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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72화 (17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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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소

대악마 사냥꾼.

대륙을 암흑으로 물들이고 있던 마귀를 처리한 것에 대한 공로는 컸다. 일행의 주장에 신빙성이 실리자마자 그들을 향한 적개심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니까.

물론 일부는 아직도 벨로크와 화린을 탐탁지 않아 했고, 이자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렇듯.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자벨. 내 친구··· 얼마나 힘들었어? 안 아팠어?”

카리나라고 불린 요정이 그녀를 끌어안고 울었다. 전에 이자벨을 향해 쓰레기를 던진 요정과 싸웠던 여인이었다. 카리나의 옆에는 또 다른 요정들도 있었는데. 그들 역시 이자벨을 끌어안고 울고 있거나,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자벨은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주위가 워낙 소란스럽자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그러다가 결국 친분이 있던 요정들의 손에 이끌려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모닥불이 피어올랐고, 술통과 음식들이 차려졌다. 그녀에 대한 속죄. 귀환을 그리기 위한 조촐한 축제가 열린 것이다.

“저기··· 음. 인간들? 당신들 이자벨의 동료들이지? 어때? 같이 먹고 마시지 않을래? 너희들한테도 사과하고 싶어.”

다시 돌아온 카리나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묘하게 친절한 태도였다. 화린이 우물거렸다.

“저희가 가면 분위가 안 좋아지지 않을까요?”

“역병을 퍼트린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너희들이 나쁜 인간은 아니잖아? 저기 있는 애들은 다 그렇게 생각해서 모인 친구들이야.”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화린과 팔짱을 꼈다. 친화력이 대단했다. 이윽고 벨로크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 순간. 가만히 있던 에밀이 말했다.

“카리나. 이분은 나와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죠?”

에밀이 벨로크와 뒤편에 있는 반푼이를 주시했다. 벨로크 역시도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마음만 고맙게 받겠소.”

“그래? 아쉽네. 나중에 시간 나면 놀러 와. 이자벨의 마음을 뺏었다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너어무 궁금하니까.”

“자, 잠깐 벨로크씨가 안 가면 저도···”

“당신은 잔말 말고 따라와.”

짓궂은 표정을 지은 카리나가 화린을 이끌었다. 화린은 충분히 이를 떨쳐낼 수 있는데도 얌전히 끌려갔다. 그녀 특유의 분위기에 휘말린 것이다. 거 특이한 요정이네.

이를 바라보던 벨로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에밀에게 눈짓했다. 세 사람은 장로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시머그는 거실에 놔둔 채, 방 안에 들어간 두 사람끼리만 우선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탁 튀겼다. 그러자 주변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정령을 사용해서 대화가 바깥에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한 모양이다. 직후 요술을 부린 에밀은 후 한숨을 쉬고는 팔짱을 탁 꼈다. 방어적인 자세였고,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우선 당신에게도 사과부터 해야겠네요. 감히 대악마 사냥꾼을 의심하다니.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어요. 우둔한 짓이었죠. 하··· 얼마나 우리가 같잖게 보였을까?”

전혀 사과하는 태도로 보이지 않았다. 말투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으며 얼굴 역시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래, 어쩐지 너무 순순히 수긍한다 했지.

“또 뭐가 문제냐. 이 늙은 귀쟁아. 나는 네가 시킨 대로 괴물을 처리했고 넌 사과를 했다. 결과적으로 이자벨의 억울함도 풀렸고, 네 마을은 안전해졌지. 괜찮은 거래 아니었나?”

벨로크의 막말에 에밀은 잠깐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곧 피식 웃었다.

“여자한테 늙은이라니··· 이거 정말이지 막말하는 칼잡이셨군. 이자벨은 그렇게 끼고 살면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에밀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미래를 생각했다면 당신에게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내가 이렇게 행동한다는 건? 나한테 미래가 없다는 얘기에요. 몇백 년 동안 쌓아왔던 내 노력들이 이제 끝장나게 생겼으니까.”

