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해소
어쩌면 한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전설에서나 나오던 괴물을 퇴치한 순간.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가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동안 히드라가 쌓아온 격을 흡수한 것이다. 덕분에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성 또한 한층 더 강해졌다. 하지만···
강해진 것은 노르드만이 아니었다. 내면에 있던 절대신 또한 이를 경험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흡수했다. 새로운 스킬이라는 형태의 기이한 힘 역시 나타났다.
[만독불침]
양쪽의 힘이 점점 더 강해져 간다. 지금도 그 두 존재는 자신의 안에서 맹렬히 싸우고 있을 것이다. 중간에 낀 것은 벨로크였고, 까딱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언제쯤 일이 이렇게 틀어지게 됐는지 생각했다.
부모님을 잃고.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뭔가를 하려 했을 때? 그러다가 결국 돌고 돌아 이 게임에 손을 댔을 때? 도적, 괴물, 악마에 이어 이제는 신이라니.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군.’
벨로크는 화린의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이제 좀 괜찮소?”
“감사해요. 벨로크씨.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했네요···”
다 죽어가는 혈색이던 화린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신성을 이용해 화린의 체내에 있던 독을 제거한 후. 세 사람은 미리 준비해온 그물에 증거품인 히드라의 머리를 넣었다. 하지만 피에서 흐르는 맹독 때문에 얼마 끌지도 못하고 그물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결국 벨로크와 이자벨이 각각 하나씩 짊어지고 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거대한 괴물의 머리통을 가볍게 들 만큼 힘이 좋았으며, 맹독을 견디는 신체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곳에는 아공간 주머니 같은 것은 없나?”
고향에 대한 향수, 지들이 일을 시켜놓고도 하나부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요정들에 대한 불만.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벨로크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가 있던 세상은 빠르고 편했지만, 이 세상은 느리고 불편하기만 했다.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통을 짊어지고 가던 이자벨이 말했다.
“아공간 주머니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대략 어떤 건지 짐작은 가네요.”
그녀는 고생하는 벨로크를 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결심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모든 병을 고쳐준다는 일각수의 뿔이나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용인의 눈 같은 보물들은 들어봤지만, 걸어 다니는 창고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요. 그런 게 있다면 이 대륙의 상권부터가 확 뒤바뀌었겠죠.”
왕족이나 마탑주 같은 애들은 몇 개 들고 있지 않을까? 그가 생각할 때.
“저기··· 음. 저도 좀 거들어드릴까요?”
눈치를 보던 화린이 우물쭈물 말했다. 벨로크와 이자벨은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죽다 살아난 사람이?
“또 쓰러지지 말고 얌전히 있으시오.”
“화린. 당신은 환자예요. 자기 몸을 좀 더 소중히 하도록 하세요.”
세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장애물도 없었고 앞을 막는 괴물들도 없었다. 곧 마을을 목전에 두고 있는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웬 상처 투성이의 요정이 쓰러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마을에 있던 요정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아니, 가만··· 이 사람. 그냥 요정이 아니에요.”
그냥 요정이 아니면 또 뭔데? 귀족 요정 그런 건가? 쓰러져 있는 자를 살피던 이자벨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곧 사내의 얼굴 쪽을 손가락질했다.
“하프예요. 인간과 요정 사이의 혼혈 말이에요. 봐요. 귀가 제 것에 비해서 좀 더 짧죠? 그리고 얼굴도 나이를 좀 먹은 것처럼 보이구요.”
화린과 벨로크는 턱수염이 조금 나 있는 30대처럼 보이는 요정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귀가 좀 더 짧았다. 인간의 것보다는 길고, 요정의 것보다는 짧은 애매한 길이였다. 그는 허리춤에 가방이며 여러 약초나 유리병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화린 역시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다.
“이 사람! 그때 그 사람이에요! 이사벨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인간 사냥꾼들로부터 구해준 사람이요. 어디로 갔나 했더니 길을 잃고 헤매다가 쓰러졌나 봐요.”
