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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란타
에밀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저택 문을 열었다. 밖에는 판금 갑주를 입고 풀헬름을 한 손에 든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잔머리 하나 없이 올려묶은 붉은 머리칼이 특징적이었는데. 바로 왕의 수호 기사 카타리나였다.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편으로도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 수십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같이 길쭉하고 덩치가 컸다. 눈에는 오랫동안 칼밥을 먹어온 자들 특유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자세히 보니 마법사와 정령사도 섞여 있는 듯했다.
이만한 무장병력을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혹시 들켰나? 에밀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지금의 이 방문이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타리나경?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그것도 왕의 천병들까지 데리고 오시다니요?”
에밀은 미소 지었지만 은근히 주문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안광이 번뜩이는 것을 본 카타리나가 가볍게 손사래 쳤다.
“진정하시지요. 장로. 충분히 오해하실 법한 상황이기는 한데. 오해 자체가 비약입니다.”
“제 저택에 군대까지 끌고 오신 분께서 그런 말을··· 제대로 된 설명을 부탁드려요. 경.”
에밀은 벨로크와 대화하던 때와는 달리.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했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그러면서도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카타리나는 고지식한 기사였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면 애초에 저런 말 자체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냅다 무릎부터 꿇으라며 칼부터 휘둘렀겠지. 그렇다면··· 아! 그건가?
“우선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여기 서서 얘기하기에는 조금 그렇군요.”
“아. 실례했네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카타리나는 기사들에게 대기하라고 손짓한 후. 자기 혼자만 안으로 들어왔다. 응접실에서 그녀를 맞이한 에밀은 차와 다과를 좀 내주었다. 그리고 에밀 역시 차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이제 말씀해 주시겠어요? 왕의 수호 기사이신 경은 늘 엘가르님의 곁을 지키셔야 하는 걸로 아는데··· 그런 분께서 어째서 여기까지 오신 거죠?”
“이에 앞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장로께서는 왕께 전할 말이 있으셔서 이곳에 방문하신 걸로 압니다만···”
에밀이 미간을 찌푸렸다. 경비가 비밀을 엄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빨리 퍼졌지 않은가? 그녀가 경비를 욕하든 말든, 카타리나는 제 할 말을 했다.
“그 연유가 혹시··· 저번에 토벌을 요청하셨던 히드라 때문입니까?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나요?”
에밀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다. 고리마 늪지의 포식자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그 정도의 괴물을 토벌하려면 이쪽 역시 그만한 강자가 필요했으니. 왕국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전사인 카타리나가 이번 일의 적임자가 된 것 같았다.
아마 토벌대가 출발하기 직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거겠지. 마을의 안위가 경각에 달린 지금 한 마을의 장로가 자리를 비웠으니까. 무언가 사달이 났구나 생각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에밀이 속으로 안도했다.
“요청을 드린 지가 언제인데. 이제서야 출정 준비가 끝나셨군요?”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경께서 죄송하실 필요는 없지요. 군대를 준비하는 것이 어디 혼자서 될 일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그 괴물은 이미 퇴치되었습니다.”
“네?”
카타리나는 성격 안 좋은 저 에밀이 이런 반응을 내보인다는 것에 놀랐다가, 전설상에나 나오는 그 마물이 퇴치되었다는 것에 또 놀랐다.
에밀은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전에 자신에게 은혜를 입었었던 인간 전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이번에 자신들의 마을에 방문했다. 받았던 은혜를 되갚기 위해서.
그 정성에 감동한 에밀은 그들을 쫓아내는 대신. 기꺼이 그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간들과 힘을 합치고, 부족 전사들을 동원하고, 자신이 가진 선조의 유물들을 모조리 털어 놈을 사냥했다는 얘기였다.
“저와 기사단으로서도 놈을 죽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는데. 대단한 업적을 세우셨군요. 그 인간들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나 봅니다?”
카타리나는 인간과 손을 잡았다는 장로를 탓하기보다는 혀를 내둘렀다. 왕의 기사들이 흘려야 할 피를 저쪽에서 대신 흘려주었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고지식했지만,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에밀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꺼낸 얘기였다. 그녀의 주장은 자세히 살피면 엉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알게 뭔가? 협박당했다고 하면 그만이지.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간 왕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전사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나쁜 것은 아니군요. 어쨌거나 다행입니다. 저도 그럼 마음 놓고 본래 임무로 복귀할 수 있겠군요.”
대충 대꾸해준 카타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듯 보였다. 에밀이 그녀를 붙잡았다.
