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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73화 (173/222)

173

해소

“가, 갑자기 저를 왜?!”

벨로크가 자신을 지목하자 기겁한 막시머그가 주춤 그에게서 떨어졌다. 에밀의 미소가 사라졌다.

“당신의 목적은 전쟁을 막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겨우 찾아낸 해법을 제 손으로 망가뜨리겠다고?”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거든. 갑작스럽게 얻게 된 거라.”

마치 막시머그를 도구처럼 대하는 두 사람은 계속해서 살벌한 대화를 이어갔다.

“허세 부리지 마. 지금도 하루에는 수십 명의 요정이 죽어가고, 그보다 배는 많은 요정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어. 그리고 그보다 수십 배는 많은 요정이 가족과 친구들의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지.”

그녀는 눈동자를 번들거렸다.

“수 만 명 요정들의 염원을. 그들의 희망을 네가 짓밟겠다는 뜻이야? 부채감을 느끼지 않겠어?”

벨로크 역시 에밀의 눈동자를 마주 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침침했고, 덤덤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기에 마치 얼음장처럼 보였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요상한 책임론을 들이미니 나 역시 똑같이 얘기해주지. 난 역병을 퍼트린 자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요정들과도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다. 이자벨을 통한 얄팍한 연결고리가 있을 뿐이지. 게다가 내가 저자를 주워오지 않았다면 그는 밀림에서 객사했다. 내가 구했으니 거두는 것도 내 마음 아닌가?”

벨로크는 당장에 그리할 수 있다는 듯 검집을 매만졌다. 그는 사람 혹은 괴물들의 피를 수없이 묻힌 자 특유의 기세를 여과 없이 뿜어냈고, 막시머그와 에밀은 돌처럼 굳었다. 그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나한테 한 방 먹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이해하겠는데. 서로 쓸데없는 감정싸움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 싶군. 지금 이 시간에도 동족들이 고통받고 있다면서? 그렇다면 바삐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들 개개인의 목적과 안정된 삶을 위해서라면 말이야.”

“···”

에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윽고 고개를 내리며 피식 웃었다.

“하. 요즘 기사들은 칼 손질할 때. 혀에도 기름칠을 하나? 말 한번 더럽게 잘하는군. 좋아. 아니, 좋아요. 내가 졌어요.”

그녀는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더 이상 강짜를 부리지도 않았고, 얼굴에는 다시금 여러 가지 감정들이 떠올랐다. 초조함과 불안함 등이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이를 빌미로 또다시 기회를 얻었다. 잃을게 생겼고 지킬 게 생긴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래서 출발은 언제쯤 할 생각이죠?”

“내일 여명이 밝는 대로.”

믿을 수 없는 체력을 지닌 기사는 대번에 답했다. 에밀은 그를 질린 얼굴로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을 숨기고 성문을 넘으려면 준비가 필요해요. 적어도 정오는 되야해.”

그는 이 요정년을 좀 닦달해볼까 생각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과의 마지막 밤을 좀 더 불태운다 생각하지 뭐.

“그럼 그리합시다. 잘 부탁하겠소.”

벨로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남은 두 사람은 이제부터 바빠질 것이다. 막시머그는 쉴 틈 없이 치료제를 만들거나 배합을 알려주어야 할 것이고, 에밀은 이를 이용해 제 권력을 강화 혹은 공고히 다질 방법을 강구하겠지. 그러면서 자신이 시킨 일도 해야 할 테고.

뭐, 벨로크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 역시도 오늘 하루 피를 흘렸고, 검을 휘둘렀다. 입씨름까지 했다. 피땀 흘려 일한 전사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맛있는 식사와 술, 여인의 살결이면 이 피로함도 풀릴 것이다. 이것도 마지막인가?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가 술판이 열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별빛 아래로 평평하고 희미한 잔디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불똥과 함께 반딧불이들이 마치 별빛처럼 아른거렸다.

“후후후.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정말? 네 애인 대단한데? 그 정도면 거의 인간들 중에서는 최강의 전사 아니야?

