니! 그렇다면 죽은 내 친구들! 동족들이 그간 해왔던 노력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건 그저 끔찍하고 허무한 개죽음일 뿐이었어!”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엘가르님을 말리지 못한 나의···”

“아가리 닥쳐! 네놈은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방관하고 외면한, 더러운 비겁자일 뿐이야! 그딴 것이 신앙심이고 그딴 것이 셀레네의 가르침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를 짓밟고 침을 뱉어주겠어!”

이자벨의 몸에서 시커먼 마력이 폭사했다. 그녀의 어깻죽지에서 피막 날개가 돋아났다. 엉덩이 부근에서는 채찍 같은 꼬리가 생겨났다. 완연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요하네스는 참담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손은 성호를 그었고, 입술은 기도문을 외웠다.

성기사의 머리 위로 광륜이 떠올랐다. 몸에서는 여신의 광채가 쉴 틈 없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은 위선자에게도 공평히 그 빛을 내려주었다.

그 찬연한 광채 아래. 악마와 성기사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땅을 박차며 서로를 향해 제 날붙이를 휘둘렀다.

스르릉.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폭발하듯 성검과 마검이 소리보다 빠르게 서로를 스쳐 갔다. 한발 늦게 천둥소리가 콰르릉 울려 퍼졌다.

“끄르륵···”

몇 발자국 걸어간 요하네스의 판갑에 실선이 생겨났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머리칼을 쓸어올린 이자벨은 쓰러진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윽고 검을 들어 올려 저 비루한 목을 쳐버리려 했다. 억울하게 죽어 나간 제 친구들의 넋을 위로하려 했다.

“···하아.”

하지만 이자벨은 끝끝내 검을 거두었다. 여기서 이 자를 죽였다가는 일이 더 꼬일 테니까. 이제 어떻게 하지? 바깥에 도사리고 있을 병사들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때. 콰장창 소리를 내며 이 공간 자체가 뒤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녀가 본 것은 자신들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과 얼굴이 떡이 된 엘가르, 그의 멱살을 쥐고 있는 벨로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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