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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76화 (17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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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밀

벨로크가 길을 뚫자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화린이 성벽에 손가락을 퍽퍽 박으며 올라왔다. 이자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에밀을 등에 업었음에도, 성벽 위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정말이지··· 감탄만 나오네요. 판금 갑주를 입은 요정 기사를··· 그것도 별다른 상처 없이 제압하다니.”

“봐도 봐도 늘 새로운 남자죠.”

두 사람은 쓰러져 있는 경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

왕국의 심장부가 대번에 뚫리자 에밀은 당황스러운 한편.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때. 벨로크가 성탑 쪽에서 걸어 나왔다. 역시나 그가 지나온 길에는 기절한 요정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놈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동하지. 안내해라.”

에밀보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이자벨이 했다.

“왕성 안에는 여러 개의 궁이 있지만 그중에서 왕좌가 있는 궁은 수정궁 하나뿐이죠. 아마 요정왕은 그곳에 있을 거예요. 따라오세요.”

그녀는 성탑 아래로 난 사다리를 내려가며 앞장섰다. 왕의 병사로서 복무했을 때의 경험을 되살리는 듯했다.

“···”

훌쩍 지나간 이자벨을 보며 에밀은 벌어지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서 벨로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는데. ‘어째선지 이 쓸모없는 년.’ 이라고 얼굴에 적혀있는 것 같았다. 에밀은 자신의 상황도 잊은 채, 울컥 소리쳤다.

“나··· 나도 알거든요? 왕궁의 지리 정도는 나도···”

“내가 뭐라 했나? 어서 가자. 놓칠라.”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벨로크가 에밀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에밀은 마찬가지로 그의 손을 툭 치며 뒤따랐다. 그렇게 성탑을 내려온 일행은 빠르게, 하지만 은밀하게 왕궁 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침입···! 웁!”

“죄송해요.”

소리치려는 시종의 입을 화린이 틀어막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멋들어진 턱시도를 입고 있던 요정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다른 쪽에서는 이자벨과 벨로크가 위와 같은 일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달밤 아래 요정의 감각이란 것들은 꽤나 굉장해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는 녀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까 전 성벽 위의 병사들도 그랬지만, 이들 역시 그냥 평범한 요정 같아요. 악마나 녀석들의 하수인으로는 안 보이는데··· 저희가 잘못 짚은 걸까요?”

요정왕이 대악마에 의해 타락했거나 조종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화린이 의아해했다. 벨로크 역시 그랬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렇다고 해도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악마의 손발톱이든 요정들의 창칼이든 살을 찢고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똑같았으니까.

그렇게 요정들이 하나둘씩 쓰러져서 그림자 아래로 옮겨질 때마다. 에밀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무단침입, 기물손괴, 폭행에 이르기까지. 점점 죄가 가중되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 벨로크 일행이 요정왕을 설득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이동하려는 세 사람을 그녀가 말렸다.

“잠깐만요!”

“왜 또?”

“제가 아까 말 했잖아요? 왕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다고. 그렇다면 그가 수정궁에 없을 상황도 대비해야 되지 않겠어요? 만약의 사태가 일어났다면 동선 낭비가 너무 심해지니까.”

이자벨이 코웃음을 쳤다.

“왕이 기거하는 수정궁에는 요양을 위한 치유의 샘을 비롯해 온갖 편의시설들이 다 갖추어져 있어요. 거기다가 엘가르님. 아니, 엘가르는 가진 핏줄만큼이나 자존심과 자존감이 굉장히 높죠. 그가 왕좌를 내팽개치고 다른 곳으로 갈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이익···”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에밀은 또 울컥했다. 이자벨은 요정 생활 백 수십 년 간. 장로의 얼굴이 저렇게 일그러지는 것을 처음 봤다. 정확히는 요근래 벨로크가 오고 나서 에밀에게 대단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음습하고 마치 인형처럼만 보였던 장로의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몹쓸 취급을 받고 있는 한때의 지도자에 대한 안쓰러움을 담아 에밀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럼 확인을 좀 해볼까요?”

이자벨은 쓰러져 있던 시종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남들보다 옷이 더 고급스러운 걸로 봐서 직급도 높아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감겨있던 시종의 두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린 후. 마안을 발동시켰다.

