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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애, 애인요? 베로니카공 말고 여자가 또 있었단 말이에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악마를 애인으로 뒀다구요?!”
“어떻게 된 거냐면···”
벨로크는 상황을 설명하려다 다시금 십자검을 휘둘렀다. 팅. 단검 같은 손톱이 칼날과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앞을 보자 탁한 눈을 부릅뜨며 이를 드러내고 있는 이자벨이 보였다.
하르모아가 그녀의 마력을 폭주시켰을 때하고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벨로크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칼날과 깊은 족적이 파이고 있는 제 발을 보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대악마 급이었다.
크아아악!
힘겨루기는 잠시였다. 괴성을 지른 그녀가 채찍 같은 꼬리와 피막 날개를 동시에 날렸다. 그 모든 공격 하나하나가 흐릿하게 보였다. 쇠뇌살보다 몇 배는 빠른 악마의 맹공이었다.
“벨로크씨!”
화린이 뛰쳐나가려고 했다. 사정은 모르지만, 그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니, 뭔가 해볼 셈이었다. 가령 팔을 잡는다거나···
“위험하니 나서지 마시오.”
화린을 만류한 벨로크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는 한순간에 힘을 극도로 집중해 그녀의 손톱을 밀어냈다. 이윽고 폼멜로 왼 날개를, 칼끝으로 오른 날개를 쳐냈다. 쏘아지던 꼬리는 왼손으로 턱 잡았다.
뿌드드득
그는 잠깐 망설였지만, 곧 힘을 줘서 그것을 뽑아버렸다.
끼아아악!
일단 제압부터 하고, 그다음에 정신을 차리게 할 속셈이었다. 생각해둔 게 있었다.
벨로크는 흐읍 숨을 쉬고는 왼 주먹을 꾸욱 쥐었다.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힘. 넨이 모여들었다. 바위 같은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그는 성벽도 부수는 주먹을 그녀의 배에 찔러넣었다.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울컥 검은 피를 토했다. 하지만 이자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튕겨 나가는 도중 양손을 뻗더니 그 속에서 마력을 뿜어냈다.
이건 또 뭐야? 벨로크는 녹색 광선을 얻어맞으며 바닥을 굴렀다. 난쟁이가 수리해줬던 갑옷에 구멍이 뻥 뚫렸다. 드러난 맨살은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지하의 마력이 주는 맹독이었다. 이자벨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붕 날아간 그녀는 거대한 나무 두어 그루를 박살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는데. 어느새 뜯겨나간 꼬리와 부러진 갈비뼈가 재생되어 있었다. 거의 전라에 가까운 몸뚱이였기 때문에 아주 잘 보였다.
“세상에··· 저게 무슨···”
그 경악스러운 재생력에 화린이 질린 얼굴을 했다. 벨로크는 썩은 살집을 단검으로 도려냈다. 꺼지지 않는 심장이 잘려 나간 살점을 재구성했다. 그는 검은 피를 퉤 뱉었다.
“평소에는 착한데. 한 번 회까닥 돌아버리면 이렇소. 무서운 여자지.”
벨로크는 씨익 웃으며 마주 달려 나갔다. 침을 질질 흘리는 그녀의 비명, 핏발 선 탁한 눈, 휘두르는 공격들은 살의만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찌 즐겁지 않을까? 생사가 불분명했던 내 동료, 아니, 애인을 다시 만났는데. 그는 그녀와 치렀던 그 뜨거운 밤을 아직도 기억했다.
“흡.”
벨로크는 한 발 크게 내디디며 십자검을 휘둘렀다. 베른하트의 은장검이 악마의 마력에 반해 요란하게 빛났다. 이를 상대하는 이자벨은 다시금 마력탄을 쏘아냈다.
사이한 주문을 가르느라 칼날이 조금 느려졌다. 그녀의 발이 땅을 박찼다. 여기에 피막 날개가 가속을 더 했다.
피잉.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벨로크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빠른데?”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눈도 굴리지 않은 채, 검을 역수로 잡았다. 이윽고 등 뒤를 향해 폼멜을 휘둘렀다. 휘둘러오던 악마의 손톱이 십자가 장식과 맞부딪쳤다. 콰앙.
잎새가 우르르 흔들리고, 천둥이 쳤다. 인간을 초월한 전사의 괴물 같은 근력과 먹이사슬의 정점에 이른 괴물의 힘이 부딪힘으로써 나타난 현상이었다.
