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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78화 (17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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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밀

은촛대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춤을 추듯 살랑거렸다. 새하얀 식탁보 위로 흐릿한 잔상이 지나가고, 세 요정의 모습이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그들의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굳어서 석상이 된 것이 아니라. 반응할 틈도 없이,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은 속도로 벨로크가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고 파괴적인 그의 발걸음을 막은 것은 기묘한 감각의 왜곡이었다. 그는 발끝에서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자마자 몸을 휙 젖히며 땅을 박찼다.

콰앙. 그와 엘가르 사이의 식탁이 불꽃을 뿜으며 폭발했다. 벨로크는 그 잠깐 사이. 시선을 내려 폭발의 원흉을 알아챌 수 있었다. 룬 문자가 새겨진 마법진이었다.

이윽고 공중에 떠오른 벨로크를 향해 엘가르가 한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작렬했다. 지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양팔로 급소를 가린 채, 나뒹굴었다. 아니, 그럴 뻔했다. 뒤따라오던 이자벨이 그를 받쳐주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괜찮아요?”

신성의 부작용으로 인해 속은 들끓고 있었고, 충격파를 막아낸 손은 저릿저릿했다. 저번에 본 그 리치놈보다 강력한 것 같았다.

“조심해라. 저 녀석. 이 공간 자체에 온갖 함정들을 다 깔아둔 모양이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이곳으로 불렀군.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이거지? 이래서 마법사란 것들은 먼저 머리통부터 날려야 하는 건데. 두 사람이 주춤한 그 잠깐의 틈으로 공기가 일렁거리며 날카롭게 쇄도했다. 카타리나가 룬검을 휘두른 것이다.

“흡!”

하지만 뒤따라온 화린이 반쯤 불타고 쓰러진 식탁을 휙 들어 올렸다. 어찌나 튼튼했는지. 보이지 않는 칼날은 애꿎은 나무 파편만 일으키며 가로막히고 말았다. 쿵. 와지끈. 같은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 사이로 엘가르의 차가운 목소리 역시 들려왔다.

“상대는 빠르다. 하지만 단순하며, 그렇기에 직관적이지. 용을 잡는다고 생각해라. 방어 위주로 간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만들어낸 세 개의 음영 뒤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의 여신을 향한 기도문 역시 들려왔다.

“나를 오롯이 비추는 여신이시여.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옵고, 그들의 피로 내 잔을 넘치게 하소서.”

여신의 광채. 이자벨이 보기에 역겨운 빛이 세 요정을 감쌌다. 그들의 근육과 피부, 안구 등 신체의 모든 요소가 강력한 활력을 얻었다. 검사들은 검을 더 빨리 휘두를 수 있게 되었고, 마법사는 주문을 더 빨리 외울 수 있게 되었다.

곧 축복의 기도에 힘입은 주문이 위상을 발휘했다. 마법진 다섯 개가 바닥에 생기더니 타오르던 불꽃을 흡수했다. 이윽고 불길이 확 일어나며 어떠한 형상을 갖췄다.

끄-아아아아!

나타난 것은 불꽃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방패, 검을 든 화염기사들이었다. 덩치는 3미터가 넘어갔으며 바닥을 태우는 열기로 보아 닿기만 해도 위험해 보였다.

거 별의별 주문이 다 있네. 화염기사들은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중앙에 서 있는 엘가르와 그 옆으로 선 카타리나와 요하네스의 사각을 보완하듯 서 있을 뿐이었다. 아까 전에 말했던 것처럼 방어적으로, 천천히 일행의 힘을 빼놓을 속셈인 것 같았다.

“마법사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되요!”

의도를 알아차린 화린의 땅을 박찼다. 벨로크 역시 충격을 추스르고 달려들었다. 엘가르가 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샛노란 전격이 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벼락들은 곧 옆에서 쇄도해온 사악한 힘과 맞부딪히며 공멸했는데. 이자벨이 쏘아낸 마력탄 때문이었다.

“너! 사악한 악마야! 셀레네께서 너의 그 타락한 영혼을 심판하리라!”

이제는 그냥 되는대로 지껄인 요하네스가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기도문을 외우자 그의 머리 위에서 번쩍거리는 광륜이 떠올랐다. 달빛을 형상화한 이 빛은 지상 생명체들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피가 흐르는 악마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끄으으!”

그녀가 주춤하자. 엘가르가 다시 손을 뻗었다. 예의 그 벼락이 날아들었다. 옆에서는 카타리나의 룬검이, 다른 쪽에서는 화염 기사들이 이글거리는 화염검을 휘둘러왔다. 그 파괴적인 맹공 앞에서도 벨로크는 침착했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내디딘 발은 지면을 거칠게 요동시켰다.

