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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고리마 늪지는 도보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인간이 아닌 요정 기준이지만 세 사람에게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히드라라니··· 그건 전설상에서나 나오는 괴물이 아닌가요? 이곳에서 몇십 년을 살았지만 그런 괴물이 나타났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봐요.”
화린이 달려들던 집게벌레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퍼억. 키틴질 갑각이 으깨졌다. 강철의 색으로 번들거리는 장갑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그때. 뒤편에서 투두두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넨을 끌어올렸다. 무수한 수련으로 단련된 근육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했다. 이윽고 그 표면을 딱딱하게 굳혀버렸다.
팅. 불똥이 튀었다. 무슨 방패에 가로막힌 것처럼 보였다. 독침을 쏘아냈었던 거대 벌들이 웅웅 거리며 날갯짓을 하려고 했다. 그런 녀석들의 겹눈 앞으로 음영이 졌다.
강철의 색으로 번들거리는 다리가 늘씬하게 뻗어 나왔다. 공기가 펑 찢겨나갔고, 그 자리엔 후두둑 육편만이 흩날렸다.
일행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수많은 괴물들의 군집이었다.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고블린 같은 작은 놈부터 시작해서, 외눈박이 거인 같은 큼직한 놈까지.
공통점이라고는 하나. 녀석들에게서 어딘가 다급함이 느껴진다는 것.
발짓, 손짓, 괴성. 뭐라 말해도 좋을 행동 양식들이 이를 증명해주었다. 뭐, 괴물들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어떻게 튕겨내고 어떻게 찔러넣을지. 어디를 가격 해야 할지. 발을 디딜 곳의 안전성은? 놈은 무슨 비수를 감추고 있을까? 눈깔이 여러 개 달린 걸로 봐서 사각이 없어 보이는데?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신경을 다량으로 사용해야 했다. 이건 전사로서의 습관이자,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눈먼 칼에 맞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저도 이곳에서 백··· 아니, 오래 살았지만, 왕국의 건국 초기 그런 괴물이 있었다는 얘기만 들어봤지.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뭐, 대악마보다 강하진 않겠죠.”
나이를 얘기할 때. 힐끔 벨로크의 눈치를 살핀 이자벨이 시위를 당겼다. 퉁. 쏘아진 화살이 나무 위에 있던 피그미의 미간에 퍽 박혔다.
으캭?
녀석은 멍청한 소리를 내다가 지면으로 추락했다. 끝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은 시위와 화살통을 벼락처럼 넘나들며 무수히 많은 검은 선들을 쏘아냈다.
화린의 발등을 단검으로 찍어 내리려던 놈, 나무나 수풀에 숨어 기회를 노리던 놈, 벨로크의 사각을 노리고 접근하는 녀석들까지. 식인종들의 머리, 혹은 폐나 심장에는 하나같이 뻥뻥 구멍들이 뚫렸다. 그 간격이 어찌나 짧았는지 놈들은 일제히 피를 뿜어댄 것처럼 보였다.
요정의 감각과 악마의 근력이 더해졌기에 생겨난 맹공이었다. 활대가 부서질까 봐 힘 조절을 했기에 이 정도지. 제대로 된 무기만 있었어도 놈들은 구멍이 뚫리는 대신 맞은 부위가 터져나갔을 것이다. 이자벨은 벌써부터 비명을 지르는 나무 활을 보며 후 한숨을 쉬었다.
“드워프제 석궁이 그립네요. 대체 어디에 떨군 거람···”
사방에서는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이 덤벼들고 있는데.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마을에 있었을 때보다 자유로워 보였고, 생기가 넘쳤다. 투쟁하는 전사의 모습이었다. 아니면 현실에서 등을 돌린 몽상가의 모습이거나.
잃어버렸다고? 그러면 더 좋은 걸로··· 말을 하려던 벨로크는 곧 그녀와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했다. 짜증이 약간 치솟았다. 터업. 고개를 젖혀 짐승의 이빨은 피한 그는 감정을 실어 십자검을 휘둘렀다. 횡으로 한 번, 대각선으로 한 번, 마지막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제일 먼저 두툼한 비늘이 갈라졌다. 그다음이 근육과 뼈, 마지막으로 내부 장기들이 그 희생자들이 되었다.