벨로크의 팔 갑주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그의 두꺼운 팔 역시 피를 촤악 뿌렸다. 철금강을 두르지 않았으면 팔이 사라졌을 것 같았다. 물론, 이자벨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녀의 한쪽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덜렁거렸다. 인간이라면 바닥을 구르다 쇼크사할 중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었다. 입가가 찢어지는 악귀의 미소였다. 그녀는 제 오른팔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는 남은 비수를 휘둘렀다.
강철도 뚫은 채찍 꼬리, 근육과 뼈를 가르는 피막 날개, 성검과 맞부딪쳐도 흠집 하나 없는 나머지 손톱까지. 둔탁하면서도 실로 파괴적인 살인 병기들이었다.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저 사내의 몸에서 익숙한 향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배를 갈라 내장을 뜯어먹고, 피를 술처럼 마신다면 이 갈증이 좀 채워질지 몰랐다. 그렇다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안개도 좀 흩어질 것이다.
그저 한 마리의 짐승처럼,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린 타락 요정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몸이 꿰뚫린 먹잇감으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안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을 가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서 있던 벨로크의 모습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잔상이었다. 너무도 빨리 움직였기에 생겨난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악마의 녹색 안광이 쉴 틈 없이 돌아갔다. 몸의 감각 역시 극도로 끌어올려졌다. 그녀는 오싹 서늘함을 느꼈다. 뒤쪽이었다. 이자벨의 한쪽 손에 녹색 기운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강렬한 고통과 함께 팔이 우득 꺾이는 것이 더 빨랐다.
끼아아악!
위기를 느낀 그녀는 제 몸 안의 검은피를 끌어올렸다. 피부에 새겨진 검은 마법진이 불길하게 빛나고, 그 힘을 증폭시켰다. 부러진 뼈가 제자리를 찾으며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금 주먹이 휘둘러졌다.
재생되던 팔이 뚝 부러졌다. 마력탄도 날릴 수 없었다. 힘이 모여서 뻗어나가려고 하는 순간. 벨로크의 주먹이 절묘하게 타격해 마력을 흩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날개와 꼬리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그 채찍은 마치 폭풍처럼 주변을 헤집었다. 땅이 깊이 파이고 걸리적거리던 나무들이 쿠르르 쓰러지며 톱밥을 흩날렸다. 벨로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의 간격 안으로 한 발 들어가며 무릎을 치켜올렸다.
꺽.
가슴을 얻어맞아 숨이 턱 막힌 그녀가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그 한순간의 틈으로 무자비한 연타가 이어졌다.
왼 주먹, 오른 주먹, 다시 왼 주먹. 그 다음에는 발차기. 날개가 우득 꺾이고, 꼬리가 짓뭉개졌다. 양팔과 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투성이가 된 전사는 무자비한 손길로 제 애인을 후드려패고 있었다. 재생되는 것 보다 파괴되는 것이 더 빨랐다.
물론 지근거리에 접근한 그 역시 그녀의 반격을 받아야 했다. 악마의 주먹을 맞은 갈비뼈가 우득 부러졌다. 단검 같은 손톱은 눈을 찌르려다 목덜미를 움큼 뜯어냈다.
촤아아악
동맥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그 상처는 피를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심장의 권능이 없었다면 과다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투박하고도 압도적인 우격다짐에 화린이 헙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제 벨로크를 말려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었다. 그 사이에 승부가 났다.
끄,끄으으으···
그녀가 숨을 헐떡거리자 벨로크는 눈을 빛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지려는 이자벨을 턱 잡고는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아주 가까웠다. 숨결이 곧바로 느껴질 정도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정신 차리면 혼나는 거 아닌가 몰라.”
고대신의 계약자는 신성을 끌어올렸다. 지금 바로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다. 몸에 입은 상처로 인해 곧바로 죽어버릴 테니까. 대신에 그녀를 좀먹고 있는 저 악독한 마력은 잠재울 수 있겠지.
벨로크는 그녀의 몸에 신성을 불어넣었다.
섭리를 비틀 것도 없었다. 애초에 마력이란 신성의 쪼가리를 먹고 괴물이 된 대악마들이 남긴 유산. 그보다 순도 높고 강력한 힘을 가진 기운이 몸에 스며들자. 겁에 질린 짐승처럼 꼬리를 말며 사그라들었다.
