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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란타
자바르는 말목에 속하는 포유류 중 하나다. 집채만 한 덩치와 강철같은 가죽, 날카롭게 솟은 뿔을 자랑하는 이 맹수는 일견 사나워 보이지만, 사실은 온순한 녀석이다. 물론 요정 조련사들의 입장에서야 그렇다는 얘기였다.
쿠우우우!
두 마리의 자바르가 나스 밀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다른 놈들에 비해서 특출나게 컸는데. 달린 뿔도 세 개였다. 덕택에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빠뜨리거나 파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요정. 장로 에밀은 부지런히 채찍질을 했다.
촤악. 등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자바르들은 훈련받은 대로 속도를 높였다. 녀석들이 끌고 있던 마차 역시 요란하게 흔들렸다.
“우욱···”
“이거 정말이지··· 장난 아니네요. 승차감이 영 별론데?”
안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은 죽을 지경이었다. 엉덩이도 아팠고, 속도 울렁거렸다. 무슨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벨로크는 에밀이 자신을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에밀이 마차 안을 보며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틸란타에요. 다들 내가 신호하면 안으로 들어가세요.”
잠시 후.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고, 에밀이 휘파람을 두 번 불었다. 화린이 의자 밑에 있는 미세한 홈을 꾸욱 눌렀다. 철컥 소리가 나더니 마차의 내부 바닥이 반으로 갈라졌다. 큰 마차였기에 세 사람은 어렵지 않게 숨겨진 공간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이윽고 안에 있던 작은 홈을 누르자 열려있던 바닥이 도로 닫혔다.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에밀은 마차를 몰아 도시로 다가갔다. 하얀 성곽과 강철을 덧씌운 성문이 보였다. 성벽은 삼중이었고, 그 위를 판금 갑주를 입은 기사들과 정령들이 쉴 틈 없이 순찰하고 있었다.
대단히 삼엄했다. 그 어느 나라를 가도 저 정도의 인력들을 이렇게 소모하지는 못했다.
그간 지나쳐온 요정 마을들이 야생과 문명의 경계에 반반씩 걸쳐져 있던 느낌이라면, 이곳은 완연히 문명인의 영역으로 보였다.
“으음···”
마부석에 앉아있던 막시머그가 긴장했다. 창을 들고 있는 저 병사들이 자신을 책잡을까 봐 두려웠다. 혹여 숨어있는 세 사람이 들킬 것 같아서 또 두려웠다. 그의 귓가로 에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걱정 마라 꼬맹아. 내가 너의 신원을 보증하는 한 저들이 네게 해코지를 할 일은 없을 것이야. 안에 있는 세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러니까 제발 표정 좀 펴라. 그 전사한테 목이 따이고 싶지 않다면···”
역효과였는지. 막시머그의 표정이 긴장을 넘어 창백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허리춤의 물약을 한 병 꺼내 들이켰는데. 그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굳었던 표정을 스르르 풀었다. 진정제인 듯 보였다.
에밀은 이 반푼이를 보며 한숨을 후 쉬다가 성문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요정들이 보였다. 다들 인간과의 전쟁을 위해 각 부족에서 차출 혹은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환영합니다!”
경비들은 지원자들의 악에 받친 눈을 보고 그들 역시 똑같이 화답하며, 형식적인 검문도 없이 들여보냈다. 금방 에밀의 차례가 돌아왔다.
“용무는··· 아니, 에밀 장로님 아니십니까?”
한 병사가 아멧에 달린 면갑을 들어 올렸다. 에밀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안도했다.
“오랜만이네요. 마틴.”
“자바르를 끌고 오시다니. 어지간히도 급한 일이신가 보군요?”
에밀은 준비해두었던 변명을 꺼냈다.
“왕께 긴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 말이죠.”
“긴급히라··· 장로께서 직접 오실 정도라면 은밀함 역시 요구하고 있겠군요.”
에밀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규칙은 규칙이었다. 사람이 아닌 마차는 크고 작고를 떠나 검문을 해야 했다. 그는 이번에 막시머그를 힐끔 바라보면서 말했다.
“반푼이처럼 보이는데··· 이 자는 누구죠?”
“내··· 손자입니다. 멍청한 딸년의 작품이죠. 연을 끊고 싶었건만··· 여기까지 찾아온 정이 갸륵해 받아주었습니다.”
말을 흐린 에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막시머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미움과 애정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이 연기는 아주 잘 먹혀들어 갔다. 그리고 자신이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는 마틴 역시 알아서 긍정했다.