“엘가르님과 비교하면 누가 더 강할까? 두 사람 다 대악마 사냥의 위업을 이루어냈잖아.”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 아래 선남선녀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몇몇은 잔디밭에 양팔을 베개 삼아 누워있었다. 또 몇몇은 접시에 음식을 덜어 먹거나 술을 마시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여기에 한 요정이 리라를 튕기고, 또 다른 요정이 피리를 불자 분위기가 한층 더 과열되었다.

“이자벨! 더 마실 수 있지? 화린! 당신도! 자. 건··· 어?”

나무로 된 잔에 요정술을 한가득 따르던 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벨로크가 어느새 그들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몇몇 요정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당연히 이자벨의 옆자리였다. 그리고 곧 주인공이 왔다느니! 물어볼 것이 많다느니!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벨로크는 그 어수선함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감지해냈다.

“왔어요?”

다리를 쭉 뻗은 채, 잔디밭에 앉아있던 이자벨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로브와 붕대로 꽁꽁 감싼 것이 아닌, 요정 양식의 짧은 바지와 반팔 하나를 걸친 채였다. 덕분에 울긋불긋 물든 회색 피부가 아주 잘 보였다. 인간 세상을 유랑할 때와는 달리 퍽 자유로워 보였다.

그것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지인들. 가족들. 그들의 호감 어린 시선과 공감, 입에서 나오는 미담들이 한몫했겠지. 당신은 고향으로 되돌아왔군. 다행이야. 이방인은 안도감, 기쁨, 질투 등이 담긴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왜 그래요? 혹시 장로가 또 무슨 이상한 얘기를···”

“그만, 지금은 그냥 먹고 즐기자고.”

고개를 저은 벨로크는 의아해하는 이자벨의 옆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 옆에는 화린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멜러니와 아르단도 있었다. 주위에 있는 요정들만 수십이다 보니 들어오는 질문들도 많았다.

-저기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어?

-어떤 왕국이 역병을 퍼트린 건지 짐작 가는 것 없나?

-지금껏 상대해온 괴물들 중에서 제일 강한 게 무엇이지?”

-인간들은 아직도 핏줄에 따라 계급을 나눈다면서? 당신은 어디 가문 출신이야? 생긴 것만 보면 분명 고귀한 태생 같은데.

개인적인 신변잡기부터, 나중에 가서는 잠자리에서는 누가 더 열정적이냐. 누가 먼저 고백했냐. 자주 하는 체위는 뭐냐. 같은 어른들의 이야기들도 나왔다. 벨로크는 흰 빵과 산딸기, 요정들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들을 안주 삼아 떠들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분위기는 신비로웠다. 그 사이에 있는 요정들의 얼굴도 시종일관 반짝거리고 있어서 무슨 동화 속 세계에라도 온 것 같았다.

그는 술잔을 홀짝거리며 웃었다. 이들과의 첫 만남은 좋지 않았다. 욕설과 인격모독은 기본에 서로 칼질까지 했다. 벨로크가 손발을 부러트린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마치 그때의 앙금 따위는 다 털어버렸다는 듯. 서로 웃으며 즐기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 정말 진심일까? 이게 음험하고 성격 더럽다고 생각했던 요정들의 실제 모습일까?

그는 입가로 와닿는 술을 음미하다가 이내 그 생각을 훌훌 털어버렸다. 가식이면 어떻고, 저게 본 모습이면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제 곧 떠날 사람인 것을. 그저 오늘 밤을 흥겹게 놀고, 좋은 기억만 가져가면 되지.

그들은 그렇게 한참이나 먹고 마셨다. 요정들은 우월한 신체 능력을 가진 만큼 주량도 뛰어났다. 벨로크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이 술자리는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갑작스레 마을에 전해진 급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전염병의 치료제가 있다고?