“크, 크아아아악! 아, 아아아아···”
짐승 소리를 내던 악마의 목소리가 고운 미성으로 바뀌었다. 피막 날개와 꼬리 또한 꾸드득 소리와 함께 몸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윽고 빛이 사라진 벨로크의 손에는 그저 회색 피부의 여인네 하나가 안겨있을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 소란이 일어났으니 필시 추격자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인간 사냥꾼들로부터 구해주었던 요정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벨로크는 기절한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묵을 곳을 좀 찾아봅시다.”
미사일이라도 떨어진 듯한 흔적을 뒤로한 채, 세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지면이 꿈틀거리더니 스스로 뭉쳐 어떠한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흙으로 된 작은 인형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살랑거리던 바람 또한 소용돌이처럼 뭉치더니, 날개 달린 작은 여인네의 형상이 되었다.
-□□□?
-□□□!
이윽고 그 대자연의 권속들은 자신들의 계약자에게 방금 본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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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의 눈이 떠졌다. 그 눈은 그녀가 요정이었을 때처럼 맑고 산뜻한 기운을 뿌리지 않았다. 썩은 늪의 색깔처럼 탁했으며, 요요하면서도 섬뜩한 불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눈을 끔뻑거렸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는지 주변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동굴이었다. 한쪽에는 죽어있는 곰 한 마리가 보였다. 그 사이로 처음 보는 여인네 하나랑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있었다.
누구? 그녀의 시선이 돌아가다가 우뚝 멈췄다. 사내는 칠흑처럼 시커먼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몸은 좀 괜찮나?”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다면 얼핏 위협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르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렇게 느꼈었으니까.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요?”
이자벨은 몸을 덮고 있는 모포를 슬며시 걷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두 눈은 여전히 몽롱했다. 벨로크는 수프를 떠먹으며 답했다.
“물이라도 한잔 줘?”
벨로크는 그릇을 내려놓고 컵을 들었다. 화린이 가죽 부대를 기울여 이를 채워주었다. 주석 잔이 입가로 다가왔다. 그 태연한 모습에, 그 무덤덤함에 이자벨은 정신이 확 드는 것을 느꼈다.
“벨로크! 그동안...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이자벨은 울컥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안겼다. 맨살에 와닿은 갑옷은 차가웠고, 끈적했다. 몸에서는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다는 듯. 오히려 더 깊게 파고들 뿐이었다.
그의 체취, 등을 감싸는 단단한 손,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까지. 이자벨은 이 모든 것을 몸에 새기겠다는 듯.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는 울면서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발음이 뭉개져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못 본 사이에 울보가 다 됐군.”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벨로크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등을 토닥거렸다. 이자벨은 한참이나 그의 품에 안겨 울다가 목에 키스했다. 이윽고 입술까지 탐하려다 화린이 있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렸다.
“아··· 저,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나가 있을까요?”
화린은 애매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붉은 동공에는 혐오감도 섞여 있었고, 측은함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악마가 미치도록 싫었다. 자신의 가족을 앗아간 그 괴물들이 끔찍하게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야영을 준비하는 도중. 벨로크로부터 그녀에 대한 사정을 들었다. 대악마의 저주를 받아 저 꼴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하지만 화린은 어째선지 이자벨이 꺼림칙했다.
이것은 악마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가? 아니면··· 그를 뺏긴 것 같다는 저열한 질투심 때문인가? 아니,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런 년이었나? 고개를 휙휙 젓는 화린이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생각할 때. 이자벨이 말했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나저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나는 이자벨. 몰아치는 폭풍 부족의 순찰대 출신이자 요정왕 엘가르님의 창칼이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다 때려치고 여기 이 사내의 동료로서 세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 중이었죠. 화린씨라고 했죠?”
그녀는 여전히 벨로크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전라가 된 몸뚱이가 탐스러운 과일과도 같았다. 가슴은 탄탄하면서도 봉긋하게 솟아있었고, 허벅지와 종아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화린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와 볼품없는 제 가슴을 비교하다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아, 네, 네. 화린입니다. 강철권의 수행자이자 이제는 계승자죠. 어, 음. 잘 부탁드려요. 이자벨씨.”
“네. 나도 잘 부탁해요. 안 잡아먹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이자벨은 싱긋 웃으며 농담을 건넸지만 화린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자벨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이 몸뚱이가 된 후. 사람들의 저런 반응은 너무도 익숙했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체념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자신을 올곧이 받아주는 얼마 안 되는 인간. 벨로크의 품에 좀 더 깊숙이 안겼다.