“경. 잠깐만요.”
“네? 무언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에밀은 카타리나의 허리춤에서 번뜩이는 룬검과 그녀의 단련된 육체,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왕국 최고의 기사단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위층에 있을 검은 머리칼의 전사 또한 떠올렸다.
꿀꺽. 포커페이스에 금이 간 에밀이 마른침을 삼켰다. 요정 왕국 최고의 전력보다 그 사내 하나가 자신을 더 공포에 빠지게 했다. 지금 이 대화도 듣고 있겠지. 젠장.
에밀은 올가미에 묶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말했다.
“오늘 정오쯤 왕성으로 갔는데. 엘가르님을 뵐 수가 없더군요. 듣기로는 칩거에 들어가셨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아··· 그것이···”
여태까지 술술 대답하던 카타리나가 말끝을 흐렸다. 얼굴도 굳어 있었다.
“아. 혹여 대답하기 곤란하시다면···”
“죄송합니다. 대악마와의 격전 이후 엘가르님은 지금 요양을 취하고 계십니다. 전하실 말이 있으시다면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독대를 요청하실 정도로 은밀함을 요구하는 이야기라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음을 기약하죠. 부디 왕의 옥체가 빨리 호전되기를 셀레네님의 이름으로 기원하겠습니다.”
“장로의 업적과 용기 또한 천상신들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럼 이만.”
꾸벅 고개를 숙인 카타리나가 저택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철그럭 거리는 소리가 우르르 울리다가 사라지자, 위층에 있던 세 사람이 내려왔다.
“거짓말이 아주 수준급이군.”
벨로크가 에밀을 보고 웃었다. 그녀는 냉철했던 표정을 깨고, 툴툴거렸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에요? 당신들을 팔아넘겼어야 했어요?”
“아니, 칭찬이다. 마법사들에게 있어 남을 잘 속여먹는 것은 최고의 찬사 아닌가?”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라고 중얼거린 에밀이 말을 이었다.
“카타리나의 표정으로 볼 때. 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해요. 전투의 후유증이든 혹은 남들에게 숨겨야 할 은밀한 비밀이든. 뭐든지요.”
최악만 아니길 바랄 뿐인데. 벨로크가 후드를 뒤집어썼다. 가방에서는 은하수 망토를 꺼냈다.
“···이제 출발할 건가요?”
에밀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날도 어두워졌으니 일을 벌이기 딱이군.”
그때. 화린이 은하수 망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두 명 이상은 못 쓸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벨로크씨와 에밀씨만 가시는 건가요?”
벨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건 당신과 이자벨이 쓰시오. 나와 에밀은 다른 방식으로 가면 되니까.”
“응?”
에밀은 어째선지 불안감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를 짐짝처럼 들쳐멘 벨로크는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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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토를 뒤집어쓴 화린은 이자벨과 팔짱을 낀 채, 왕궁으로 향하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주문 걸린 이 장비를 사용하는 느낌은 퍽 이상했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오감은 뒤죽박죽으로 날뛰었고, 때때로는 내가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도 들었다. 거리에 있던 수백, 수천의 요정들 중 그 누구도 두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화린은 쓰고 있는 이 망토가 새삼스레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것 없는 양아치에게도 이 망토를 쥐여준다면 그는 능히 일류 암살자가 될 것이었다.
그때. 이자벨이 화린의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앞을 보자 후미지고 굽이진 골목길이 보였다. 이건 이자벨이 알려준 지름길이었는데. 인적이 드문 이곳만 넘으면 왕성이었다.
두 사람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걸었다. 그간 지나쳐온 곳이 양지라면 이곳은 음지의 느낌이 강했다. 바닥에는 술병과 음식물, 끈적한 오물 등이 굴러다녔고, 얼굴이 붉어진 요정들도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중에는 태반이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끄으으으···”
“아파, 아파···”
간혹 얼굴이 시퍼렇게 죽어있고, 반점이 온몸까지 번진 자들이 비틀거렸는데. 이들은 곧 그 생명이 다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현상은 세계수가 있는 왕궁으로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꾸우욱
팔짱을 끼고 있는 이자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서야 화린은 지금의 사태를 다시금 상기시킬 수 있었다.
이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다. 치료제가 있고, 진상이 밝혀져도 뭣 하겠는가? 억울하게 죽은 저 사람들의 원혼은 누가 달래주지? 그들의 고통 어린 분노는 어떻게 잠재울 거고?
‘정말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에밀과 막시머그는 왜 치료제가 있다는 것을 여기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지?’