“아아··· 나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영원 무결하신 주인이여··· 명령을···”

요정은 얼굴을 붉히며 침을 질질 흘려댔다. 고간 쪽도 잔뜩 성이 난 듯 부풀어 있었다. 이자벨은 시종의 아랫도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힐끔 벨로크의 눈치를 봤다. 이윽고 시종을 짐짝처럼 휙 던지고는 물었다.

“묻겠다. 왕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왕은 수정궁에 계십니다. 하지만 조금 전. 영원의 전당으로 향하셨습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잘 못 하면 큰일 날 뻔했군! 시간만 날리고 병사들에게 포위당할 뻔했어!”

말투마저 바뀐 에밀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벨로크가 그녀의 머리에 턱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알았으니. 소리 좀 낮춰. 네 목소리 듣고 다 몰려오겠다.”

“···”

에밀 역시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있는지 얼굴을 붉혔다. 화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담 어서 이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어요.”

벨로크의 귓가에 요정들의 당황스런 외침과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성벽에서 벌어진 이변을 눈치챈 모양이다. 이자벨 역시 귀를 쫑긋거리면서 허공을 가리켰다.

“영원의 전당이면 세계수가 있는 곳이에요.”

고개를 올리자 어둠에 휩싸인 거대한 기둥 같은 게 보였다. 구름을 뚫고, 달에 닿을 정도로 길쭉한 그 기둥은 밀림의 나무들 수백 그루를 합친 것만큼이나 컸는데. 살펴보니 엄청나게 커다란 수목이었다.

잠깐 저거 뭔가 좀 이상한데? 벨로크가 세계수에게서 뭔가 익숙하면서도 기묘한 기운을 느낄 때. 이자벨이 앞장섰다.

“왕이 이 시간에 어째서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코앞이에요. 출발하죠.”

그녀의 안내를 따라 일행은 달렸다. 달빛이 내리쬐는 정원을 지나자 세모꼴로 솟은 건물이 보였다. 세계수를 마치 벽처럼 둘러싼 채 세워진, 신전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신목이 주는 영향 때문인지 영험해 보이기 까지했다. 일행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뚜벅뚜벅

더러운 흙먼지가 새하얀 판석에 그 자취를 남겼다. 그 깨끗함만큼이나 건물 안은 고요했다. 오직 네 사람의 발소리만이 메아리치듯 들려올 뿐이었다.

여긴 경비도 없나? 벨로크가 의아해할 때. 주변을 둘러보던 이자벨이 말했다.

“요정들의 탄생에서부터 함께 해왔다는 세계수는 정령들의 쉼터이자 요정들의 긍지, 그들의 자존심이죠. 셀레네 신앙에서는 달의 여신의 대리자라고 부를 정도로 성스러운 영물이기도 해요.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딱 셋이에요. 현왕. 그리고 그를 수호하는 두 사람의 수호 기사들.”

성역이란 뜻이었다. 신전 맞네.

“일개 병사였던 제가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 감개무량하네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악마가 되어 옛 직장에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았다. 일행은 크고 작은 문을 몇 개 지나치며 신전을 뒤졌다. 길도 모르고, 왕의 위치조차 몰랐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숲과 나무를 형상화한 문양이 새겨진 기둥과 그림, 제례용 도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렇게 신전 안을 빙 돌았을까?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오가는 동안 왕의 모습은 코빼기도 안 보였으니. 아마 저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벨로크의 감각도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

문의 양쪽에 손을 댄 화린과 이자벨이 긴장을 끌어올렸다. 에밀은 침을 삼켰고, 벨로크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두 여인의 괴력에 의해 잠겨있던 걸쇠가 퉁 떨어져 나갔다.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처음 보인 것은 드넓은 회랑과 시커멓게 썩어있는 나무의 기둥이었다. 기둥 주변으로는 금줄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아래에는 각양각색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Ordo Dormi”

그리고 그 앞에 화려한 예복을 입은 녹색 머리칼의 요정이 손을 뻗고 있었다. 갑주를 입은 은색 머리칼의 사내 또한 그의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누구냐!”