크르르륵···
단말마를 내지른 아룡이 쿠웅 자리에 쓰러졌다. 비늘 색이 초록색인 거로 봐서 늪지에서나 자생한다는 그린 드레이크였다. 이놈의 가죽을 벗겨다가 바트릭에게 가져다주면 그가 새 갑옷을 만들어 줄까? 아니면 꺼지라며 욕을 할까?
잠시 생각하던 벨로크는 놈이 죽으면서 뿜어낸 독연 때문에 흡 숨을 참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털이 숭숭한 괴물의 주먹과 기사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주춤 물러난 건 숲 트롤이었다.
우어어어!
놈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다른 손에 들린 몽둥이를 재빨리 휘둘렀다. 하지만 벨로크가 놈의 간격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더 빨랐다. 그는 합장 하듯이 한 손을 쭉 폈다. 이윽고 놈의 가슴에 턱 대고는 가볍게 밀었다. 무슨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듯 아주 약한 손짓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쿠웅. 진동이 울리고, 녀석의 두툼한 털이 부르르 떨렸다. 두 눈은 혈관이 팍 터져 피눈물을 흘렸다.
끄억!
내장이 진탕된 트롤은 입으로 장기들을 뱉어내며 절명했다. 이런 시발. 녀석의 토사물, 배설물, 아무튼 고통의 증거들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벨로크가 욕설을 내뱉었다.
화린에게 배운 대로 파동권의 기초를 연습한 것은 좋은데. 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화린은 막 양팔로 자기 몸통만 한 타란튤라의 관절을 뚝뚝 뽑아내고 있다가 그걸 보고 피식거렸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원래 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잘하고 계세요!”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고개를 들자, 맹금류의 발이 보였다. 이윽고 사람 몇은 합쳐놓은 듯한 날개와 세모꼴로 돋아난 이빨. 불을 뿜어내는 긴 주둥아리 역시 보였다. 비룡이었다.
“이런!”
피하기에는 늦었다. 불길은 너무도 빠르고 정확하게 그녀를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으니까. 화린은 다급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녀 주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공기의 뒤틀림 역시 일어났다. 머나먼 동방의 비기 파동의 힘이었다.
그녀는 그 힘을 여과 없이 뿜어내 불길을 비틀고 저 되다만 용을 죽이려 했다. 그 순간. 녹색 광선이 번뜩이며 비룡의 날개와 상체를 꿰뚫었다. 녀석은 걸레가 된 날개를 퍼덕거리며 추락했다. 이윽고 나무와 괴물들 몇을 깔아뭉갠 후. 추욱 혀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화린이 고개를 돌렸다. 한 쪽 손을 뻗은 채, 탁한 안광을 흘리고 있는 이자벨이 보였다. 몸에 새겨진 문신 역시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릴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아무래도 같이 부대끼며 싸우고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그녀의 됨됨이를 확인해서 그럴까? 화린은 그녀를 향한 꺼림칙함이 많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친해졌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네, 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이자벨씨.”
이자벨은 슬쩍 웃은 후에 연거푸 마력탄을 뿜어내서 남은 괴물들을 격살했다. 벨로크가 썰어대던 머리 둘 달린 오우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저번에 봤을 때부터 느낀 건데. 저것 참 쓸만한 기술이었다.
잠시 후. 일행은 온갖 괴물들의 시체와 부서진 나무들 사이에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 다른 녀석들을 감안한다면 어서 이동해야 했지만, 벨로크의 감각에 걸리는 녀석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근처 괴물이란 괴물들은 다 때려잡은 것 같았다.
뭐, 이 근방이 안전해지면 그건 또 좋은 일이다. 이자벨이 악마의 힘을 잃어버리고 그냥 요정이 된다면 지금 같은 괴물들 한 두 마리만 나타나도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까.
“역시나··· 강력한 포식자의 출현이 이 주변의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군요.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건만 비룡에 오우거, 미노타우르스까지···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이자벨이 손에 묻은 피를 핥으며 말했다. 화린이 이를 떨떠름하게 보다가 그녀가 쳐다보자 냉큼 말을 받았다.
