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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이든과 눈이 마주친 이자벨은 흠칫 놀랐다. 이윽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
그걸로 끝이었다. 그 반응 하나면 이든의 불안이 현실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든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눈에는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이자벨. 아니, 누님··· 그게··· 그게 대체 무슨 꼴이야?”
머리의 뿔, 금발 머리, 몸의 검은 문신과 회색빛 피부까지. 그들이 쫓고 있는 악마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마주친 누이는 그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응? 말 좀 해보라니까?”
이든은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그가 알던 누이의 얼굴이 맞았다. 목소리마저 똑같았다. 누이가··· 내 가족이 악귀가 됐다고?
“이든··· 그게···”
챙그랑. 이자벨은 칼을 떨어트렸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핼쑥했다.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벨로크의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이 이든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뿌드득
저 인간 놈. 몇 주전. 개척마을에서 만났던 그놈이다. 스스로를 이자벨의 남편이라고 소개한 괴물 같은 전사놈. 이든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인간이 아닌 솜씨라 생각했다. 녀석이 무슨 수작질을 부른 게 아닐까? 실은 놈이 악마의 하수인이고 순진한 누이를 꾀어 타락시킨 것이 아닐까? 이를 으득 문 그가 마침내 폭발했다.
“대체에에에!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아아아! 왜애애애! 왜 네가 악마가 되어있는 건데?! 왜 네가! 더러운 지하의 앞잡이가 되어있는거냐고오오! 이자베에에엘!”
믿음이 없다면 배신도 없다.
그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서려던 요정들이 흠칫 입을 다물 정도였다. 이든은 핏발선 눈으로 벨로크를 노려봤다.
“너! 이 더러운 인간! 아니, 이 악마 새끼야! 너냐? 네가 이자벨을 타락 시킨 거냐? 그러면서 그때. 순진한 얼굴로 우리들을 속였어?!”
“이든! 아니야! 벨로크는 아무런 상관없어! 다 설명할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이자벨은 턱을 덜덜 떨면서 손사래 쳤다. 하지만 이든으로서는 그녀의 모습이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아가리 닥쳐! 쾌락에 빠져 마을 사람들과 가족을 등진 이 괴물아! 네년은 더이상 내 누이가 아니··· 컥.”
침을 튀기던 그의 고개가 퍽 돌아갔다. 볼이 대번에 터져나가고, 이빨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느새 코앞까지 접근한 벨로크가 따귀를 후려친 것이다.
“끅···”
다리에 힘이 풀린 이든이 비틀거렸다.
“벨로크! 안 돼요!”
이자벨이 그의 허리를 잡으며 매달렸다. 뒤편에서 상황을 살피던 요정들이 흠칫 놀랐다. 사내의 움직임을 놓쳤기 때문이다.
“놈!”
“그 아이를 내려놔라!”
그들은 한발 늦게 날붙이를 들이댔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든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는 지금 화가 나 있었다. 정확히는 이든이 내보이고 있는 얄팍한 유대감에 더 분노했다.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한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너만은 그랬으면 안 돼.
“새꺄. 그게 가족한테 할 말이냐? 악마한테 맞서서 세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누나한테 할 말이야?”
“이 더러운 악마 새끼가!”
이든은 독기 가득한 눈으로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벨로크는 맨손으로 그걸 턱 잡고는 손쉽게 부러트렸다. 이윽고 이든의 손목 역시 꺾어주려다 이자벨의 얼굴을 봐서 그를 휙 집어 던졌다.
동족들 사이로 나뒹군 이든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덤벼들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앞으로 나왔다.
“거기 인간.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군요. 이자벨이 악마로부터 세상을 구하다가 저 꼴이 되었다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장로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아니, 대화를 좀 해보고 싶군요.”
만류하는 요정들을 뒤로 물린 그녀가 후드를 젖혔다. 장로라고 불렸지만 역시나 요정답게 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냥 앳되어 보이지도 않았는데. 바로 그녀의 깊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에밀 장로님···”
“내가 설명하지.”
벨로크는 충격 때문에 말을 더듬거리는 이자벨 대신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모닥불이 사그라들었다. 화린은 불씨가 꺼지지 않게 중간중간 장작을 집어넣었다. 요정들은 인간보다 감각이 뛰어나다. 당연히 어둠 속에서도 더 잘 본다.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화린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앞을 봤다. 불빛에 비치고 있는 요정들은 후드 때문에 표정을 살피기 힘들었다. 오직 이든만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흉흉한 기세는 여기까지 느껴졌는데. 에밀이라 불린 장로만이 침착한 표정으로 벨로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저 중에서는 그나마 대화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 중이었다.
잘 해결됐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된 얘기요.”
곧 벨로크의 말이 끝나고, 동굴 안에는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장로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검은 흑룡. 아스타로트를 당신과 이자벨이 죽였다라···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많이 다르군요. 타락의 재림을 죽인 업적은 게오르그 공작과 대교회의 것이 아니었던가?”
장로는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족원 중에도 인간 세상에 나갔다가 돌아온 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권세 있는 자들이 남의 공적을 가로채는 일은 흔한 일이지.”
“그래요, 당신 인간 놈들의 비열함이야 잘 알고 있죠.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장로님! 단 네 명이서 지옥의 권좌를 죽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누군가 그렇게 소리쳤다. 이에 동조하듯 다른 자들 역시 입을 열려고 했다. 장로는 손을 들었다.
“그만, 내가 저자와 얘기 중이지 않습니까?”