무에 있어서 호흡의 조절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화린은 지금 벨로크가 내뱉은 저 숨이, 괴물 수백 마리를 도살해도 호흡 한 번 흐트리지 않았던 전사가 저런 행동을 취한다는 것에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예견했다. 잘못하면 휘말린다.

그녀는 한층 더 강해진 자신의 비전을 온몸에 둘렀다. 옷 위로 드러난 근육이 이제는 강철을 넘어, 무슨 전설상의 금속처럼 단단해졌다. 이윽고 화린은 이 단련의 성과를 등에 업은 채, 냅다 몸을 날렸다. 카타리나를 향해서였다.

“···!”

보이지 않는 칼날 속으로 몸을 날리는 화린의 저돌성, 혹은 무식함에 카타리나는 동요했다. 하지만 곧 그 뒤편에서 일어난 상황에 더 당황했다.

몰아치는 열기의 파도 속. 검은 머리칼의 인간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공기가 찢겨나가고, 빛이 번뜩였다. 화염기사 다섯이 일거에 반토막이 났다. 물론 벼락은 애꿎은 바닥을 검게 태웠을 뿐이었다. 그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엘가르니··· 컥!”

카타리나의 고개가 퍽 돌아갔다. 쓰고 있던 풀헬름이 탱그렁 날아가고, 붉은 머리 요정의 이쁘장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골을 흔드는 고통에도 검을 놓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며 화린을 찌를려고 했다. 하지만 화린은 평생토록 맨손 무투를 수행한, 접근전의 달인이었다. 그녀는 복부를 찔러오는 룬검을 부드럽게 피하고는, 피가 흐르는 양손으로 카타리나의 얼굴과 턱을 후려쳤다.

“끄윽!”

이윽고 아예 카타리나의 허리를 잡아 내팽개친 후. 냅다 바닥을 굴렀다. 쿠르르르. 먼지를 뒤집어쓴 두 사람이 난장판이 된 식당 구석으로 향했다. 다른 쪽에서는 성기사의 칼날과 악마의 칼날이 맞부딪히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현장의 중심. 벨로크는 엘가르의 미간에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요정왕의 오른 눈이 파충류의 빛을 띠었다. 이윽고 그의 공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요술쟁이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예였다. 이건 또 뭐야?

벨로크는 검을 찔러넣는 그 순간까지도 엘가르의 시선을 살피고 있었다. 녀석의 두 동공은 여전히 자신의 칼날의 속도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마치 그것이 어디로 날아올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왜 그러지? 마법사인 내가 네 칼을 피해냈다는 것이 놀라운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엘가르가 한쪽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뻥 폭발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하체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그것을 버텨냈다. 이윽고 엘가르의 튀어나온 손을 잘라버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정말이지 괴물 같은 육체로군.”

엘가르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검격을 읽었다는 듯 이미 손을 접은 상태로 주문을 외웠다. 벨로크가 주먹을 뻗는 것보다 더 빨랐다. 그러자 벨로크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환상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천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자신 주변의 중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그는 날아가는 와중에도 웃었다. 정말이지 듣도보도 못한 마법들이 다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생각나는 것도 있었다.

저놈은 자신을 분명 승천자 아낙스의 제자라고 소개했었지. 카라가 가지고 있던 마법서의 원주인 이름이 딱 그랬던 것 같은데.

“넌 참 재주가 많은 녀석이로군. 갈드라보크에도 그 마법들이 다 실려있나?”

“···!”

엘가르는 주문을 외우면서도 눈을 부릅떴다. 놀란 모양이었다. 딱히 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벨로크는 몸을 거스르는 중력을 무시한 채, 천장을 박차며 아래로 쇄도했다. 그의 칼날과 요정왕의 보호막이 맞부딪쳤다. 반짝이는 불티가 생겨났다. 일반적인 보호막은 아니었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생긴 수십 겹의 역장이었다.

끼리리릭

이 신비로운 비전은 마치 태엽처럼 돌아가며 벨로크의 근력과 되다만 성검의 예기를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완벽히 막아낼 순 없었는지. 역장이 연쇄적으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틈을 타. 요정왕은 다른 주문을 외울 수 있었다.

“명한다. 움직여라.”

식당에 새겨놓았던 마법진들이 번쩍였다. 이윽고 그 빛은 벨로크와 엘가르 두 사람을 빈틈없이 감쌌는데. 그는 퍽 익숙하면서도 엿 같은 감각을 다시금 느껴야 했다.