벨로크는 잠깐 주변의 정세와 에밀의 위치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네 정치적 생명이 끝난 걸 왜 나한테서 찾아?

“새꺄. 그래서 그게 내 탓이란 거냐? 처음부터 우리를 겁박한 놈들이 누군데?”

벨로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에밀은 어깨를 으쓱였다. 될 대로 되라는 식 같았다.

“미안해요. 난 원래 이런 년이라··· 하! 그보다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간단해요. 어떻게 그 왜곡을 간파했죠?”

“왜곡?”

“히드라를 단번에 죽인 것도 놀라웠지만, 난 멜러니와 아르단이 당했을 때. 내 두 눈을 의심했어요. 그 둘은 믿지 못했지만, 선조께서 물려주신 가보는 믿고 있었거든.”

투명망토를 말하는 것 같았다. 벨로크는 감각의 어긋남 사이에서 찾아낸 한 줄기 이질감. 육감도 아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제 삼의 눈 같던 능력을 뭐라 설명할지 잠깐 고민했다. 생각을 마친 그가 말했다.

“감으로.”

“감이요···? 하, 하하하··· 그건 이 요정왕국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인데. 그걸 그렇게 파훼했다고? 내가 그 지랄을 떨었으니 돌려달라고 해도 주지도 않을 테고. 아아. 선조들을 어떻게 뵌담.”

에밀은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짓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윽고 다 포기한 듯 무릎을 양손으로 감싼 채, 혼자서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내 치부를 가리기 위해 당신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득을 해도 내가 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에요. 어쩌면 극단적인 순혈주의자들이나 인종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할지도 몰라요. 다 당신들 때문이야. 당신들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음습한 요정은 애처럼 칭얼거렸다. 이쯤 되니 짜증보다도 황당함이 올라왔다. 그는 이 요정의 푸념을 더 들어주기보다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했다.

“궁금증은 다 풀렸나? 그렇다면 내 얘기를 하지. 오해가 풀렸으니 이자벨이 다시 이 마을에 머무를 수 있겠지?”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이자벨은 당신 아내 아니었어요? 왜? 당신도 여기 눌러앉으시려고?”

“···난 떠날 생각이다.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하지만 그녀는 고향에 남았으면 좋겠군.”

에밀은 잠깐 벨로크의 씁쓸한 표정. 그리고 결심이 서린 눈을 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 년놈들을 보고 있자니··· 어째선지 짜증이 났다. 정확히는 인간 사내와 요정 여인의 관계가 그녀의 과거를 건드렸다.

“당신 방금전의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사하거나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꼭 그들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부족이나 수도에서 사람이···”

“그녀가 다시 요정이 된다면 다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마력에 타락한 육체와 영혼을 다시 되돌린다구요? 그건 불가···”

얘기하던 에밀이 입을 닫았다. 사내가 보여준 미증유의 힘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으니까.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당신. 이자벨을 정말로 사랑하는군요.”

“···”

“하. 그래요. 생각 잘했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일이 해결되겠네요. 이자벨은 마을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을 거고 여생을 이곳에서 편히 보낼 거예요. 그래, 맞아. 요정은 요정답게 요정들하고 지내야지. 어딜 인간하고···”

시니컬하게 중얼거린 에밀이 축객령을 내렸다.

“할 말 다 끝났으면 이제 나가봐요.”

“아직 한 가지 남았다.”

“뭔데요?”

“당신도 알겠지만 난 요정들과 인간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을 만나야 해.”

“당신이 뭐 인간들의 대표라도 되나요? 그렇다고 해도 왕은 이미 전쟁을 일으킬 생각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러니까 이 얘기를 나한테 꺼냈다는 건 나보고 아틸란타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얘기죠? 내가 왜?”

