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사냥
나무가 우지끈 쓰러졌다. 두 요정은 자신도 모르게 낙법을 펼쳤다. 그러나 30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떨어진 것은 큰 충격이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한 움직임에 의해 망토가 벗겨져 버리고 말았기에, 그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굴렀다.
"마법 물품인가? 기척도 못 느꼈는데... 저걸 또 어떻게 찾으셨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을 보며 화린이 혀를 내둘렀다. 두 요정 역시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충격의 여파가 남아있었기에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옅은 신음 뿐이었다.
“멜러니? 아르단?”
당황한 이자벨은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는 얼굴인 듯 싶었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벨로크는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뽑아 들었다. 화린 역시 시뻘겋게 물들어있는 건틀릿을 꾸욱 쥐었다.
세 사람이 그들을 내려다보자 신음하던 아르단이 검집으로 손을 갖다 댔다.
“이익.”
“잠깐!”
멜러니가 그런 아르단의 손을 잡으며 제지했다. 이윽고 세 사람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 하하. 인간들. 그리고 이자벨. 안녕?”
뭐야. 이 미친년은?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지었음에도 멜러니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찔끔 눈물을 흘리다가 옷에 묻은 흙먼지도 털어냈다.
“아야야. 아파라···”
이윽고 여유로운 태도를 간직한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벨로크의 칼날이 목에 드리우자 우뚝 멈췄다.
“너. 뭐하냐.”
“저기 그 칼 좀 치워주지 않을래? 목숨이 위협당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데.”
벨로크는 칼날을 더 밀어 넣는 것으로 답했다. 요정의 하얀 목에 피가 주르륵 흘렀다. 가까워지고 있는 죽음에 그녀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맥동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점점 차가워졌다. 마법사로서의 침착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멜러니!”
옆에 있던 아르단이 나서려 했다. 하지만 이자벨이 가슴을 턱 밟자 그는 숨이 턱 막혀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컥.”
“움직이지 마.”
이자벨의 눈동자는 얼음장 같았다. 이들과 사이가 안 좋거나, 뒤를 밟은 의도를 깨달은 것 같았다. 아니면 무언가 결심이 섰거나. 멜러니는 아르단보고 진정하라고 소리치더니 느닷없이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깐! 우리는 너희들을 적대하러 온 게 아니야. 오히려 도움을 주러 온 거라고.”
이 귀쟁이년이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도움?”
“그래!”
“길 안내는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나도 아는 곳이니까.”
이자벨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벨로크도 옆에 뒹굴고 있던 망원경과 망토를 가리켰다.
“도움을 준다는 놈들이 멀찍이서 구경만 하나? 그것도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마법 물품까지 써가면서?”
“개소리도 이쯤 되면 신박하네요. 이봐요!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왜 우리 뒤를 밟았어요? 장로가 시키던가요? 우리를 감시하거나 죽이라고?”
어이가 없는지 화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목에는 칼이 들어와 있고, 옛 동료는 자신들을 봐줄 기미도 안 보인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멜러니는 침착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소리쳤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기는 해! 하지만 들어봐! 너희가 어제 우리들을 무릎 꿇렸잖아! 거기다가 너희 동족들은 역병을 퍼트렸고, 이자벨은 왕국을 습격했던 괴물들과 같은 악마가 되어있어! 당연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없지!”
멜러니는 목이 타는지 콜록 기침했다. 이윽고 마른 입술을 앙다물다가 다시금 말했다.
“그렇지만 장로님은 너희들을 도와주라 했어! 길 안내든, 아니면 괴물 사냥이든, 그도 아니면 히드라의 죽음에 대한 확인이든! 그래서···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어. 장로님의 명령은 따라야 하지만 우리들도 감정이 있으니까! 말하는 대로 듣는 인형이 아니니까! 그 잠깐의 망설임이 지금의 사태를 만든 거야!”
“웃기는 소리. 너희들은 에밀 장로의 말이라면 뭐든 따랐잖아. 오죽하면 그녀의 발 닦게나 심부름꾼, 개인 호위라고 불릴 정도겠어?”
이자벨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멜러니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잠깐의 세월이라 해도 지나간 시간은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지. 믿어줘. 우리는 결백해.”