“역시나 그 히드라라는 괴물이 나타나서 그런 거겠죠? 여기 이 녀석들은 놈에게 서식지를 빼앗기고 도망쳐 나온 놈들일테구요.”
“용과 맞먹는다는 괴물이니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죠. 그린 드레이크, 늪트롤, 늪오우거까지. 뭐, 생각할 것도 없네요.”
시체를 보던 이자벨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어느 한 곳을 힐끔거렸는데. 마침 그 앞을 벨로크가 가로막았다. 그는 뒤쪽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게 등을 내보인 상태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감시자가 있소.”
이자벨은 역시나 알고 있었는지. 눈만 깜빡거리며 긍정했다. 화린 역시 경험 많은 전사였다. 그녀 또한 특별한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와하하 웃으며 벨로크의 허리를 툭툭 쳤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가 웃긴 얘기라도 한다고 볼 만큼 태연한 연기였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들을 은밀히 관찰하는 시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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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나무에 앉은 채, 길쭉한 망원경을 접은 요정이 중얼거렸다.
-미친. 저게 대체 뭐야···
고위 순찰자 중 한 명인 아르단은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기 쓰레기처럼 널려있는 괴물들 대부분은 하나하나가 대량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놈들이었다.
한 놈을 제압하려면 자신 같은 전사 다섯은 달라붙어야 하며, 무 썰듯 저렇게 죽일 수도 없다. 그걸 저렇게 쉽게···
-한 칼, 한 주먹, 화살 한 방으로 죽였어. 인간의 솜씨가 아니야··· 에밀님의 말대로 진짜 악마거나··· 저자들의 주장대로 대악마 사냥꾼이 확실해.
옆에 있던 동료 마법사. 멜러니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젯밤 느꼈던 사내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오늘 두 눈으로 겪은 이 학살극은 와닿는 것들이 달랐다. 좀 더 현실감이 들었고, 많은 경각심과 위기감이 샘솟았다. 아르단이 다시 속삭였다.
-멜러니. 정말 저들을 우리끼리 잡을 수 있을까? 이자벨도 그렇고, 저 사내와 여인도 그렇고, 하는 행동만 보면 용도 잡을 전사들이야. 그 물뱀 역시 손쉽게 사냥당할 거라고.
한순간에 마음이 꺾인 동료를 보며 멜러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법사답게 곧 냉정을 되찾았다. 아니면 그런 척한 것이거나.
-너. 아르단. 전투란 건 언제 어디서 무슨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는 구렁텅이야. 저렇게 강해 보여도 눈먼 단검 하나에도 죽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녀가 품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틈을 노리라고 장로께서 말씀하셨잖아. 정 안 될 것 같으면 상황만 살피다가 도망쳐도 좋다고 하셨고.
멜러니는 그 말과 함께 내용물을 꺼내 보였다. 손에 들린 것은 주문서들과 웬 뿔피리였는데. 주문서들에는 각각 광선과 벼락, 불로 휩싸인 용이 그림처럼 새겨져 있었다.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물건들을 꺼낸 그녀의 손이 투명해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주문서들과 뿔피리만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곧 그녀가 들고 있던 물품들을 다시금 품에 넣자. 그것들 역시 색을 잃고 사라졌다. 멜러니는 쓰고 있던 망토 자락을 꼼꼼하게 여미었다. 옆에 있던 아르단을 덮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밀림의 괴물들 그리고 저 인간들에게서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이유는 거리 탓도 있겠지만, 이 망토의 힘이 컸다.
아멜이 빌려준 마법 물품 은하수 망토.
근처에 있는 생물들의 감각을 교란시키고, 이를 쓰고 있는 자들의 감각 역시 왜곡시킨다. 마치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도록 의식을 교란하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세계의 바깥으로 사출된 주문이 망토의 주인을 현실 세계로부터 떨어트린다. 그렇게 투명해지는 것이다.