“으음···”
“어리광도 좀 늘은 것 같은데···”
그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손수건에 물을 적셨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과 몸에 묻은 피딱지를 조심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옛날이었다면 이런 일은 꿈에도 못 꿨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 도시의 이방인은 점점 더 이 세계에 동화되고 있었다.
“아··· 좋아요. 거기··· 음... 당신.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었어요?”
이자벨은 눈을 감으며 그의 손길을 음미하다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했다. 아델과 카라와 함께 그를 찾기 위해 온 대륙을 돌아다닌 것. 신성 왕국에서 이단 심문관들을 만난 것. 결국 굶주림과 갈증을 이기지 못한 자신이 그들을 죽인 것. 마지막으로···
“솔직히 말하면··· 죽으려고 했어요. 이런 내 자신이 비참해서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있을 때. 스스로 목을 그으려고 했죠. 그러다가 미련이 하나 생기더군요. 마지막으로··· 고향이 보고 싶었어요. 동생의 얼굴도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로 왔는데···”
“또다시 폭주한 거로군.”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향 땅을 밟은 것 까지는 기억나요. 하지만 그 후로는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닥치는 대로 죽이고··· 먹었다는 것밖엔···”
이자벨의 몸이 떨렸다. 동족들을 헤쳤을까 봐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벨로크를 올려다봤다. 자신의 얘기는 이걸로 끝이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이자벨에게 모포를 덮어주며 말했다.
“나는···”
그 역시도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제 속에 있는 것이 실은 절대신의 영혼이라는 것. 그의 농간으로 인해 외딴 장소로 가게 된 것.
로벤에서 베로니카를 만나고, 초승달 섬에서 고대신과 계약하고, 결국에는 요정과 인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이곳 나스 밀림으로 온 것까지.
이는 이자벨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화린에게 하는 설명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 역시 동료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에 이자벨을 향한 반응을 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역시나 두 사람은 입을 떠듬거렸다.
“고대신과 천상신, 대악마들의 비화를 이렇게 듣게 되는군요. 당신이 한 말이 아니었다면 차마 믿기 힘들었을 거예요. 게다가... 동족들에게 역병을 퍼트린 게 어쩌면 대악마 일지도 모른다니... 엘가르님이 이와 관계되어 있다니..."
이자벨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소식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린 역시 또 다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사태가··· 그··· 인간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요? 벨로크씨의 속에 있는 그 인간. 아니, 그 신은 대체 왜 그런 짓을 한데요? 왜, 왜 자신이 힘들게 구한 세상을 다시 파괴하려 드는 거죠?”
절대신과 자신이 이계에서 온 존재라는 건 밝히지 않았다. 그랬다간 대체 무슨 말부터,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해야 할 테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소. 내 몸을 빼앗아서 이 엿 같은 세계를 부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하긴··· 믿고 있던 동료들한테 배신당해서 그 꼴을 당했다면 그럴 법도 하네요... 그보다 당신 괜찮..."
말을 하던 그녀의 길다란 귀가 쫑긋거렸다. 벨로크 역시도 눈을 가늘게 떴다.
“불··· 끌까요?”
심각한 얼굴의 화린은 동굴 입구를 보며 발을 뻗었다.
“아니, 이미 늦은 것 같소. 발이 빠른데.”
이자벨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벨로크가 옆에 세워놓은 검을 들어 올렸다. 화린은 두 주먹을 꾸욱 쥐며 오른발은 앞으로 왼발은 뒤로 뻗었다. 이자벨 역시 발가벗은 몸 위에 모포 하나를 걸쳤다. 이윽고 엉망이 된 제 갑옷을 뒤져 쌍검 두 자루를 뽑았다.
세 사람이 자세를 잡은 순간. 동굴 바닥이 두두두 울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로브의 귀 부분이 뾰족 튀어나온 걸로 보아 요정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이는 램프를, 어떤 이는 어깨 위에 불덩이를 둥둥 띄우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걸로 보아 정령처럼 보였다.
“저들은···”
이자벨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자들을 만났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건 반대편에 있던 요정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얼굴이 안 보임에도 동요를 드러내고 있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 모든 시선은 회색 피부에 기괴하게 생긴 뿔을 가진 여인. 타락한 흑요정을 향하고 있었다.
고요한 공동안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터벅. 발소리와 함께 그 침묵을 깬 누군가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가 후드를 벗었다.
금발 머리칼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요정 사내. 이든이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