“운이 좋은 사람이군요. 마침 근처에 있던 괴물들이 다 죽거나 도망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이자벨이 수통을 열어 사내의 얼굴에 붙자 그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으푸푸풉! 여··· 여기는? 헉! 아, 악마!”
사내는 이자벨을 보고 기겁을 했다. 이자벨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정신 차렸으면 어디 개척촌이라도 찾아봐요. 이곳은 괴물만이 아니라 요정 순찰대들도 밥 먹듯이 드나드는 곳이니까.”
그녀의 의미심장한 미소와 말에서 요정들이 혼혈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행은 그 말을 끝으로 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잠깐 스치듯 본 그를 향해 사정을 설명하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도리는 다했으니 알아서 살겠지.
“자, 잠깐만요! 이쪽 길로 가시는 걸 보니 몰아치는 폭풍 부족으로 가시는 거죠?”
그러나 화린과 벨로크의 얼굴을 알아본 본 사내가 그들을 붙잡았다. 그는 두 사람이 지고있는 거대 괴수의 머리와 이자벨을 두려운 듯이 쳐다보았지만, 이내 자신의 사정을 밝히며 동행을 요청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생면부지의 남한테 신경을 써줄 정도로 여유롭지가 않았으니까. 하지만 사내가 내뱉은 충격적인 말이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당신이 전염병의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고?”
#
사내의 이름은 막시머그였다. 그는 인간 사내와 요정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느 날 아비는 행방불명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곳의 정서상 혼혈은 취급이 안 좋다. 요정들은 대놓고 혐오하고, 인간들은 배척한다. 하지만 모자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대단한 의술사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막시머그 또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그 일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의술 실력을 살려 대륙에서 잘 먹고 잘살면 될 텐데.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부족을 나왔으니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게 맞지만, 저는 아니라면서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에게 인정받고 그들의 사회로 들어가라더군요. 마침 사람들의 악의에 질려있던 저는 반쯤 도피성으로 유언을 따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도 찾아낼 수 있었죠.”
막시머그는 어머니와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머니의 죽음에 인간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듣고 있던 이자벨이 말했다.
“역병에 대한 치료제를 제공함으로써 요정 사회에 끼어 들어갈 생각이었군요.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가능하겠네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자들에 한해서는 그 꽉 막힌 마을 법도 융통성을 발휘할 때가 있으니까.”
“그 치료제라는 게 진짜라면 말이지.”
그는 이곳의 치료사라는 놈들의 수준을 잘 알았다. 의학보다는 신학과 철학에 더 가까운, 주먹구구식 민간요법들을 주워들은 놈들이 태반이었다. 괜히 높은 사람들이 성금을 주고 교회에 가서 성법 치료를 받는 게 아니었다. 막시머그는 벨로크의 불신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환부에 똥오줌을 바른다거나 느닷없이 팔을 잘라야 한다는 돌팔이들과는 비교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 어머니의 가르침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는 가방을 뒤져 유리로 된 플라스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안에서 넘실거리는 액체는 짙은 보랏빛이었다. 물약 치료인가? 썩 좋아 보이는 색은 아닌데?
“역병에 걸려 죽은 요정의 시체에서 표본을 수집해 제 나름대로의 비전으로 만든 약입니다. 비록 임상실험은 시체에 밖에 하지 못했지만··· 아니, 확실합니다. 이건 치료제예요!”
화린과 이자벨은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늘 약초나 사제의 치료만을 받아온 그들로서는 표본이니 실험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이놈이 완전히 돌팔이는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바이러스나 세균의 숙주로부터 표본을 수집해 백신을 만든다는 것이. 그가 알고 있던 의학의 토대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거 일이 괜찮게 풀리겠는데. 요정들의 적개심을 줄일 수 있겠어.
“그래서 혼혈인 당신은 요정에게 말도 못 붙이니 우리더러 대신 교두보 역할을 해달라는 거로군?”
“맞습니다. 사례는 하겠습니다.”
그는 인간 사냥꾼들에 뺏겼었던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안에는 금화니 은화가 가득했다. 정말 실력 있는 의술사였던 모양이다.
“사례는 괜찮소. 당신의 의도대로 된다면 우리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자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다들 괜찮나?”