그것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와 에밀 개인의 욕망. 그리고 그녀가 벨로크의 일을 돕기 위해 정신이 없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화린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에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뼛속까지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울분을 터트릴 뿐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골목의 사각에 몸을 숨긴 채, 정면을 바라봤다. 외성벽 만큼은 아니지만 드높은 성벽이 보였다. 위쪽에는 꽂혀있는 횃불대와 함께 쇠뇌를 든 병사와 요정 기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무사히 왔지만···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 벨로크가 올 때까지 기다리···
이자벨이 속삭일 때. 탁. 땅을 디디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소음이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자 골목의 그늘 아래. 시커먼 로브를 쓰고 있는 벨로크가 보였다. 그의 손에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에밀이 들려있었다.
“진짜 지붕을 타고 오신 거예요? 그것도 요정들의 감각을 속이고?”
화린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벨로크는 에밀을 내려주면서 속삭였다.
“내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소. 손은 눈보다 빠르다.”
“아니, 이건 좀 경우가 다른 것 같은데요···”
어깨를 으쓱은 벨로크는 마찬가지로 골목에 숨어 성벽을 바라봤다. 거 더럽게 삼엄하군. 이자벨이 말했다.
“제가 한 명씩 옮기는 건 어떨까요?”
“날아가자고? 음. 달이 너무 밝아서 눈에 띌 거 같은데.”
겨우 숨을 고른 에밀이 짜증을 냈다.
“거봐요. 무모한 짓이라고 했잖아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화린이 핀잔을 주었다.
“짜증만 내지 말고 무슨 수 없어요? 마법사잖아요? 뭐, 땅을 무너트린다던가. 아니면 주의를 돌리기 위한 마법을 쓴다던가.”
에밀은 코웃음을 쳤다.
“쯧. 이봐요 무식한 아가씨. 당신 눈에는 저기 서 있는 자들이 장님처럼 보여요? 저곳에는 극한까지 단련된 기사들뿐만 아니라 마법사와 정령사들도 끼어있어요. 내가 주문을 쓰면? 그 요동을 감지해낸 저들이 손을 쓸 거에요. 대번에 비상종이 울리고, 수도의 병영에 있는 온 병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겠죠. 왕성 무단 침입이라는 건 그 정도의 중죄니까.”
“당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돌려서 말하는 것 아니에요?”
“자기도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말 만···”
“그만, 우리끼리 싸워서 어쩌자는 거요?”
얘네는 또 갑자기 왜 이래?
두 사람을 말린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여기 숨어서 상황을 살피다 보면 기회가 올 것이다. 저들이 근무 교대를 하는 틈이든, 아니면 일행이 무언가 수를 써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여기 오래 죽치고 있다가는 언제 들킬지도 모르고.
“들고 있어라.”
벨로크는 에밀에게 차고 있던 검과 포션이 달린 벨트 등. 절그럭 거리는 물품들을 다 건네주었다. 이윽고 가벼워진 몸에 후드만 걸친 채, 어깨를 휙휙 돌렸다. 짐의 무게 때문에 에밀이 낑낑거리며 말했다.
“자, 잠깐 어쩔려고요?”
“신호하면 따라와.”
벨로크는 그 말을 끝으로 땅을 박찼다. 얕은 흙먼지가 생겨난 것도 잠시. 그의 몸이 잔상이 되어 사라졌다. 이윽고 다음 순간. 그는 드높은 성벽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
지글거리는 횃불 아래. 느닷없이 후드 쓴 괴한이 앞에 있자 순찰 중이던 요정 병사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 잠깐 사이. 훈련받은 대로 행동하려고 했다.
손에 들린 창을 앞으로 뻗는 동시에. 목에 걸린 호각을 불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반복 숙달된 그 행동이 의식을 거쳐 표출되기 전. 그는 털썩 쓰러졌다. 쿵 소리는 울리지도 않았다.
“거기 무슨 일이···”
어둠 속이었지만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린 요정 기사가 다급히 다가왔다. 이윽고 그 역시 털썩 쓰러졌다. 쇠뇌를 들고 경계 중인 병사, 정령을 부리며 교감하던 정령사, 성벽에 기대어 마법서를 잃고 있던 마법사까지.
한순간에 한 구역을 경비 중이던 병사들이 일제히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는 후드 쓴 사내가 손날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에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철통같던 경비를 뚫어낸 벨로크는 손을 툭툭 털었다.
“멍 때리지 말고 다들 올라와. 움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