웅성거리던 주변이 대번에 조용해졌다. 그녀는 올렸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인간. 우선 당신이 대단한 전사란 건 알겠어요. 숲에 남아있던 격전의 흔적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니까 말이에요. 정령들 역시 그렇게 말했고.”
정령들을 이용해 그와 이자벨의 싸움을 지켜보고 추격해온 것 같았다. 어디까지 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 깊은 곳을 용케 찾았다 했지.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주장을 증명해주지는 못해요. 대악마는··· 오래도록 살아오며 권능을 갈고 닦은 그 지옥의 마귀들은 단순히 힘 좀 세다고 잡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니까.”
장로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인간보다 오래 살고, 더 많은 지식을 쌓음으로써 내보일 수 있는 근거 있는 오만함이었다.
그래, 칼 하나 들고 잡기에는 힘든 놈들이었지. 진짜 대악마 사냥꾼 앞에서 내보이는 그녀의 행동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증거 있냐고 물으면 마땅한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게임 속 세상처럼 어디 머리 위에 달 수 있는 칭호 같은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말을 믿겠소? 녀석들의 능력? 특징을 좀 말해드릴까?”
“신빙성도 없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얘기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나는 대악마의 실체를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신들의 생명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자벨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생산성 있는 대화가 필요할 듯싶군요.”
듣고 있던 화린이 참다 참다 짜증을 냈다.
“이봐요!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요! 대체 우리 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이런 무례한! 비겁하고 더러운 인간 놈이!”
“뭐요?!”
벨로크 역시도 화린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이 친구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저 장로라는 년은 한가닥 해보이고, 정령이라는 신비로운 힘도 미증유의 위협이었지만, 그것이 고대신이나 대악마들보다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어떻게 창칼만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엿 같은 세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잘 하면 수도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데. 게다가...'
그는 잔뜩 위축되어있는 이자벨을 힐끔 바라봤다.
생각해둔 게 있었다. 그리고 저 장로라는 년이 할 얘기 또한 짐작이 갔다. 이렇게 뜸을 들이는 새끼들은 늘 비슷한 양상을 보였으니까.
“간단해요.”
장로는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눈은 웃고 있지 않은데 입가만 조금 당기고 있는 것이 썩 꺼림칙해 보였다.
“당신들의 실력을 보여주세요. 우리 마을에 산재해 있는 위협을 처리해준다면 당신들의 말을 믿어주죠. 그리하면 이자벨의 죄는 풀릴 것이고 당신들 역시 무사히 이 밀림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라···? 하하. 저기 지금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시는 것 같은데요?”
피식 웃은 장로가 손짓했다. 그러자 시위 걸린 화살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수십 발의 살인 무기가 일행을 향해서 겨눠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화살촉 중 몇 개는 불길에 휩싸여 불화살이 되었다. 어떤 것은 돌이 되거나 얼음으로도 뒤덮였다.
정령사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원소의 폭풍이었다. 요정 군대를 뒤에 둔 채, 손을 들어 올린 장로는 여전히 미소 비스무리한 걸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 위에도 역시나 불덩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당신들을 지금껏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그간 부족과 왕국, 동족들을 위해 봉사해온 이자벨의 노고 덕분입니다. 그녀가 비록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영혼마저 더럽혀졌다고는 하나 그동안의 업적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동족 중에서 피해를 본 자도 없었고···”
에밀은 손가락을 내릴 듯 말듯 장난을 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일견 장난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본다면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그들의 말을 믿지도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자벨이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파악한 듯했다. 여우 같은 년.
“인간. 그리고 이자벨. 당신들한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들의 일을 돕던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나던지. 선택하세요. 이 간격 안에선 천상신이 온다 해도 못 피하니까.”
"..."
이자벨은 침묵했다. 그녀는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예상은 했지만 동족들로부터 이런 취급을 당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픈 듯 했다.
“무슨 이런 무도한··· 그게··· 그게 지금 동료이자 가족이었던 사람에게 할 소리예요?!”
이자벨을 잠깐 바라본 화린은 이를 으득 물면서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녀의 몸 주위에서 새하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벨로크는 침착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시큰둥한 눈으로 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태도가 저럴진대. 이자벨이 돌아간다 해도 반겨줄까? 뭐,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 그가 말했다.
“그쪽이야말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벨로크는 내면의 신성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거래를 할 생각은 있지만, 겁박당할 생각은 없다. 그랬다간 자신들을 믿지도 않고, 이용할 생각만 가득한 것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만 다닐 테니까.
쿠르르르
돌조각이 툭툭 떨어지며, 동굴이 비명을 질렀다. 공기 역시 달라졌다. 폐로 들어오는 숨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나가는 숨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숨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허어억···”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들었다. 마법사들의 주문 세계 또한 우르르 흔들리며 영창을 방해했다. 미소 짓고 있던 장로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이건···”
“내가 지금까지 당신들을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이자벨 때문이오. 나아가서는 이 전쟁을 막고 싶어서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소.”
심약한 요정 몇이 털썩 쓰러졌다. 나머지 요정들도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오래전. 세상을 호령하며 이 땅을 다스려왔던 지배자의 힘. 고대신의 신성은 차마 그들이 고개를 빳빳이 드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으으으···”
장로는 마지막 자존심을 끌어올려 고개를 들었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어둠 속. 2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사내가 자신을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에밀의 눈에는 저 사내가 거인보다도 더 커 보였다. 아무리 손을 뻗는다고 해도 닿지 않을 법한··· 어떠한 초월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것이 말했다.
“닥치고 그 위협이라는 것에게 안내해라. 기꺼이 처리해줄 테니까. 그리고 그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너희들은 이자벨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 거야. 믿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내 말. 알아들었나?”
장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