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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밀
“···”
하얀 대리석과 금으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회랑에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행은 제 나름대로 벨로크가 던진 말에 대해서 생각 혹은 경악 중이었고, 수호 기사들 역시 그랬다. 엘가르는 반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가!”
그 고요함은 카타리나에 의해서 깨졌다. 그녀는 오른발을 크게 내디디며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당장에라도 튀어나와 검을 휘두르려는, 숙련된 집행자의 모습이었다.
이는 옆에 있던 은발의 성기사 요하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호를 그으며 검을 뽑아 든 그 역시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사정도 모르는 외지인 따위가··· 왕을 능멸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카타리나의 검면에 새겨진 룬이 불처럼 타올랐다. 요하네스의 몸에도 새하얀 성력이 피어올랐다.
일행이 대악마 사냥꾼이든 뭐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믿지 않거나.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앞지를 정도로 충섬심이 강해서겠지.
그래, 여기는 이런 곳이지. 상대를 이해하거나 이해시키기보다, 대화와 합의를 통해 설득하기보다 창칼이 더 가까운 곳. 그저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내 말이 더 맞다고 윽박지르는 세상.
“자, 잠깐! 잠깐만요! 당신들도 무기 좀 집어넣··· 엑!”
중간에 끼어 그들을 제지하려는 에밀을 벨로크가 뒤로 끌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투명한 공기가 일렁거렸다. 벨로크가 검을 뽑아 여러 번 휘두르자 칼날이 챙챙 불똥을 튀었다.
“···!”
칼날이 닿지 않는 거리. 일행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두른 카타리나가 놀랐다. 내가 더 놀랍다. 시발. 뭐? 검기냐?
“룬검! 조심해요!”
소리친 이자벨이 쌍날검을 뽑아 들었다. 화린은 쿵 합장을 하고는 기운을 끌어올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당장에라도 서로 간에 피를 뿌릴 듯한 그들을 제지한 것은 왕의 목소리였다.
“별 시정잡배들은 아니었군. 너 인간들. 그리고 배반자들아. 따라와라. 이곳은 신목이 있는 곳. 싸움을 하기에도 대화를 나누기에도 적절한 곳은 아니니까.”
엘가르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중얼거리고는 회랑을 나섰다. 침착하고 오만한 그 태도는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싸움의 열기를 대번에 식혀버렸다. 수호 기사들은 무기를 거두고 그의 뒤를 따랐고, 일행은 당황했다.
“잠깐! 먼저 검을 휘두른 건 그쪽이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엘가르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떠나자. 화린은 ‘뭐 저런 요정이!’라고 소리치며 분개했다. 이자벨은 알만 하다는 얼굴이었다.
“말하지 않았나요? 엘가르는 원래 저런 사내에요. 그는 왕국의 건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닦고 이곳의 토착종들을 몰아내야 할 때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수 천의 괴물과 인간들을 학살했죠. 이건 정치, 외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됐고, 덕분에 철혈의 군주라는 이명이 붙었었죠. 그때 당시에는 과감하며 냉정한, 카리스마 넘치는 주군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왕자병 걸린, 재수 없는 사내일 뿐이네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주군을 모욕한 이자벨이 벨로크의 팔뚝에 얼굴을 비볐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에밀은 자기 목을 쓰다듬다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