멜러니는 명확한 증거 없이 그저 감정에 호소했다. 그녀의 눈은 간절했다. 흔들리는 동공은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 외치고 있었으며,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힘을 합쳐 그 괴물에게 맞서 싸우자고 말하고 있었다.
‘이놈 봐라?`
그러나 벨로크는 애타는 눈동자의 일면에 감춰져 있던 음습한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거짓, 욕망, 안도, 교활함 등이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뒤통수를 맞기 전. 당장에 주먹을 휘둘러 저 이쁜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땅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 마법 물품들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가져온 거라고 둘러대면 그만이고, 그들은 세 사람에게 아직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현재 그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요정들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려 노력 중이었다. 여기서 저들을 죽이면 그동안 노력해왔던 관계는 파탄 날 것이었다.
저 년 또한 저걸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되도 안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거겠지. 이 마을에는 여우들이 참 많군. 이자벨은 양반 수준이었어.
벨로크는 무심한 얼굴로 십자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칼날은 멜러니의 머리칼을 몇가닥 베어냈을 뿐이었다. 그는 검을 집어넣으며 살짝 웃었다.
“개소리인 거 본인도 알지?”
멜러니는 손을 벌벌 떨다가 짐짓 여유롭게 말했다.
“하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보다 이자벨? 그 냄새 나는 아니, 발 좀 치워줄래? 아르단이 죽으려 하잖아.”
이자벨은 뭐라 입을 열려다가 슬쩍 발을 치웠다. 하지만 그녀의 녹색 눈은 점점 탁해지고 있었다. 마치 치명적인 독을 보는 것 같았다.
“커억. 후우. 후우.”
멜러니는 이자벨을 노려보며 숨을 몰아쉬는 아르단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윽고 그녀는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망토를 집어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러면 머리 아홉 달린 뱀을 죽이러 가보자고. 참. 우리는 지금까지 해 온 것 처럼 조금 떨어져서 당신들을 따라가려 해. 자칫하면 휘말릴 것 같거든.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때?”
“뭐, 이런 사람들이···”
그 뻔뻔함에 화린은 말문이 턱 막힌 듯 고개를 저었다. 벨로크는 그냥 몸을 돌렸다. 놈들이 수작질을 부리기 전에. 그 괴물을 처리해버릴 생각이었다. 두 요정은 싱글싱글 웃고, 인간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우두커니 서 있던 악마가 말했다.
“하···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 주려 했는데. 너희들은 도저히 안 되겠다. 마을을 위해서라도, 동족들을 위해서라도.”
“어머, 오해는 풀린 것 아니었어? 어떻게 할 건데? 뭐 죽이기라도··· 컥. 켁켁.”
웃고 있던 멜러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가운 표정의 이자벨이 그녀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음?”
“자, 잠깐만요!”
두 사람이 당황했다. 아르단은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자벨의 번뜩이는 안광과 마주하자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한 손에 멜러니의 목을 쥔 채, 벨로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한테 맡겨주세요. 이 녀석들 버릇을 좀 고쳐주게. 겸사겸사 장로의 꿍꿍이 역시 알아채는 게 좋겠어요. 뭐, 예상은 가지만···”
저건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은 자의 눈이 아니었다.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니까. 불만은 없길 바래.”
입술을 핥은 이자벨이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새겨진 문신이 불길한 빛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넘어 불꽃처럼 타올랐다.
“컥. 커어억. 억.”
이자벨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멜러니의 버둥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곧 이자벨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르 풀렸는데. 멜러니는 입을 헤 벌린 채,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 있었다.
“아, 아아아···”
쥐고있던 그녀의 목을 풀어준 이자벨이 이번에는 아르단을 쳐다봤다.
“메, 멜러니... 더, 더러운! 사술··· 이··· 억.”
아르단은 유일하게 돌아가는 눈동자를 굴리며 저항했지만, 곧 멜러니와 같이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려댔다. 한순간에 두 사람을 매혹시킨 이자벨이 쪼그려 앉아 턱을 괴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탁탁 튀기자 두 요정은 움찔 몸을 떨다가 입을 열었다.