에밀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벨로크는 이대로 가다간 수많은 피가 흐를 거라느니. 주변의 이웃을 생각하라느니. 말하지 않았다. 저건 끝까지 이기적인 년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였으니까. 그러니까 저년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걸 던져줘야 이 거래에 응하겠지.

“아. 참고로 히드라를 죽여준 것에 대한 걸로 퉁치자고는 하지 말아요. 그것에 대한 대가는 이미 줬잖아요? 뭐, 당신이 가져간 선조들의 유산을 다시 되돌려준다면 생각 좀 해보죠.”

“역병에 대한 치료제가 있다.”

“그게 무슨···”

에밀은 황당하다는 듯 큰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곧 떠듬떠듬 말했다.

“당신 약학이나 연금술에도 소질이 있었나요?”

“나는 아니고, 내가 데려온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군. 비록 시체에 밖에 실험해보지 못했지만, 치유가 가능했다던데.”

“그 반푼이를 말하는 거군요.”

상황을 파악한 에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라의 온 국력이 모여서 역병에 대한 원흉과 치료제를 찾고자 했건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근데 이에 대한 해결법이 그딴 잡종에게 있다고? 그녀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마법사의 시각으로 접근해보았다.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미약하나마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0에 수렴하지 않는다. 길거리의 거지에게 갑작스럽게 신의 은총이 내리듯. 기적이 일어날 확률도 있으니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한층 더 강한 권력을 쥘 수도 있었다. 나라에 드리운 망조를 걷어내게 된 셈이니까.

에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감추며 손뼉을 쳤다. 대화를 차단하던 바람 장막이 사라졌다.

“바로 확인해보도록 하죠. 만약 정말 그 반푼이가 치료제를 들고 있다면··· 그래요. 그를 데리고 온 것은 당신들이니까. 내가 책임지고 당신들을 수도로 데리고 가주도록 하죠.”

이 년이?

“어디서 말장난이냐? 나는 분명 왕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벨로크가 주먹을 꾸욱 쥐자 에밀은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아, 알았어요. 내가 책임지고 왕과 대면할 수 있도록 해주죠. 단 치료제의 진위여부를 확인 후에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은 상기된 얼굴로 바깥에 있던 막시머그를 불렀다. 그가 자리에 앉자 에밀은 치료제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막시머그가 먼저 사정을 설명하자 싱글거리던 얼굴을 석상처럼 굳혔다.

“네가··· 안젤라의 아들이라고···?”

“네. 그게··· 음. 할머니.”

막시머그는 젊은 외관을 가진 에밀에게 이런 호칭이 입에 붙지 않는지 떠듬거렸다. 그러다가 곧 놀랐는데. 에밀이 배를 부여잡고 낄낄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하하하··· 이거 어이가 없네. 오래전. 내 멍청한 딸년과 그 놈팽이 사이에서 난 자식이 이렇게 나를 찾아온다고? 그것도 모진 대륙 살이에 후회하다가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유언을 남겨? 이봐. 당신! 알고 있었지? 알면서도 이 새끼를 내 앞에 데려와?!”

말투가 바뀐 에밀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벨로크를 노려봤다. 막시머그는 자신의 혈육에게 막말을 듣자 당황했다. 방 안의 분위기는 그와 에밀이 독대를 하던 때보다도 더 안 좋아졌다. 그 사이에 있던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뭐?”

“뭐?”

“네가 안 물어봤잖나? 그리고 저 친구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이··· 양아치가!”

얼굴이 붉어진 에밀이 씩씩거렸다. 그러다가 곧 후 심호흡을 하고는 애써 고개를 막시머그에게 돌렸다.

“너! 반푼이!”

“네, 네! 할머님.”

“닥쳐! 내가 왜 네 할머니야? 난 너 같은··· 그 더러운 인간 놈의 핏줄 따위 용납할 수 없단 말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사특하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주문을 끌어올리고 싶어 하는 요술쟁이의 눈이었다.