-이자벨의 애인이 데려온 사내 있잖아. 글쎄 그놈이 안젤라씨 아들이래. 왜 그 에밀 장로님의 딸 있잖아? 그런데 걔가···

어느새 준비를 마친 에밀과 막시머그가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가족 혹은 지인들이 걱정되었던 요정들은 우물물을 뒤집어쓰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윽고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병자들을 모아놓은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다들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지금의 고통을 잊기 위한 도피적 행동들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진짜 치료제였던 모양이죠? 다행이에요. 이제 진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자벨이 졸고 있던 화린을 깨웠다.

“아? 끝났어요? 으으음···”

화린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벨로크를 보고 흠칫 굳었다. 그 역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따라 가봐도 되겠나?”

“제가 가면 민폐예요. 환자들은 안정을 취해야지요.”

베시시 웃은 이자벨이 고갯짓했다. 집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일행은 말라붙은 수프 자국이나 술병, 한 입 베어 문 과일, 닭 뼈 등이 굴러다니는 잔디밭을 지나쳐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하니 선객이 한 명 있었다. 천장 아래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금발 요정 이든이었다. 그는 꽤나 오랫동안 바깥에 서 있었는지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든···”

흠칫 놀란 이자벨이 말했다. 이든 역시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무언가 할 말은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정녕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한 쪽이 도망치며 끝나버릴 것 같기에 벨로크는 작은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는 이자벨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어?”

멍한 표정의 그녀가 이든에게 주춤 다가갔다. 벌어져 있던 두 사람의 간격이 짧아졌다. 비틀거린 누나를 동생이 붙잡았고, 동생은 이내 열리지 않던 입을 열었다.

“누나··· 내가··· 내가···”

“이든··· 날 용서해줄래?”

이든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눈물을 주륵 흘렸다. 그는 애처럼 칭얼거리며 이자벨의 품에 안겨 용서를 빌었다.

“쉬이. 괜찮아. 네가 잘못한 것 없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잖아.”

그녀는 철없는 남동생의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해주었다. 화린을 데리고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벨로크는 남매의 해후가 끝날 때까지 마을을 산책했다.

달빛 아래 화린의 얼굴은 붉었다. 하지만 동시에 침울해 보였다. 이자벨이 나타났을 때부터 이랬다. 그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화린에게 뭐라 말을 걸려는 순간. 눈가가 붉어진 이든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

그는 벨로크를 보며 뭐라 입을 열려다가 그냥 고개만 팍 숙이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여전히 누나를 뺏어간 놈팽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 같아도 저런 누나를 웬 남정네가 채가면 화날 만하지. 그가 피식 웃을 때. 이자벨 역시 다가왔다.

“여전히 애라니까요.”

그녀는 후후 웃었다. 미소는 전보다 더 편해져 있었다.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잘 풀렸소?”

“덕분에요.”

싱긋 웃은 그녀가 벨로크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붉은 입술을 핥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럼 이제··· 진짜 돌아가 볼까요?”

“아. 저, 저는 바깥 공기 좀 더 쐬다 갈게요! 술이 덜 깨네요! 하하···”

화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떨어져 나갔다. 이자벨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눈치에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벨로크는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 집에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그녀가 불편해할 것 같았으니까. 어디 방음 마법이라도···

“밤공기가 차요. 적당히 있다가 들어오세요. 화린.”

예의상 말을 건넨 이자벨이 벨로크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화린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모양새였다. 마음 역시도 그랬다. 분명 그와 자신은 특별한 사이도 아니건만 어째선지 속이 쓰렸다.

“하...”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다시금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 주먹이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이 엿 같은 기분이 자신을 끝도 없이 붙들고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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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가지가 살결을 스치는 소리가 사뭇 야릇했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을 여과 없이 비추었다. 몰아치는 폭포 같은 금색 머리, 요정답게 쭉 뻗은 다리와 봉긋하게 솟은 가슴, 고행으로 다져진 탄력적인 복근과 허벅지까지.