이 기괴한 주문은 지금은 실전된 고대의 비술이었으며, 무척이나 신비롭고 위협적인 힘이었다. 어지간히 벨로크 일행을 위협적으로 생각했기에 수를 쓴 아멜의 결단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하나였다.
벨로크 일행을 감시하면서 뒤를 밟다가 그들이 히드라와 마주쳤을 때. 기회를 노린다. 전투의 결과가 압도적이라면 망설임 없이 도망친다. 그렇지 않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출한 주문과 맹독을 묻힌 화살로 끝장낸다.
뭐가 됐든 리스크는 적었으며 충분히 해봄 직한 일이었다. 그것에는 저 인간 놈들에 대한 원망도 있지만, 장로가 약속한 미래에 대한 욕망도 컸다. 그녀는 언제나 값을 두둑히 쳐주었으니까.
멜러니와 아르단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망원경을 들었다. 그리고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세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두 사람의 머리칼이 붕 떴다. 이윽고 날갯짓 소리가 들렸는데. 고개를 올리자 피막 날개를 펄럭거리고 있는 이자벨이 보였다. 언제 왔지...?
“이상하네요. 빛이 번뜩거린 걸 분명히 봤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리춤의 쌍검을 뽑았다. 저주 서린 단검이 독액을 뚝뚝 떨어트렸다. 숙련된 순찰자인 아르단은 흡 숨을 멈췄다. 멜러니 역시 입을 다물며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
떨리는 눈으로 아래를 보자 벨로크와 화린 역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실력 있는 마법사가 있었다면 이 기묘한 왜곡을 감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사와 권법가 악마였다. 이상 현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벨로크만이 자신의 감각을 교란시키고 있는 끈적한 주문의 여파를 미약하게나마 감지할 뿐이었다.
쿠웅.
화린이 나무를 걷어찼다. 수 백년 묵은 요정목이 쿠르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녀는 다시금 주먹을 꾸욱 쥐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라고 하셨죠?”
코를 킁킁거린 이자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가까이 와보니 확신이 들어요. 산자 특유의 살냄새가 나요. 정확히 어디서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시자라니. 분명 좋은 의도로 따라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강대한 괴물과 맞서기에 앞서. 등 뒤의 비수를 남겨두고 갈 순 없었다. 화린은 또다시 옆에 있는 나무를 걷어찼다. 아르단과 멜러니가 올라타 있는 나무의 바로 옆이었다. 그들이 진땀을 흘릴 때. 화린이 손뼉을 쳤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선 닥치는 대로 부숴보는 건 어떨까요? 죽기 싫다면 정체를 드러내겠죠.”
무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좋아 보였다. 누가 주먹 쓰는 사람 아니랄까 봐.
“확실히 때로는 정면 돌파가 답일 수도 있겠네요.”
이자벨의 손끝에서 녹색 연무가 피어오른 순간. 벨로크가 말했다.
“괜히 힘쓰지 말고 다들 가만히 있으시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설마 그 힘을 사용 하시려구요? 몸에 부담이 클 텐데요···”
화린이 만류했다.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성을 쓸 것도 없었다. 그저 감각을 예리하게 세우기만 해도 충분했다. 아니, 한 술 더떠서 그는 이참에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보았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삐이이 하는 이명이 섞여 있었다. 밀림의 녹진한 공기에 무언가 달콤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입안도 텁텁했고, 나무들의 미세한 표면에도 기이한 일그러짐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감각이 어긋났기에 외쳐대는 이상 현상들이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군. 이거 보통 주문이 아닌데? 벨로크는 슬쩍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끌어올렸던 감각들을 대번에 가라앉혔다. 아무것도 안 보였고,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제서야 벨로크는 이 기묘한 위화감이 어디서부터 파생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감각을 버렸기에 얻을 수 있는 제 삼의 능력이었다.
눈을 덮은 살갗 아래. 시커먼 어둠 사이로 하얀색 선들이 그려졌다. 이윽고 그 선은 나무 위에 걸터앉아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영 둘을 그려냈다. 뭐, 시발. 투명 망토냐? 저건 쓸만하겠는데?
“거기 있었나?”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발길질을 했다. 나무가 우뚝 부러지고, 남녀의 신음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