“네, 네. 나의 주인이시여.”
그 모습을 보던 이자벨이 미소를 지었다. 갑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건만 색기가 절절 흘러넘쳤다. 저건 또 언제 배웠어···? 곧 창백한 피부와는 반대되는 새빨간 입술이 열렸다.
“자. 너희들이 감추고 있던 비밀들. 모조리 토해 내봐. 에밀이 무얼 시켰지? 저 망토랑 뿔피리는 또 뭐고?”
두 요정은 술술 입을 열었다. 심령을 제압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토해내는 것이기에 망설임도, 막힘도 없었다. 이것이 악마가 가진 권능의 무서움이었다.
“역시나 그 늙은이답네요. 끝까지 신중한 것 하며, 자기가 도망칠 구석쯤은 파놓는 것 하며···”
상황을 알게 된 이자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분노한 화린이 말을 받았다.
“처음부터 미끼로 쓸 생각이었는데. 벨로크씨 덕분에 계획이 꼬여버린 거군요. 그렇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의 안전이 걸린 문제건만··· 자기 권력만 탐하다니···”
역시 인간이나 요정이나 다를 게 없다니까. 생각하던 벨로크가 툭 내뱉었다.
“그나저나 이 친구들은 어떻게 하지?”
“맡겨둬요. 우리가 일을 끝마쳤을 때. 이들은 훌륭한 증인이 되어줄 거예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이자벨이 다시금 손가락을 튀겼다. 이윽고 현혹된 두 요정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아르단, 멜러니. 너희들은 여기서 잠시 대기하다가 마을로 돌아가서 에밀에게 전해. 우리가 히드라를 사냥했고, 너희가 그런 우리들을 죽인 거야. 가지고 있는 주문서들과 마법 물품들은 격전을 치르는 도중 분실한 거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주인님.””
이자벨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거만하게 손짓했다.
“그래, 가봐.”
꾸벅 고개를 숙인 요정들이 땅을 박찼다.
"괜히 피를 보지도 않고, 마법 물품도 챙기고... 나중에 가서는 장로를 압박할 수도 있겠네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에요. 하지만, 좀..."
겨우 그녀와의 마음을 좁혔던 화린은 또다시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친절하던 이자벨이 보여준 낯선 모습과 사원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나는 모양이다.
물론, 벨로크는 그녀의 저 모습이 익숙했다.
그 옛날 이자벨은 자신의 동료들을 죽인 마녀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영전에 바쳤다. 일견 나긋나긋해 보이지만, 결코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닌 것이다.
이제야 좀 털고 일어난 건가?
그나저나 상대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이라니. 적으로 상대할 땐 몰랐는데. 아군이 되니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다. 그가 물었다.
“그런 능력은 또 언제 깨우친 거야? 녹색 광선도 그렇고.”
“당신이 사라졌던 날. 불의 거인이 쓰러졌던 그 날 기억해요? 우리들은 그때 영문도 모를 큰 상처를 입었었죠. 아델과 카라는 정신을 잃은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나 역시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악마의 사체를 뜯어 먹었는데. 그때부터였어요. 살의와 증오, 분노가 내 머리를 채웠던 게. 하지만 그 반대로 내 힘은 강해졌죠. 이것도 그 능력 중 하나에요.”
아스타로트 그년이 저런 능력을 사용하기는 했었지. 대악마의 유해를 섭취함으로써 악마의 능력을 각성시키는 건가? 그렇다면 다른 놈들의 유해를 섭취하면 저기서 또 다른 능력을 얻는다고?
벨로크는 혀를 내둘렀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있을 절대신과의 싸움이나 다른 대악마들을 상대 할 때.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벨로크는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녀가 있을 곳은 이런 진흙탕 가득한 전장이 아니었다.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그곳에 정착해야지.
그는 이자벨의 어깨를 쓸었다.
“굳이 여기서 더 늘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이제 그 힘이 필요할 일은 없을 테니까.”
시선을 내리며 글쎄요. 라고 중얼거린 이자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후회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그 덕분에 아델과 카라를 구할 수 있었으니. 그거면 충분해요. 그보다···”
이자벨은 두 요정이 가지고 있던 물품들을 들어 보였다.