“손자분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서 데리고 오셨군요. 알겠습니다. 모쪼록 서로 간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인간들에 대한 적의가 극에 달한 지금. 혼혈 역시도 보복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요.”
“명심하죠.”
그 후로 병사들은 마차의 내부를 검사했다. 하지만 꼼꼼하게 하지는 않았다. 형식적이었다. 당연했다. 한 마을의 장로라는 사람이 설마 인간들을 숨겨서 데리고 올 거라는 생각을 하겠는가? 이건 에밀로서도 상당히 큰 리스크를 짊어진 셈이었다.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확인이 끝난 병사들은 그들을 가볍게 통과시켰다. 도시는 외관만큼이나 크고 화려했다. 이제까지 밀림과 늪. 숲을 지나던 그들에게는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복잡했다. 하지만 에밀은 가차 없이 마차를 몰았다. 이윽고 하얀 판석이 깔린 큰길을 따라 한참 이동하다가 웬 저택 앞에서 멈춰섰다.
“자. 시작해 볼까?”
팔을 걷어붙인 에밀과 막시머그는 주변을 힐끔 살폈다. 이윽고 낑낑거리며 큼지막한 나무 상자 세 개를 저택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더럽게 무거웠다.
잠시 후. 땀을 뻘뻘 흘린 에밀이 저택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아있는 거대한 나무. 세계수가 있는 곳. 요정왕 엘가르가 기거하는 왕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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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꼬였어요.”
후드를 벗은 에밀이 식탁으로 다가와 말했다. 의자에 기댄 채, 이가 나간 검을 손질하고 있던 벨로크가 시선을 던졌다. 어쩐지 그동안 너무 잘 풀린다 했지.
“궁전이 닫혀 있어요. 알아보니 왕께서는 현재 칩거에 들어가셨다는군요. 때문에 두 수호기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왕을 알현할 수가 없어요. 말도 안 전해주더라구요.”
에밀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벨로크 일행은 여기에 둔 후. 자신만 왕성으로 가 왕을 만난다. 그리고는 그가 대악마 사냥꾼이라는 것. 역병에 대한 치료제가 있다는 것을 밝혀 왕의 주의를 끈 후. 자연스레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안 되니···
“비밀통로 같은 건 모르나?”
“이봐요. 내가 아무라 장로라지만 결국 많고 많은 부족 마을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일 뿐이에요. 왕의 치부나 안전과 직결될 수 있는 비밀을 내가 어찌 알겠어요?”
옆에 앉아있던 이자벨이 병사로서 복무했을 때의 견해를 얘기했다.
“저 말이 맞아요. 왕의 혈족이나 두 수호기사 정도가 아니라면 통로의 위치는 알 수 없을 거예요. 현왕께는 가까운 친인척이 없으니. 두 수호기사. 카타리나 경과 요하네스 경 정도가 알겠네요.”
수호기사는 군권을 쥐고 있는 대장군들과는 다른, 오직 왕만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하는 왕국 최강의 전사들이었다. 들어보니 왕국에 나타난 대악마도 요정왕과 수호 기사 둘이서 잡았다고 한다. 일단 이들을 사로잡아서 정보를 캐내는 건 못하겠군. 너무 눈에 띄어. 화린이 물었다.
“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에밀은 우물거렸다. 정말 이 계획 하나만 믿고 온 것 같았다. 벨로크가 그녀를 타박했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더니 그 결과가 이거요?”
자존심이 상한 에밀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왕성 자체가 닫힌 건 몇 백 년 만에 처음 일어나는 일이라··· 다른 수를 짜내볼게요.”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인과 연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입이 무겁고, 이 일을 도와줄 만한 이들을 추려보았다. 회의적이었다. 자칫하면 그녀 역시 얽혀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그것도 반역죄로.
에밀의 얼굴이 점점 안 좋아질 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몇백년 만이라··· 그래,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나셨군. 시간도 없고, 그렇다면 답은 정해진 거 같은데.”
“무슨···?”
“만나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찾아가야지. 마냥 이곳에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
“역시나 그렇게 되는군요. 맡겨주세요. 안내할게요.”
이자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를 알아본 에밀이 기겁했다.
“자, 잠깐! 지금 설마 왕궁으로 침투하겠다는 뜻이에요? 다들 정신 나갔어요? 여긴 적진 한복판이에요! 사방에 인간들을 증오하는 자들이 깔려있다구요! 그들의 눈을 피해 왕궁까지는 어떻게 갈 거고, 또 간다해도 왕성의 삼엄한 경비는 어떻게 뚫을 건데?”