막시머그는 히이익 겁먹으며 벨로크의 뒤편에 숨었다. 결국 이 자리에서 침착한 건 벨로크뿐이었다.

“네놈이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고? 그건 어떻게 만들었지? 임상실험은 어느 정도나 했고? 약이 효과를 나타내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가?”

에밀은 자신의 손자를 닦달하며 으르렁거렸다. 막시머그는 벌벌 떨면서 벨로크의 눈치를 봤다. 요정들에게 혐오를 받을 것은 예상했지만, 혈육에게까지 이런 취급을 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에밀에 대한 좋은 이야기들이 깔려있었다. 뭐, 세상이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지. 가족이라고 다 친한 것도 아니고.

벨로크는 막시머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안에 담긴 힘. 혹은 굳은살에 어떠한 안정감을 느낀 막시머그가 입을 열었다.

에밀은 곰곰이 이를 듣다가 그로부터 치료제를 건네받아 잠깐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돌아왔는데. 그녀의 얼굴은 덤덤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저 가면 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움, 분노, 안도, 역시나 버리지 못한 욕심. 등이었다. 덕택에 치료제의 효능 역시 알 수가 있었다.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 그가 속으로 웃을 때. 에밀은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서 다시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진짜로군··· 진짜 치료제야. 염증이 사라지고 반점이 사라졌어. 호흡 역시 눈에 띄게 안정되었고 말이야··· 나라의 대신관이나 내로라하는 연금술사들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네가 해냈다고? 하. 안젤라. 너는 정말···”

그녀는 탁자에 팔을 올려놓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윽고 후 한숨을 쉬고는 막시머그에게 말했다.

“그래··· 반푼아. 너. 우리 마을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어머니. 안젤라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그래서 이 먼 길을 달려와 치료제를 만들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할머, 아니, 에밀님. 하지만 지금 당신의 반응으로 봐서 이것도 딱히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던 것 같군요. 좀 더 고민을···”

에밀이 그의 말을 끊었다. 호칭도 바꿨다.

“빌어먹을 꼬맹아. 넌 나를 이해해줘야 해. 애지중지 키워왔던 딸을 웬 놈팽이에게 뺏겼던 부모의 마음을··· 그리고 그 딸년이 대륙에서 비명횡사하고 결혼생활을 후회했다는 얘기를 들은 내 마음을 말이야··· 시발.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건만.”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의 관계는 좀 더 시간을 두고 풀어나가는 것이 어떻겠니?”

막시머그는 벨로크를 힐끔 바라봤다. 아니 얘는 아까부터 왜 계속 내 눈치를 보는 거야? 의존증인가? 그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겨우 답했다.

“···그러죠.”

두 사람은 꾹 입을 다물었고, 벨로크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걸로 거래 성사로군.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길 바라지.”

에밀은 그를 보며 짜증 어린 표정을 짓다가 돌연 입매를 비틀었다.

“잠깐만. 이게 정녕 맞는 거야?”

“뭐가 말이냐?”

“네가 저 아이를 데리고 온 공로는 인정해주지. 하지만 그는 결국 내 피붙이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뭐? 네 손자니. 너의 말을 들을 거라는 얘기인가? 치료제가 손자의 업적이니 그것도 결국 네 물건이라는 뜻이야?”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서 거래의 내역을 좀 바꾸었으면 한다면? 왕과의 독대는 무리고 수도까지 데려다주는 걸로 말이야.”

에밀의 말은 어떠한 논리도 없는, 그저 바보 같은 치기와 유치함에 가까운 생떼였다.

마법사에게 어울리는 발언도 아니었고, 수 백 년 동안 마을의 지배자로 활약해온 장로가 할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던졌다.

저 사내가 너무 얄미웠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파묻어온 감정을 오랜만에 마주한 그녀는 잠시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벨로크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똑같이 되돌려주기로 했다.

“아니,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내가 저 친구의 멱을 따버릴 테니까.”

그는 막시머그를 가리키며 흉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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