“이것들은 쓸만하겠는데요. 특히나 이 망토랑 뿔피리는 아주 귀한 거에요. 내 생각에는 장로의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귀물인 것 같아요.”
"생긴 것 부터 범상치 않아 보이기는 했어요. 세상에...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 전신을 마비 시키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도 믿기 힘드네요."
기분이 찝찝했던 화린은 대화의 주제를 돌리기 위해 괜스레 그녀의 옆에 붙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화린을 보고 싱긋 웃어준 이자벨은 용의 숨결과, 벼락의 창, 몰아치는 빛 등 무시무시한 주문이 새겨진 스크롤들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별이 촘촘히 새겨져 있는 남색 망토와 상아를 깎아 만든 몸체에 황금 고리가 걸려있는 뿔피리를 들어 보였다.
남색 망토는 예상대로 투명 망토였고, 뿔피리는 대상자의 정신력을 담보로 주변에 강력한 마비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었다.
아주 단단히 준비했었군. 뭐, 소용 없는 일이 되었지만.
이자벨로부터 뿔피리와 망토를 건네받은 벨로크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봐왔던 마법 물품들 등 중에서 제일 특이하며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활용도도 높았다.
그가 좋아하자 이자벨 역시 덩달아 기뻐했다. 그녀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세상을 불태우던 악룡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녀석의 울음소리를 담아둔 보물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구요. 광룡의 뿔피리라는 이름은 필시 거기서 유래한 거겠죠.”
“그 에밀이라는 요정. 어마어마한 부자였네요.”
사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던 화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년의 가문이 우리 마을의 장로 노릇을 한지도 꽤나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까요. 게다가 계보를 따라가 보면 귀족 출신이었다는 말도 있었어요. 뭐, 이제는 그 권력을 내려놓게 되겠지만.”
이자벨은 이제 존칭도 붙이지 않았다. 그래, 조금 꼬이나 했는데. 잘 풀렸지. 생각지 못한 소득도 쏠쏠하고 말이야. 벨로크가 망토와 뿔피리를 가방 안에 넣었다. 주문서들은 각자가 한 개씩 소지했다.
음험한 추격자도 해결한 세 사람은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금 이동했다. 아까 전 죽인 괴물들이 정말 근방의 녀석들을 다 불러온 거였는지. 더 이상 그들의 발걸음을 막는 녀석들은 없었다.
진창이 된 썩은 땅이 마치 망자의 손길처럼 발목을 질질 잡아끈다. 주변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피부로 와닿는 공기는 또 어떠한가? 솜털마저 추욱 늘어트릴 정도로 무거웠다.
세 사람은 곧 고리마 늪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린의 붉은 홍채 위로 날벌레들이 어지러지게 날아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벌레들을 잡기 위해 경솔히 손을 휘두르지 않았다. 썩어빠진 늪의 한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괴물 때문이었다.
그르르르··· 그르르르르.
소 한 마리도 한입에 삼킬 것 같은 주둥이가 아홉 개에, 잇몸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이빨들.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필시 누렇게 번들거리고 있을 파충류의 차가운 눈. 날카롭게 솟아있는 지느러미와 탁한 색의 비늘들까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포식자가 저 곳에 있었다. 녀석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 이 근방에는 없다 여겼는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잠자는 맹수의 그것처럼 흉포하게만 보였다.
“거 존나게 큰 놈이군. 무슨 빌딩만 한 데?”
“저 정도 크기라면 성체가 맞겠죠? 저런 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람?”
하지만 기사와 악마는 녀석 못지않게 흉포한 기세를 뿜어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화린은 뭐라 입을 열려다 도로 다물었다.
전투에 있어서 방심은 금물이었지만, 겁에 질려 몸이 굳는 것보다는 나았다. 결정적으로 저들의 행동이 퍽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런 괴물을 잡아 죽이는 것에, 저런 덩치를 가진 녀석을 상대하는 것에.
저들의 눈빛은 포식자를 사냥하는 포식자.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곧이어 피막 날개를 펼친 이자벨이 화살을 쏘아냈다. 떠도는 옛 전설에 대한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