“으으음···”

이자벨은 벨로크와 몸을 겹치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마치 목석같은 그의 단단한 몸을 쉴 틈 없이 만지작거렸다. 벨로크 역시 그녀의 창백한 피부에 키스하다가, 묘하게 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문신 새겨진 몸을 쉴 틈 없이 주물럭거렸다. 그녀의 몸은 따뜻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하아. 좋아요. 더, 더···”

두 사람은 마치 오늘이 아니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서로를 탐했다. 열기에 들뜬 그녀의 얼굴이 쾌락으로 일그러졌다. 늘 다른 사람에게 미소 짓던 그 얼굴에는 육욕 밖에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가고 새벽이 이슬이 다가올 때쯤.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누워있던 이자벨이 벨로크의 가슴을 매만졌다.

“벨로크. 자요?”

“아니, 이상하게 잠이 안 오는군.”

“푸흐흐. 당신은 원래 잘 안 자잖아요. 여행할 때도 늘 혼자 불침번을 섰으면서··· 난 처음에 당신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다구요.”

벨로크는 그녀의 얇은 허리를 만지며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그 짧은 잠마저 안 오는군.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 안에는 이 사내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행복감, 만족감, 정복감, 우월감 등이 담겨있었다. 벨로크는 침대에 누운 채, 그녀의 머리칼을 쓸면서 말했다.

“언제쯤 시작할까?”

이자벨은 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뭘요?”

“너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의식 말이야. 난 오늘 정오에 떠날 생각이라 그 안에는 해야 한다.”

“···”

옆에 누워있던 이자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그의 상체에 제 몸을 비벼댔다. 얘가 정말 날 죽일 속셈인가?

“이자벨?”

그녀는 벨로크의 가슴을 핥으며 말했다.

“그 의식이란 거 꼭 해야 해요?”

“뭐?”

“꼭 지금 해야 하냐구요?”

“그야···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시간이 왜 없어요? 당신 설마 날 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그게 무슨···? 넌 고향에···”

“날 두고 갈 생각이었냐구요? 응?”

짓궂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다시금 벨로크의 입술을 삼켰다. 그는 자신을 올곧이 바라보는 녹색 눈을 주시했다. 그 안에는 애정, 사랑, 그리고 끈적한 탐욕 등이 가득했다. 이대로 바라보다가는 끝도 없이 매혹될 것 같았다. 요사스러운 사술이 아닌,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그래서 벨로크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지도 모른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이 힘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 세상은 불확실하고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러니까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쉿.”

이자벨은 검지를 뻗어 벨로크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는 마치 주문에라도 걸린 듯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베시시 웃은 이자벨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면 나도 요정 같은 거 안 하면 되잖아요? 당신 옆에서 악마로 살죠. 뭐. 당신만 있다면··· 그래요. 당신만 있다면··· 난 견딜 수 있어요.”

그녀는 다시금 벨로크에게 입맞춤했다.

“난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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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아아!

거대한 고목이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요정들의 수도 아틸란타에서는 지진이 일어났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지어져 있는 왕궁에서는 우르르 먼지가 떨어졌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한 요정이 손을 뻗었다. 안광이 번뜩였고, 의식 세계를 거쳐 밖으로 뻗어 나온 신비로운 힘. 주문이 사출되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던 고목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비명 대신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흐흐. 엘가르. 이 우둔하고도 거만한 왕아.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언제까지 네 국민들을 속일 수 있을까?]

녹색 머리칼을 가진 섬세한 이목구비의 요정. 수백 년 동안 요정들을 다스려온 현왕. 엘가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중얼거리며 주문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의 손에서 마법진이 번뜩였다. 이는 세계수의 아래에 있던 마법진과 공명하며 그 속에 있던 악마를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악마는 웃었다. 요정 왕국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 이 신비로운 힘이 점차 자신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놈이 말했다.

[네 자만심. 굽히지 않는 그 뻣뻣함이 결국 너와 네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나가 되는 날. 너희들의 파멸을··· 즐겁게 감상해주···마]

엘가르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섬광이 퍼졌고, 악마의 목소리마저 사라졌다. 그는 떨리는 손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대전으로 가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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