이건 불안감이었다. 저들이 정말 그런 미친 짓을 할거하는, 그리고 이로 인해 이들과 자신의 관계가 낱낱이 밝혀지게 될 수도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자신의 입김이 닿는,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던 마을과는 달리 이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으니까.
벨로크는 가방 안에 있던 물품을 꺼낸 것으로 답했다. 남색깔의 바탕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망토. 소유자를 투명하게 해준다는 귀물. 은하수 망토였다.
빼앗긴 자기 물건을 보자 에밀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것도 만능은 아니에요.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자칫 공간의 비틀어짐을 감지해낼 수도 있다구요. 당신들이 들키는 순간. 인간과 요정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거예요. 자칫하면 왕을 암살하려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에밀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렇게 하죠. 내가 역병에 대한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수도 사람들에게 알리겠어요. 그리고 당신들의 공이 크다고 선전할게요. 그렇다면 왕의 호기심을 끌 수 있을 테고 당신네들을 만나줄지도 몰라요. 인간들에 대한 적대감도 줄어들 거라고요. 어때요?”
벨로크는 멀뚱한 표정으로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
“내가 윗대가리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너무 오래 걸려.”
“...이런 시발. 그렇다면 나는 빼줘! 지금 당장 마을로 돌아가겠어!”
말투마저 바뀐 에밀의 어깨를 벨로크가 턱 잡았다.
“그건 안 되지. 당신이 가면 우리의 신원은 누가 보증하고?”
에밀은 악을 썼다. 그러나 도무지 벨로크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윽, 어차피! 쳐들어··· 간다며! 그럼 신원보증이 왜 필요해!”
“적어도 왕 앞에서 우리가 히드라를 죽였다는 걸. 대화를 나눠볼 가치가 있는 대악마 사냥꾼이라는 걸. 밝혀줘야지.”
만남을 주선하는 것과 나란히 왕궁에 침투하는 것은 조금 다른 영역이었다. 더 위험했다. 에밀은 당연히 거절했다.
“미친! 싫어!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내가 다 뒤집어쓸 수도 있잖아! 그럴 수는 없다고!”
벨로크는 에밀의 어깨를 잡던 손을 슬그머니 목덜미로 가져갔다. 그 차갑고 단단한 느낌에 에밀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
손가락만 까딱거려도 이건 쉽게 부러질 터였다. 그는 에밀의 가녀린 목을 턱 잡은 채,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권을 주지. 지금 여기서 사악한 인간 전사에게 목이 부러져서 죽겠나? 아니면 그를 따라가서 두 번째 기회를 노려보겠나?”
“끄으. 끄으···”
에밀은 눈물을 그렁그렁 흘려댔고, 막시머그는 벌벌 떨었다. 이자벨은 역시나 익숙한 표정이었다. 화린은 에밀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벨로크씨··· 진짜 나빠 보여요. 엄청 사악해 보인다구요···”
그 어수선함 속에서 벨로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밀. 선택은?”
“끄··· 하, 할게. 할 테니까 놔줘!”
벨로크가 손을 놔주자 털썩 쓰러진 에밀이 숨을 헉헉거렸다. 이윽고 자신의 목을 매만졌는데. 피멍이 다 들어있었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이어진 상황에 그녀는 기가 찼다. 벨로크가 자신의 목에 포션을 발라주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섬세한 손길로!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에밀이 부들부들 떨었다. 벨로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걱정하는 최악의 상황은 안 벌어질 거다. 우리도 전쟁을 막으러 온 거니까. 가능하면 설득할 셈이야. 가능하면···”
“···정말이지 내가 어쩌다 이런 인간하고 꼬여서.”
질린 얼굴의 에밀이 벨로크의 손길을 탁 쳐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젖히자 해가 지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밤이 올 것이고, 그것은 곧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을 이 미친짓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했다.
에밀이 한숨을 지으며 밖을 바라보던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택의 출입구로 일단의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제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자들이.
벨로크와 이자벨 역시 철그럭 거리는 강철의 소음들을 들었다. 에밀이 다급히 말했다.
“다들 위층으로 가서 숨어!”
일행은 멍청하게 되묻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재빨리 빈방으로 가 몸을 숨겼다. 에밀과 막시머그만 저택2층에 남이있던 그 순간. 똑똑 노크소리가 울렸다.
“에밀 장로. 안에 계십니까? 저 카타리나입니다.”
왕의 수호 기사가 그들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