오감이 흔들리고, 눈앞으로 무지개가 둥둥 떠다니는, 공간 이동의 전조. 시발.

벨로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새하얗게 탈색된 공간이 그를 반겼다.

“이건 또 뭐야?”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린다. 이 기묘한 공간은 그 색채만큼이나 높낮이의 구분도 불가능했다. 그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엘가르를 보고, 자신의 위치를 대략적이나마 유추할 뿐이었다.

“에밀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이곳은 모든 것이 왜곡된 세상이라고.”

화려한 예복을 입은 요정은 양손을 펼치며 거만한 미소를 띄워냈다. 아까 전 벨로크와 드잡이질을 할 때보다 페이스를 좀 더 회복한 것 같았다. 그것은 이 공간에서라면 언제든 벨로크를 눌러 죽일 수 있다는 넉넉함처럼 보였다.

“그래, 네가 이 요상한 공간의 주인이었지. 그렇다면 날 이리로 데려온 이유는 하나뿐이군.”

벨로크는 몇백년 동안 왕 노릇을 해온, 저 오만한 요술쟁이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여기서라면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나?”

그는 말을 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그 역시도 어느새 저 귀쟁이처럼 오만해진 것 같았다. 주먹 한 방으로 고대의 마수를 퇴치하고, 검 한 번 휘둘러 세상을 쪼갤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스스로가 이 세상의 부속품이라 생각했던 현대인이 아닌,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게 된 전사. 대악마 사냥꾼. 고대신의 계약자 벨로크.

그렇게 거만한 인간과 요정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엘가르가 느릿하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이곳이라면 수호 기사들이 휘말리는 것을 걱정하지 않은 채, 너를 찢어발길 수 있을 테니까.”

엘가르는 나지막하게 허나 또렷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차가운 얼굴에는 식은땀이 뻘뻘 흘렀고, 치렁한 옷들은 사방으로 나풀거렸다.

입안이 바싹 마른다. 불덩이도 버텨내는 육신에 땀이 주르륵 생겨났다.

벨로크는 굳이 저 모습을 보고 있지 않더라도 강대한 주문의 전조를 느낄 수 있었다.

오감의 경고성은 곧 저 주문의 실체를 감지해냈다.

“타죽어라.”

주문을 완성시킨 엘가르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세상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윽고 쿠르르 균열을 일으키며 거대한 불덩이들을 토해냈다. 암석이 섞인 그 불덩이들은 하나하나가 집채만 했다. 그런 것들 수십 개가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시켜 버리겠다는 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떨어지면서 가속도를 얻으면 점차 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뻥 터져나가며 그 파편을 사방으로 뿌리겠지. 이야. 무슨 미사일 같네.

벨로크는 떨어지는 운석의 위용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런 주문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물론 가만히 서 있지는 않았다. 그의 심장은 지금도 맥동하며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굳건히 땅을 디딘 다리와 검을 쥐고 있는 손 역시 속의 근육을 있는 대로 짜내고 있었다.

신성을 사용하면 진작에 승부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제 육신을 이용해서 저놈과 겨뤄보고 싶었다. 이건 어린 아이의 순수한 치기라고 불러도 좋고, 전사로서의 투쟁심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저 정도 수준의 요술쟁이와 맞붙은 일은 그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벨로크가 자세를 잡은 순간. 이 기이한 공간에 작은 틈이 생겨났다. 이윽고 보랏빛 머리칼의 요정이 쏙 모습을 드러냈다. 에밀이었다.

“인간! 내가 도우러 왔어요! 어서 여기서 나가··· 저, 저건 또 뭐야?!”

아주 맹탕은 아니었군. 벨로크는 호들갑을 떠는 에밀을 뒤로한 채, 땅을 박찼다.

그의 모습이 흐릿한 잔상이 되어 사라졌다. 날아다니는 엘가르의 모습이 보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눈앞을 가로막은 운석 때문이었다.

벨로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늘 그랬던 대로 십자검을 꾸욱 쥐었다. 이가 나가고 녹이 슨 이 검은 이제 그만 자신을 놓아주라는 듯. 애처롭게 떨었다. 하지만 무정한 주인은 이번에도 그 기대를 배신했다.

그는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이 힘을, 폭발적인 의지를 담아 휘둘렀다. 반짝이는 선이 올곧게 하늘을 갈랐다. 이윽고 쉴 틈 없이 움직이며 한 폭의 어지러운 그림을 그려냈다.

“···!”

에밀은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자연의 분노를 가볍게 갈라버리는 전사의 화풍은 그녀의 두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비산하는 불똥과 암석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광경 아래.

왕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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