침입자가 들이닥치자 그들의 뒤편에 있던 여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왕의 수호 기사 카타리나였다. 그녀는 인간과 악마를 보고 당장에 달려들 듯 살기를 끌어올리다가, 곧 뒤편에서 나타난 에밀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에밀 장로···? 이게 무슨···”

“무슨 일이냐. 카타리나.”

“침입자입니다. 왕이시여. 하지만 그중에 몰아치는 폭풍 부족의 장로 에밀이 끼어있습니다.”

당황한 그녀의 목소리에 녹색 머리칼의 요정이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인상의 미남자였다. 입은 옷으로 보나 흐르는 기품으로 보나 저자가 요정왕인 것 같았다. 그러자 기도를 올리고 있던 은발의 요정 또한 슬며시 일어났는데. 목에 걸고 있는 달 문양의 목걸이로 보아 저건 셀레나의 성기사였다.

세 요정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인간과 악마, 동족을 바라보았다. 회랑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그 침묵을 깨며 에밀이 앞으로 나섰다.

“왕이시여. 그리고 수호자들이여. 잠시 제 얘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는 예를 차려서 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상체를 숙였다. 이윽고 벨로크 일행의 배경과 그가 이곳에 침입한 이유. 역병의 치료제 역시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니 이 무의미한 전쟁을 당장에 멈춰야 합니다. 치료제가 있으니 시민들의 분노도 조금이나마 가라 앉을 터. 저는 좀 더 확실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지상 종족끼리의 괴멸을 노리고 있는 악마의 농간이라는 생각을 품은 채 말입니다.”

에밀은 스스로 내뱉은 말이 꽤나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며 세 요정을 바라봤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당황했다.

놀라거나 혹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박이라도 할 줄 알았던 두 수호 기사가 석상처럼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이는 요정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일행을 주시할 뿐이었다.

같은 대악마 사냥꾼에 대한 동질감도, 역병을 치료할 치료제에 대한 희망도, 지금 그의 표정을 본다면 전혀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반응들이 아니었다.

저 새끼 저거 요술쟁이네. 일순 그의 눈동자가 흐릿한 안광을 뿜어내는 것을 본 벨로크가 시선을 돌렸다. 마치 썩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수의 밑동을 향해서였다.

벨로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처럼 예리하게 벼려진 그의 감각들, 신성을 다룸으로써 한층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 그의 오감이 신목 아래 도사리고 있는 끈적한 악의를 감지해냈다.

속에 있는 저 사념은 마치 기생충처럼 꿈틀거리며 신목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강대하고도 사악한 힘이 느껴졌다.

그때. 엘가르가 눈을 마주쳐왔다. 그는 생각이라도 읽는 듯 뚫어져라 벨로크를 주시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돌아가는 머릿속 가설을 짜맞추기 시작했다.

강철의 사원에서 날뛰었던, 스스로를 아가레스의 부관이라 소개한 리치, 요정왕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대악마. 수도의 중심부로 갈수록 커지는 역병. 썩어가는 세계수, 주변에 쳐진 봉인진과 도구들. 성기사까지.

퍼즐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몇 개의 결과들을 도출해냈는데. 자신이 생각한 게 맞다면 저기 서 있는 저 왕이란 놈은 정말 미친놈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애먼 제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몬 셈이니까.

지금 일행이 보고 있는 이 광경은 요정 왕국에서 가장 큰 치부이자 가장 은밀한 비밀이었다.

어떻게 윗대가리 놈들은 하나같이 다 이 모양이냐?

“왕이시여? 뭐라 답을···”

“후우. 거기 인간.”

한숨을 내쉰 것으로 에밀의 말을 일축한 엘가르가 벨로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얼음장 같은 눈동자가 침입자들을 올곧이 직시했다. 어째선지 좀 전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그가 고저 없이 말했다.

“네놈. 알아챘나?”

그 살얼음 같은 목소리를 벨로크는 피식 웃어넘겼다.

“뭐가 말인가? 실은 죽은 줄 알았던 대악마가 저 나무 속에 기생하고 있다는 거? 사실 역병을 퍼트린 건 인간들이 아니라. 악마와 융합하고 있는 저 나무란 거? 그리고 그 모든 게 네 뻘짓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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