손을 저은 벨로크가 일행을 향해 물었다. 화린이야 고개를 끄덕였고, 이자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력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병이니. 지금으로서는 이에 기대어 보는 것도 좋았으니까.
“진상을 파악한다고 한들. 치료제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니까요. 혹시나 이든이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말끝을 흐린 그녀가 말했다.
“참. 우리 마을에 당신의 가족이 있다고 했죠? 혹시 이름을 알고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막시머그는 기억이 잘 안 나는지 한참을 떠듬거리다 말했다.
“그러니까··· 에밀, 에밀이라고 들었습니다.”
세 사람은 헛웃음을 지었다. 음험하고 약삭빠른 장로의 치부를 하나 엿 본 느낌이었다.
#
두꺼운 목책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무슨 언질이라도 받은 건지 마을 안에는 요정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에밀과 순찰대원들이 있었다. 이든은 보이지 않았다.
“환영 인사가 거창한데.”
보라빛 머리칼을 한 요정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당황하지도 않았고, 덤벼들지도 않았다. 혹시나 저 여자가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릴까 싶어 미심쩍어하던 벨로크는 짊어지고 있던 히드라의 머리를 던졌다. 쿵 소리와 함께 시체에서 튄 피가 피가 잔디들을 녹였다.
“우리는 약속을 지켰소. 놈을 사냥했고, 이건 그 증거품이요. 믿기지 않는다면 늪지로 가서 확인해보셔도 좋소.”
에밀은 히드라의 유해를 잠깐 바라보다가, 벨로크와 이자벨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럴 필요는 없다? 암살자까지 보낸 사람치고는 빠르게 수긍하는데?”
그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음에도 에밀은 덤덤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마치 체념한 듯이 혹은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한 눈으로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바람의 속삭임이. 대지의 눈이. 물의 손길이 알려주었으니까요. 당신들이 정말 늪의 괴물을 처리했다는 걸. 자칫하면 사라질 수도 있었던 우리 마을을 구원해주었다는 것을.”
정령을 이용해 그들의 전투를 지켜봐 왔다는 뜻이었다. 벨로크는 그녀의 표정 속에서 한 가지를 더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압도였다.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어떠한 강대한 존재를 마주치게 된 것에서 온 경외심. 공포, 위압. 뭐라 말해도 좋을 감정들.
떨리는 그 시선은 오직 벨로크를 향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약속을 지킬 시간이오. 내 여자에게 했던 그 모진 말들과 치욕에 대해서 사과하시오.”
“벨로크···”
이자벨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고, 그는 팔짱을 턱 꼈다. 저 자존심 높고 도도한 척하는 요정 놈들이 이번에도 강짜를 부린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속셈이었다. 뭐, 꼬라지를 보면 그럴 것 같기는 한데···
그 순간. 털썩. 느닷없이 아멜이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그녀는 양손을 맞잡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자벨.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 너 자신을 희생한 고결한 아이야. 믿지 못해서 미안하다. 불신해서 미안하다. 부디··· 부디 이런 우리를 용서해 주겠니?”
“미안해. 이자벨.”
“우리가 잘못했어. 내 얼굴에 마음껏 욕하고 침을 뱉어도 달게 받을게.”
이멜을 따라 순찰대원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그 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이자벨을 의심했던 사람, 속으로나마 그녀를 욕했던 사람들 모두가 종래에는 무릎을 꿇었다. 하나같이 시건방지며 얼굴만 이쁘장한 요정 놈들이 취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아, 아···”
이자벨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만졌다. 폭포가 쉴 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목에서는 가쁜 숨이 나왔고, 얼굴에는 열이 뻗쳤다.
나고 자란 동포들에게 괴물이라 지탄받고, 가족에게 냉대받고.
그 얼마나 힘겹고 끔찍한 시간이었던가.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던 울분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자신의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뻗은 콧대와 눈매. 그리고 입매는 자신을 바라보며 슬쩍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냉정한 듯 보이고 무심한 듯 보이면서도 제 사람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거기서 이자벨은 스스로의 결심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난 이자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